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생명의 실상 2000년 0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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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때면 언제나 "목사님, 물 많이 드세요" 하고 말하는 후배―나는 그를 '물먹이는 후배'라고 부릅니다―가 다녀갔습니다. 잘 웃는 아내와 눈만 마주치면 벙긋 웃는 예쁜 딸을 데리고 말입니다. 점심을 같이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후배는 아주 흥미로운 경험을 나누어 주더군요.

어느 날 어린 딸을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하고 있었대요. 하늘은 평화로웠고, 소담하게 피어있는 꽃과 널어 말리는 붉은 고추의 기묘한 부조화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날이었답니다. 그 느긋하고 고요한 정경 사이로 배추흰나비 몇 마리가 나풀나풀 날더랍니다. 눈으로 나비의 궤적을 좇고 있는데 갑자기 한 마리의 속도가 쳐지더니, 급기야는 중심을 잃고 땅에 툭 떨어지더래요. 그 느닷없는 광경에 말을 잃고 서있는데, 나비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다시 날아보려고 여러 차례 날개를 퍼득거렸지만 결국 이륙에는 실패하더랍니다. 잠시 후 배추흰나비는 체념한 듯 두 날개를 접고는 가만히 땅에 눕더래요. 마치 운명 시간을 감지하고, 순응하는 것처럼요. 아주 평화로워 보이더랍니다. 조금 있자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개미떼가 몰려오더니 덩치 큰 나비를 이리저리 뒤척이며 끌어가느라고 한 두어 시간이나 법석을 떨더랍니다. 후배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하더군요. "생명이 그렇게도 가데요.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늘하늘 잘도 날더니."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얼마 전 산에서 본 광경이 떠올라 후배에게 그 이야기를 들여주었습니다. 이야기 품앗이인 셈이지요. 도봉산에 올라갔다가 문사동 계곡으로 내려오는 길이면 종종 들러 탁족을 하는 곳이 있어요. 드러누워 쉬기 좋은 너럭바위 밑 계류에 발을 담그면 "세상 번뇌 시름 잊고 청산에 살리라" 하는 가락이 저절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 날도 바람소리처럼 들리는 물소리의 유혹에 끌려 그 바위에 걸터앉으려는 데, 눈 앞에 조그마한 나무토막 같은 게 보여요. 그런데 어쩐지 나무토막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살짝 건드려 보았더니, 그 물체는 아주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몸을 굴려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더니 또 꼼짝을 안하는 겁니다. '요녀석, 너 나방이구나. 그런데 나무토막인 체 하고 있어.' 녀석이 그곳에 웅크리고 있는 까닭을 알 길은 없었지만 그래도 녀석의 평화를 깨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모른 체하고, 계류에 발을 담그고 앉아 제법 은자의 흉내를 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그 나무토막 같은 녀석이 내 시선을 빼앗는 게 아니겠어요? 마침내 녀석이 척 일어나 앉더니, 큰 날개를 활짝 폈던 것입니다. 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펴는 것처럼요. 그리고는 파르르 떨듯이 날갯짓을 시작하더군요. 애벌레적 흔적이 남아 있던 날개를 말리는 거였나봐요. 기껏해야 일 분 정도나 되었을까요? 이윽고 나방은 날개에 하늘 에너지를 다 채운 듯, 눈부신 날갯짓 한번에 저 푸른 허공을 향해 휙 날아가더군요. 참 아름다운 비상이었습니다. 뜬금없이 고 박정만 시인의 終詩가 떠오르더군요. "나는 사라진다/저 광활한 우주속으로." 대책없는 이 감상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방의 비상을 통해 흘낏 본 영원 때문이었을까요?

후배는 눈을 빛내며, "그 이야기가 더 좋으네요" 하더군요. 하지만 더 좋은 이야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두가 생명의 실상을 보여주는 한 장면들인걸요. 어느 경우든 삶과 죽음이 이처럼 자연스러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세상에서 누구를 위해 우리들이 실을 감고 옷을 짜며, 눈부신 삶의 씨줄과 검은 죽음의 날실을 가지고 이런 신비한 무늬를 베틀어 앉아 짰다, 풀었다 하는지 알고 싶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말인데요. 그만 실례하겠습니다. 지금 갑자기 내가 짜고 있는 옷감을 확인해보고 싶어졌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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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ita(20 10-19 05:10)
청파교회 성도님들이 부럽네요. 목사님의 이런 글들을 받아보실 수 있어서! 목사님의 감성이 예수님의 감성과 닿아있으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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