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일상으로 그리는 이야기 2000년 0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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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체리꽃 향기」에는 살아야 할지 죽어야 할지 몰라 배회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말투로 보아 그는 지식인입니다. 재산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독해 보입니다. 삶에 멀미를 느낀 것일까요?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선 위에 서서 그는 어느 한편으로 넘어가고 싶어합니다. 망설임은 성실성의 증거이고 확신은 사기의 증거라지요? 너무 극단적인 말인가요? 하지만 여기에는 귀담아 들을만한 점이 있습니다. 회의 없는 강철같은 확신은 아무래도 의심스럽습니다. 생 자체가 이럴수도 저럴수도 있는 모호하기 이를 데 없는 것 아닙니까? 어느 시인은 만물은 흔들리면서 흔들리는만큼 튼튼한 줄기를 얻는다고 했습니다만, 무릇 살아있는 것들은 다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자기가 정해 놓은 길을 흔들림 없이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한편으로는 부럽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외계인을 보는 것 같아 뜨악해집니다.
영화 속의 사내는 마음의 정처를 정하지 못해 속절없이 흔들립니다. 그는 다만 그 지긋지긋한 흔들림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스스로 생을 청산할만큼 모질지도 못합니다. 그의 표정에는 죽음의 핍진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자신없거든 그냥 살어" 하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죽음에 혹은 삶에 입회해주기를 소망합니다. 수면제를 먹고 체리나무 옆 구덩이에 몸을 눕힌 후 그냥 영원히 잠들어 버리면 누군가가 와서 자기 시신 위에 흙 한 줌 뿌려주기를 바라는 거지요. 어찌 보면 그는 죽음의 인력에 끌려가고 있지만, 실상은 삶을 향해 마음의 촉수를 맹렬하게 내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죽음에 입회해 달라는 요청에 응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쟁터에서 수많은 죽음을 보았을 군인도, 생과 사의 문제를 가장 진지하게 고민하는 신학생도 말입니다. 그러나 한 노인만이 그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노인은 자기의 경험을 들려줍니다.
"결혼한 직후 내게는 온갖 어려움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난 너무 지쳐 끝장을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새벽동이 트기 전에 차에 밧줄을 실었어요. 난 자살하기로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난 미아네를 향해 출발했어요. 그때가 1960년이었습니다. 난 뽕나무 농장에 도착했는데 그곳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해가 뜨지 않았어요. 난 나무에 밧줄을 던졌지만 걸리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던졌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그래서 난 나무 위로 올라가 밧줄을 단단히 동여맸습니다. 그때 내 손에 뭔가 부드러운 게 만져졌어요. 체리였습니다. 탐스럽게 익은 체리였어요. 전 그걸 하나 먹었어요. 과즙이 가득한 체리였습니다. 그리곤 두 개, 세 개를 먹었어요. 그때 산등성이에 태양이 떠오르더군요. 정말 장엄한 광경이었습니다. 그리곤 갑자기 학교에 가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어요. 그 애들은 가다말고 서서 날 쳐다보더니 나무를 흔들어달라고 했어요. 체리가 떨어지자 애들이 주워 먹었어요. 전 행복감을 느꼈어요. 그리곤 체리를 주워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내는 그때까지도 자고 있더군요. 잠에서 깨어나 그녀도 체리를 먹었어요. 아주 맛있게 먹더군요. 난 자살을 하러 떠났지만 체리를 갖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체리 덕분에 생명을 구한 거죠. 체리가 내 생명을 구했어요."

영화 속의 그 사나이가 노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에 대한 멀미에서 회복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 가지 사실이 명료하게 떠오릅니다. 하나는 이야기가 갖는 치유의 능력입니다. 그 노인은 삶을 강변하지 않습니다. 심드렁하게, 빛바랜 사진첩을 들여다보며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합니다. 자기 이야기를 극화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 이야기가 제 영혼에 이처럼 맑은 종소리처럼 울려오고 있을까요? 다음은 그 이야기 속에서 체리가 갖는 매개기능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맛보는 체리, 그것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 갖는 일상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체리는 삶이 보내는 눈짓이었고, 아이들과의 소통의 통로였으며, 아내와 더불어 살아가야 할 시간을 매개해주는 육체적 고리였습니다.
가장 비근한 일상은 때로 우리로 하여금 멀미를 하게 합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이 지옥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비근한 일상과, 복잡하게 얽혀있는 관계망이야말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기도 합니다. 일상은 우리를 넘어뜨리는 걸림돌일 수도 있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디딤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주고받는 사소한 눈짓, 몸짓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명멸하는 불빛입니다. 그 불빛들이 모여 생을 이루는 것이겠지요? 소설가 조성기씨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공감이 갑니다. "죽음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가장 아쉬웠던 것은 일상이었습니다. 아버지노릇, 남편노릇, 인간노릇을 제대로 못한 것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공포에 떨었습니다." 일상으로 그리는 이야기, 그게 생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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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정(21 02-23 06:02)
걸림돌,디딤돌, 불빛. 죽음의 옷자락이라는 절망속에 희미하게 비춰지는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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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24 03-31 11:03)
죽음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가장 아쉬웠던 것은 일상이었습니다. 아버지노릇, 남편노릇, 인간노릇을 제대로 못한 것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공포에 떨었습니다." 일상으로 그리는 이야기, 그게 생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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