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고, 온갖 조롱을 다 퍼부었다.
15세기의 화가인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조롱 당하는 그리스도>(1440-1)는 매우 그로테스크하다. 에메랄드 빛 벽면을 배경으로 흰색 옷을 입은 그리스도가 앉아 있다. 그의 오른손에는 홀이 들려 있고 왼손에는 지구를 상징하는 공이 들려 있다. 그의 주변에는 신체의 여러 부분들이 그려져 있다. 막대기를 들고 예수를 때리는 손, 침을 뱉고 있는 이의 얼굴, 조롱하고 때리기 위해 펼쳐진 손바닥과 손등. 그 아래쪽에는 묵상에 잠긴 도미니크 성인의 모습이 보인다. 그 그림은 마치 우리에게 예수를 때리고 침을 뱉고 조롱하고 있는 것이 '당신이 아니냐'고 묻고 있는 듯하다.
닭울음 소리가 들릴 때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처럼 차마 예수를 외면할 수는 없어 그곳까지 따라갔다. 하지만 적의를 드러내고 있는 이들 앞에서 자기 정체를 드러낼 용기는 없었다. 그가 바깥 뜰에 앉아 있을 때 여종 하나가 나아와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고 말하자 그는 그 사실을 부인한 후에 앞문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도 다른 여종이 그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한다.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며 부인한다.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이 "너도 진실로 그의 도당이라 네 말 소리가 너를 표명한다"고 확언하자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한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74). 단순한 부인에서 맹세하며 하는 부인으로, 더 나아가 저주하며 하는 부인으로 전개된다. 베드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는 그 상황에 마구 떠밀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 닭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무심한 동물의 울음 소리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셨던 말씀을 일깨웠다. 베드로는 마치 악몽에서 깨어난 것처럼 밖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 절대로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그 베드로는 지워졌다. 장하던 의기는 어느 결에 꺾였고 남은 것은 추레하기 이를 데 없는 실존이었다. 포도송이에 비유하자면 베드로는 으깨진 포도알갱이가 된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트라우마가 그의 가슴 깊은 곳에 새겨졌다. 그는 과연 한용운이 '당신을 보았습니다'에서 말한 것처럼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볼 수 있을까?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라에 '당신'과 만날 수 있을까?
십자가형을 언도받으심
본문 / 마태27:1-26
새벽,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시인 정일근은 새벽을 가리켜 "귀신으로 잠들었다 사람으로 눈을 뜨는 시간,/어둠과 빛 사이 잠깐 저 푸른 시간"('새벽과 아침 사이' 중에서)이라 했다. 새벽은 누군가에게는 설렘의 시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눈물을 삼키며 견뎌야 할 고난의 시간이기도 하다. 새벽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를 결박하여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간다. 야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유다의 죽음
마태는 독자들의 시선을 잠시 가룟 유다에게로 돌리게 한다. 빌라도의 재판 이야기 속에 삽입된 이 이야기는 매우 단절적이다. 실제로 이 이야기의 배경은 성전이다. 마태는 예수가 정죄되는 것을 보고 유다가 뉘우쳤다고 전한다. 그 뉘우침은 참된 회개가 아니라 자책이다. 그는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되돌려 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4a)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도자들은 그것은 자기들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면서 "네가 당하라"고 말한다. 이미 일어난 일을 뉘우칠 수는 있지만 무화시킬 수는 없는 법이다. 유다는 은을 성소에 던져 넣은 후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그는 자기 스스로 죄에 대한 형벌의 집행관이 된 것이다. 닭 울음소리를 듣고 밖에 나가 통곡했던 베드로와 대조적이다. 마태는 왜 재판 이야기의 진행을 끊으면서까지 유다 이야기를 끼어 넣은 것일까? 유다의 진술을 통해 예수의 무죄함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유다는 은 삼십을 돌려줌으로 예수 죽음의 궁극적 책임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무죄함을 강변하지만 핏값인 은 삼십을 성전고에 넣어 둘 수 없다고 함으로써 이 일이 부당한 일임을 간접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마태는 그 돈이 토기장이의 밭을 사는 데 쓰였고, 그 밭은 나그네들의 묘지로 삼았다고 전한다.
어리석은 열정
마침내 예수가 총독 앞에 섰다. 총독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는 간결하게 대답한다. "네 말이 옳도다".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그렇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새번역은 이것을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소"로 옮겼고, 공동번역은 "그것은 네 말이다"로 옮겨놓았다. 알쏭달쏭한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는 더 이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뭐라 고발하든 예수는 자기를 변호하려 하지 않는다. 고난받는 종의 노래가 떠오른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사53:7a). 빌라도는 이미 예수가 무고한 사람이며, 성전 체제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하는 그의 영향력이 더 이상 확대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공권력을 빌어 예수를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빌라도가 보기에 예수는 체제전복적인 위험 인물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정말 그러한가?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행위만을 체제전복적으로 본다면 그의 판단이 옳다. 하지만 예수가 로마제국이 기대고 있던 가치의 토대를 뒤흔들었다는 측면에서는 그의 판단이 그릇되었다. 여하튼 빌라도는 완강한 침묵 속에서 고요함을 잃지 않는 이 사나이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그의 죽음에 연루되고 싶지 않았던 그는 명절 때마다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관례를 언급하며 바라바와 예수 가운데 누구를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다. 마가는 바라바를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막15:7)로 소개하고 있지만 마태는 그저 '유명한 죄수'라고 서술할 뿐이다. 유명하다는 말은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마태는 이 긴박한 장면 가운데 빌라도의 아내의 꿈 이야기를 삽입한다. 마태복음에서는 꿈 이야기가 많다. 요셉이 꾼 꿈 이야기나 동방박사들의 꿈 이야기가 그것이다. 꿈은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는 통로 가운데 하나이다. 총독의 아내는 사람을 보내어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19) 하고 말한다. 총독의 아내가 여기 등장하는 것은 예수의 무죄에 대한 증언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무리를 선동하여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외치게 한다. 주체가 되지 못한 즉자적 군중들은 언제나 그릇된 권력의 도구로 화할 수 있다. 플라톤도 <국가>에서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 통치하는 민주정이 자칫하면 중우정치(衆愚政治)로 전락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무리들의 오도된 열정은 반성을 모른다. 내친 김에 달려가는 것이다.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라는 무리의 강력한 요청 앞에서 빌라도는 민란이 날까 두려워 물을 가져다 손을 씻으며 말한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24). 유대교 지도자들이 유다에게 했던 말을 빌라도가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방향이 뒤집혀 있다.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25). '무리'라 지칭되던 이들이 여기서는 '백성'(laos)으로 지칭되고 있다. 이 단어는 계약 백성 전체를 이르는 말이다. 그들은 이 말로 인해 역사 속에서 벌어지게 될 참극을 짐작이나 했을까? 예수는 마침내 죽음의 벼랑 끝에 서게 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본문 / 마태27:27-44
정신과 전문의인 정혜신 박사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합일화'를 이렇게 설명한다. "합일화란 '자기'와 '자기 아닌 것'을 구별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요한 인물(혹은 조직)의 태도와 행동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병적인 합일화는 "상대를 이상화하고 그의 신념과 인격, 정서 등을 마치 자기 것인 양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는 현상"을 말한다. 합일화의 욕구는 자기 스스로를 긍정할 자신이 없는 사람일수록 강하게 마련이다. 강자들과 동일시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강화하려 하지만 실상은 내적으로 병든 이들이라 할 수 있다. 예수를 넘겨 받은 로마 군인들은 총독의 관정 안으로 들어가 온 군대를 모은다. 예수를 제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약자를 괴롭히는 가학적인 즐거움을 함께 맛보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유난히 악인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속해 있는 조직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나찌의 유대인 학살에 일정 부분 책임을 지고 있던 아이히만 재판을 참관한 후 '악의 평범성'에 대해 말했다.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선한 사람이라 해도 어느 순간 별다른 가책 없이 악한 일에 가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무사유'(thoughtlessness)이다.
군병들은 죄수들을 희롱하고 괴롭히는 일에 이미 익숙한 듯하다. 그들은 예수의 옷을 벗기고 홍포(로마 군인들이 어깨에 걸치는 망토)를 입혔다. 조롱하기 위한 장치이다. 일말의 가책도 망설임도 없이 능란하다.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오른손에 들리고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희롱의 말을 건넸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29). 피식민지 백성들에 대한 멸시의 감정이 담겨 있는 말이다. 왕으로 지칭된 이는 무력하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은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기도 했다. 멸시를 받고 조롱을 받는 이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 군인들은 예수에게 십자가를 메운 채 길을 떠난다. 죽음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십자가, 그리고 십자가 아래 풍경
아마도 기력이 쇠하신 예수가 자꾸 넘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채찍에 맞은 탓일 것이다. 하지만 마태는 예수가 채찍질 당하시던 그 참담한 광경을 과감히 생략하고 있다. 예수의 죽음 이야기를 감정 과잉의 신파조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이다. 마태는 수난 이야기를 매우 담백하게 서술한다. 일의 자초지종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길 뿐이다. 마태는 군인들이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짊어지게 했다고 말한다. 비상시에 로마 군인들은 시민들을 징발하여 짐을 나르도록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고 있었다. 그 아침에 시몬은 불운했다. 하지만 불운했던 그날의 사건으로 인해 그의 삶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침내 십자가의 행렬은 골고다, 곧 사람들이 해골의 곳이라 부르는 곳에서 이르렀다. 군인들은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에게 주어 마시게 하려 한다. 이것은 죽음의 고통 앞에 선 이에 대한 연민의 몸짓처럼 보이지만 조롱의 몸짓으로 보는 게 합당하다. 히브리의 한 시인은 자신의 적대자들이 한 행동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시69:21). 마침내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 심각한 상황을 마태는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마치 툭 던지듯 말하고 있다. 인류의 온갖 모순이 그 십자가 위에서 드러나고 있건만 세상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온하다. 일체의 감정이 배제되어 있기에 그 비통함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예수의 유일한 소유라고 할 수 있는 옷은 군병들이 제비를 뽑아 나누어 가졌다. 벌거벗기운 자의 수치와 고통이 지속되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쓴 죄패가 부착되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 말 속에 담긴 아이러니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강도 두 사람이 예수의 좌우 편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강도(lestai)는 문자 그대로 남의 재물을 폭력을 사용해 빼앗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자로서 폭력 혁명을 시도했던 이들일 가능성이 크다. '레스타이'는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유대 독립을 위해 싸운 전사들을 칭할 때 사용하던 단어이다. 지금까지 마태는 예수 처형의 책임이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있음을 변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그가 위험한 인물군에 속해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누가와 요한은 예수의 좌우편에 매달린 이들을 달리 표현하고 있다. 누가는 '행악자'로(23:33), 요한은 아주 단순하게 '다른 두 사람'으로(19:18).
마태가 자세하게 기록한 것은 십자가 아래에 있던 구경꾼들의 태도이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39)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4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희롱에 동참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42). 득의만면한 그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예수에게 욕을 퍼부었다. 예수가 가르친 비폭력 저항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상기시키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을 능력이 없는 이를 향한 사람들의 모욕과 희롱, 우리는 이 속에서 인간의 악마성을 본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 아래에서만 벌어지는 현실이 아니다. 지금도 무고하고 무력한 이들은 일상적 폭력과 조롱 속에서 살아가지 않던가.
죽음, 그리고 무덤
본문 / 마태27:45-66
온 땅에 어둠이 내리고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거니"(45). 제육시는 정오를 가리킨다. 니체는 정오를 그림자가 자기와 통합되는 깨달음의 시간, 독수리와 뱀이 친구처럼 하나되어 비상하는 시간, 순간과 영원이 통합되는 시간이라 말했다. 물론 이것은 은유이다. 정오의 사상가를 자처했던 알베르 카뮈는 햇살이 직각으로 내리쬐는 한낮의 투명함으로 현실을 냉정하게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골고다의 현실 앞에서 정오의 태양도 부끄러웠는지 몸을 숨겼다. 온 땅에 임한 어둠은 불길하다. 하지만 그 어둠의 태에서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법이다. 오후 세시, 예수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셨다. 물론 이것은 시편 22편의 일부이다. 예수는 버림받음의 고통을 그 시에 담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까? 예수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철회를 의미하나? 마태는 아무런 암시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시편 22편의 맥락에서 보자면 그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시작이다.
십자가 아래 섰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자, 다른 한 사람이 해면에 포도주를 적셔서 갈대에 꿰어 예수께 마시게 했다. 유대의 전설은 메시야가 세상에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자기들의 눈 앞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린 것일까? 그렇게 보면 포도주로 입술을 축여준 것은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고통을 연장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적은 없었다. 예수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는 영혼이 떠나가셨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51-53). 이것은 변고이다. 하늘도 슬펐음인가?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제의 체제의 무너짐을 상징한다. 지진과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고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 그러나 마태는 이 일이 예수의 부활 후에 일어났다고 서둘러 마무리함으로써 불필요한 오해를 제거한다.
백부장과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을 보고는 두려워하며 말한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54). 마가와 누가는 이런 고백의 주체가 '백부장'이었다고 말하지만 마태는 백부장은 물론 예수를 지키던 사람들의 집단적 고백으로 처리하고 있다. 마가와 누가는 십자가 사건이 백부장에게 일으킨 내적인 흔들림을 넌지시 보여주는 반면, 마태는 예수의 죽음과 더불어 나타난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강조하고 있다. 마태는 갈릴리에서 부터 예수를 섬기며 따르던 여인들과 십자가 아래에 있었다고 전한다. 남성 제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일을 중심으로 맺어졌던 관계와 존재를 중심으로 맺어졌던 관계를 유추하는 것은 너무 과한 해석일까?
무덤에 머물다
해가 저뭇할 무렵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했다. 마태는 그도 예수의 제자라고 소개한다. 헨리 나우웬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꿈을 공유하면서 자기 삶을 지속하고 있던 이들을 일러 '시름하는 동조자'라 했다. 유대인의 지도자인 니고데모, 베다니의 나사로,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인물이 거기에 해당될 것이다. 십자가는 정치적 반역죄를 저지른 이를 처형하기 위해 고안된 것임을 우리는 안다. 베드로는 예수의 제자라는 지적을 받았을 때 저주하고 맹세하며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은 몸을 도사리지 않고 자신이 그와 연루되었음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예수의 시체를 넘겨받은 요셉은 예수의 시체를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을 막음으로 장례를 엄수했다. 무덤 앞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앉아 있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역시 용의주도하다. 저들은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가 살아계실 때 했던 말을 상기시킨다.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63-64a). 경계를 소홀히 하면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하여 숨긴 후에 백성들에게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64b) 우려된다는 것이다. 빌라도는 경비병을 내어주며 그들로 하여금 '힘대로 굳게' 지키게 하라고 이른다. 그래서 그들은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켰다. '힘대로 굳게'라는 구절과 '돌을 인봉하고'라는 구절은 저들의 노력이 부활 사건 앞에서는 부질없을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한 일종의 배경이 되고 있다. 참된 생명은 죽지 않는다. 힘을 가진 자들이 몸은 죽일 수 있어도 영혼은 죽일 수 없다. 아무리 막으려 해도 밝아오는 새벽빛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생명을 가두고 돌로 인봉하고 힘써 지켜보아도 소용이 없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으리라
본문 / 마태28:1-20
전대미문의 현실 앞에서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하루 반이 지나갔다. 날짜로 사흘. 예수는 무덤 속에 계셨다. 세상에서 가장 어둡다고는 말했지만 제자들의 무겁고 쓰린 한숨과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의 숨죽인 울음을 제외하고는 세상은 그대로였다. 예수를 가둔 무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가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보여주는 기표처럼 그곳에 있었다. 마침내 안식 후 첫날 새벽이 되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다.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저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갔다. 그런데 그들은 또 다시 초자연적인 사건의 목격자가 되었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2-4). 마태는 묵시문학에서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사자의 임재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이미지들을 동원하고 있다. 천사가 내려와 돌을 굴려 냈다는 이야기는 돌을 인봉하고 경비병들을 시켜 힘써 지키게 했던 적대자들의 시도가 부질없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마태는 지키던 이들이 극심한 두려움 속에 있었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무서워하지 말라면서 천사가 여인들에게 전한 메시지이다. 첫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는 말씀하시던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둘째, 제자들에게 가서 그가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라고 전하라. 이 전대미문의 전언 앞에서 여인들은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느낀다. 무서움과 기쁨이다. 무서움은 공포가 아니다. 유한자가 무한자와 만날 때 느끼는 내적인 흔들림인 동시에 경외심이다. 기쁨은 그 사태를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가 살아계시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발생한 감정이다. 여인들은 그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달음질한다. 무덤을 향해 걸어오던 때의 그 무거움은 이미 사라졌다. 마치 물결 위를 걷듯, 무게를 잊은 듯 여인들이 달려간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 앞에 다가오시며 인사를 건네신다. "평안하냐?" 사실 이 단어 속에는 '기뻐하다'라는 뜻이 담겨있다. 일상적 인사이지만 부활의 새벽에 건네진 인사이기에 평안의 인사는 더욱 각별하다. 여인들은 주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드린다.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모습을 드러내신 예수가 "나를 붙들지 말라"(20:17)고 경계하셨다고 전하지만 마태는 예수와 주님의 접촉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이윽고 예수의 메시지가 전해진다.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10).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형제들'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형제들'이라 칭하신다. 제자들은 다 '주'요 '스승'인 당신을 버리고 달아났지만 주님은 한번도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 이 가없는 받아들임과 용서야말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둥지가 아닐까?
11절에서 마태는 다시금 경비병들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그들 중 몇 명이 성으로 들어가 대제장들에게 자초지종을 다 알린다. 예수의 부활은 그를 따르고 사랑했던 이들에게는 기쁨의 소식이지만 그를 죽음의 벼랑으로 내몰은 이들에게는 공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또 다시 모의를 한다. 그리고 군인들을 매수하여 제자들이 몰래 와서 예수의 시신을 도둑질하여 갔다고 증언하도록 유인한다. 거짓 증언을 모의하고 그것을 실행하도록 부추기는 대제사장의 모습은 그들이 애써 유지하려던 성전 체제가 이미 내적으로 붕괴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위임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에서 열한 제자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가와 누가는 현현 이야기를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인근에 배치한데 비해 마태는 갈릴리를 배경으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것도 방이나 거리가 아니라 산을 현현의 장소로 제시하고 있다.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태복음에서 산은 일쑤 주님의 가르침과 계시가 주어지는 장소로 나타난다. 그 산에서 제자들은 예수를 뵈옵고 경배했지만 여전히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부활은 인간의 경험적 인식의 경계 저편에 속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는 제자들에게 위대한 위임을 단행한다.
위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다'는 기독론적인 표현으로 시작된다. 세상 통치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은 예수는 그 권한을 제자들에게 재차 위임하신다. 그 위임의 내용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것이다. '민족'으로 번역된 '에트네'는 유대인들이 비유대인들을 가리킬 때 쓰던 말이다. 마태는 이방인을 선교의 대상으로 적시하고 있다. 선교의 목표는 제자를 삼아 주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 이 위임에서 제자 삼음과 세례 베풂은 틈 없이 연결된다. 위임에 확언이 따른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0b). 눈에 보이진 않아도 주님은 지금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신다. '함께 하시는 주님', 임마누엘, 우리 삶의 희망은 여기서 움터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