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 2003년 12월 호에 실린 글입니다.
"무쇠솥에 천천히 불을 지펴 푹 고아 낸 곰국 같다. 삭을 대로 삭고 바랠 대로 바랜 고고학의 뼈다귀 같은 것에서 이렇게 깊고 구수한 맛이 나는 곰국을 끓여 내다니!"
이 말을 십계명과 주기도문을 새롭게 조명한 김기석 목사의 책 『새로봄』을 두고 그의 친구이자 시인인 고진하 목사가 쓴 소감이다. 고진하 목사가 '고고학의 뼈다귀"같다고 표현한 것이 십계명과 주기도문이다. 이것이 김기석 목사의 명상을 거친 뒤 글로 펼쳐져 나왔을 때는 더 이상 뼈다귀가 아닌, 푹 고아서 깊고 구수한 맛을 내는 곰국이 되어 식탁에 떡하니 올라있었다는 게다.
누구나 처음 교회에 나오면 찬송가집 앞뒤에 큼지막하게 인쇄된 십계명과 주기도문을 왼다. 성서 어딘가에 이런 구절이 있겠지,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시험 시간의 커닝 페이퍼처럼 이렇게 따로, 잘 보이는 곳에다, 큼지막한 글씨로 써두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러나 제법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것은 마치 박물관의 오래된 유물처럼, 아크릴로 제작된 이름표에 반듯한 명조체로 '이것은 우리가 길이 남겨야 할 유산입니다."라는 안내문을 달고 여전히 찬송가집의 중요한 자리에 그대로 보존하는 것들이다. 뼈다귀처럼.
그러나 그렇게 박재된 유물 같은 것들이 어디 십계명이나 주기도문뿐일까? '오늘'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을 망각한 채 마치 수백 수천 년 전에 입고 쓰던 복장과 말투로 오늘 여기서 목숨이나 유지하고 있는 것들, 옷을 벗고 말씨를 바꾸지도 못한 그것들은 마침내 제 속까지 잃고는 이제 '껍데기'로 살아야하는 가여운 존재들이다. 거기 어디에서쯤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 교회조차
"학문적 유행을 추종하느라 허둥거리지 말고, 근본에 침착해라. 할 수 있으면 고전들을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읽고, 그 사상가들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는 무엇이며, 그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에 유의하되 무엇보다도 진리를 대하는 그들의 자세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리고 목회자로서의 자기 규정에 앞서 구도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잃어버리는 순간부터 '종교상인'으로서의 이력이 시작되는 것이다. 구도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가 온전한 진리를 찾기 위한 순례의 여로에 있음을 인식하고 인정한다는 말이다.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가진 사람처럼 살지 말아라."
십계명과 주기도문으로 곰국의 구수하고 깊은 맛을 우려낸 김기석 목사는 신학을 하는 후배들에게 빼놓지 않고 이런 가르침을 준다. 가르침인 동시에 스스로 배우고 다짐해 온 교훈이기도 하다. 목회자이기 전에 구도자임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 모든 문제에 대답을 가진 사람처럼 살지 않으려는 자세란 말처럼 쉽지 않은 듯 싶었다.
우리는 목회자라 하면 으레 떠오르는 형상이 있다. 여러 길이 있음에도 한 길만을 명확히 제시하고, 그 길만이 길임을 단언하며, 다른 길에 들어서는 것을 못 견뎌 하는 사람들, 진보가 아니면 보수이고, 미래가 아니면 과거이며, 이 편이 아니면 저 편이고, 정통이 아니면 이단이었던 그들. 그들은 매우 명쾌하였으므로 이쪽은 저쪽을 향해, 저쪽은 이쪽을 향해 언제나 우리와 남으로 상대하려는 습관밖에 보여주지 않았다. 그들은 자주 '탁월한 설교가'로 청중들 앞에 섰다. 청중들은 그들이 던지는 메시지에 만족하였다. 스스로 생각하거나 상상하기를 포기해 버린 채, 그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열심히 돌진만 하면 되었다. '순종'이라는 덕목으로 열심히 돌진하는 그들은 어느새 비판하는 기능을 잃어버렸다. 노예 같았다.
구도자로 목회하는 김기석 목사에게 견딜 수 없는 인간의 형상이란 이런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을 일으키는 힘이 없어 언제나 주저앉아서 주는 먹이로 배불리는 사람들이다. 차라리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도무지 바다조차 무섭지 않은 흰나비'가 부러운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낭만적 자아의 설렘일지라도, 그래서 어린 날개를 짠물에 적시고 맥이 풀려 돌아오고 말지라도, 하늘을 향해 날갯짓을 해댈 줄 아는 그 천진함이 오히려 더 소중하다고 그는 믿었다. 제 몸으로 날아서 부딪친 다음에야 비로소 깨달은 바다의 짠물이야말로 나비의 날개를 튼튼히 세워 결국에는 하늘을 날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신앙을 하는 것이나 목회를 하는 것이 모두 그 부지런하고도 순수한 날갯짓에 달렸다고 믿었다.
김기석 목사는 신학공부를 하던 1981년 전도사로 처음 청파교회에 몸담았다. 2년 뒤에는 군목생활을 하였으며, 제대를 한 뒤 이화여고에서 교목생활을 하였다. 전교조가 조직되던 시절이었다. 전교조와 비전교조 교사들 사이의 갈등 속에서 교육현장의 아픔을 겪은 뒤 그는 학교를 떠났다. 그때로선 어쩌면 천진한 나비의 날갯짓같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1990년 청파교회에 부목사로 컴백하였으며, 7년 여 부목사 생활을 거친 뒤 1997년 3월 청파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이제 담임목사로 목회한 지 7년이 지났다.
그 7년 사이 청파교회는 담임목사인 그를 많이 닮아 있다. 구도자처럼 정직하고 겸손하게 목회하였다. 무엇보다 '나는 모든 문제에 답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고백하였다. 인생은 그만큼 모호한 것이 많아서 언제나 고민의 여지를 담고 있으니 고민하는 '삶'을 함께 살자고 하였다. 이런 목회가 마치 무책임하거나 무관심하다는 인상을 줄지 모르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면 그것이야말로 무한책임이며 절대관심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들이 집을 나가서 어떤 방황의 시간을 보낼지 알면서 제몫을 주어 아들을 떠나보내던 누가복음 15장의 그 아버지 말이다.
김기석 목사는 매주 청년들과 함께 성서공부 시간을 갖는다. 할 말이 많은 청년들은 두 시간을 넘기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그런 많은 이야기들이 자주 방향을 잘못 잡고 흐르더라도 막아서지 않는다. 그 많은 시간동안 그가 말하는 시간은 10분을 겨우 넘을까 싶을 정도이고 나머지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정답을 강요하고, 나의 확신과 신앙체계 속에서 누군가를 포섭하거나 내 신앙을 이식하려는 교리적 언어라면 대화는 곧장 끊기고 말겠지만, 방황의 여지를 인정하는 이런 대화에선 물꼬가 막힘 없이 트인다. 물론 신학적으로 반성도 하고, 너무 빗나갔다 싶으면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청년들은 모르는 사이에 생각하는 힘이 근육처럼 불끈 돋는다.
이런 식의 성서공부는 어린이들과도 오랫동안 할 수 있었다. 방황의 여지를 열어두는 교육은 이처럼 힘이 세다. 어린이들로부터 얼마나 고상한 창조적 성서 해석을 들었는지 그로서는 감탄을 한 적도 많았다. 생각할 여지, 고민한 틈을 허락하지 않는 한국교회의 지리멸렬한 교육현장을 그는 매우 안타까워하였다.
너 시험들었구나. 사탄이 너를 시험하고 있어. 기도를 하지 않아서 그래... , 그런 수많은 언어들이 머리속을 맴돌았다. 교회에서 선배들은 자주 그런 말로 입을 닫게 만들었다. 선배들에게서 '기도'는 무소불위의 만병통치약이었다. 귀납법적인 성서공부를 하였지만 결론은 언제나 뻔했고 그 뻔한 결론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여지없이 바리게이트가 막아섰다. 어느새 성서공부는 지루한 시간이었고, 그 지루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선 우리는 그 뻔할 결론을 함께 복창할 수 밖에 없었다. 비틀거리다가 결국은 중심을 잡아내는 팽이만도 못해서 아예 우리는 처음부터 움직이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그럼에도 김기석 목사에게서 이것은 "끊임없이 나의 중심을 향해 돌진"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수많은 교회들이 온갖 성장 프로그램을 동원하여 '성공(?)을 향해 달려갈 때 오히려 "사는 모습이 아름다운 게 전도"라고 강조하는 방식이다. 넓은 아파트로 옮기고 배기량 큰 자동차를 소유함으로써 행복하다고 이야기할 때, 두 식구가 60평 아파트에 살다가 그 집을 팔고 30평으로 옮긴 뒤 남은 돈을 필요한 곳에 보내주는 것은 더 복 받은 일이라고 설교하는 것이다. 그의 돌진은 그럼에도 강력하여서 새로 열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면 여덟 사람이 남았다는 통계를 내었고, 결혼한 뒤 25년만에 새 장롱을 장만하고도 "목사님 죄송해요"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김기석 목사는 이상에서 맛보는 평화, 그 느긋함으로 말미암아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행복하였으면 좋겠다고 말하였다. 그런 행복으로 주위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하였다. 그는 여기에 '샬롬'이라는 단어를 가져왔다. 이런 평화의 비전은 어쩌면 십계명이나 주기도문처럼 대부분의 교회들이 망각해 버리거나 벌써 퇴화해 버린 꿈이지 모른다. 그는 이 '낡은'(?) 꿈을 오늘 여기에 다시 지피려는 모양이었다.
" 우리가 대학을 다닐 때 우리를 붙잡고 있었던 것은 거대담론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지탱해 나가던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어떤 거대담론도 우리를 세울 만큼 힘이 세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늪과 같은 일상에서 사람들은 수직의 표적을 잃어버린 채 질척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학 한다는 것은 곧 이 허허벌판에 수직의 표적을 세우는 일이어야 할 것입니다. 질척이는 일상에 하늘의 빛을 가져오고, 튼튼한 전망을 세워 나가는 일입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우리는 민감한 촉수를 키워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영적, 생태학적, 평화적 감수성을 세워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감수성으로 치열하게 문제와 부딪치는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비로소 표류하는 시대에 중심이 설 것입니다."
그는 독일교회의 사회화, 독일사회의 교회화를 주목한다. 일상의 힘을 세워야할 한국교회의 대안 역시 거기서 발견하는 듯 보였다.
김기석 목사는 1980년대 한국교회가 이끌었던 민주화와 통일문제는 이제 시민 단체들의 역할로 넘어갔다고 하였다. 청파교회는 그 시민단체에 후원금을 보내기 위해 전교인이 '1인 1구좌 갖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현재 300여명의 교인들 가운데 150여명이 매달 정기적인 후원자가 되었을 정도로 호응이 높다고 하였다.
어린이도서관은 3년째 운영해 왔다. 교인들에게 1년 동안 어린이에게 책을 읽히는 일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였고, 김기석 목사의 아내는 대학에서 도서관 운영을 공부하며 준비를 한 다음 비로소 조그마한 도서관을 열었다. 한 달에 책을 구입하는 데만 50만 원이 든다. 그래서 이제 5,00권에 이르는 책을 보유한 마음 도서관이 되었다. 150가정이 회원이며, 한 주간에 어린이들이 빌려 가는 책만 350권에 달한다.
"도서관이 있으므로써 아이들이 일주일에 350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른들로서 얼마나 보람있고 기쁜 일입니까?"
그가 발견하는 목회의 기쁨은 이런 것들이었다.
올해부터는 노인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죽음에 대하여 생각조차 싫어하는 노인들은 집에서 혼자 텔레비전만 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놀 수 있는 마당이 필요하였다. '아름다운 원로모임'은 그래서 생겼다.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갖는다. 동해에서 남해까지 돌아오는 먼 여행도 몇 차례 하였다.
청파교회 홈페이지에는 이런 글이 떠 있다.
" 김기석 목사님, 하고 부르고 나서 어떤 느낌인가 하면, 그건 물 속에 들어앉아 있는 느낌이다. 사람마다 그를 떠오르게 하는 코드가 있다. 김 목사님의 경우 그것은 바로 물 속에 들어가 앉은 느낌. 영혼을 편안하게 감싸는 세례의 느낌이다.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가끔 생각을 한다. 저분은 왜 시인이 아니고 문학평론가일까. 한 올 거추장스러운 검불 없이 하나님 앞에 서고자 애쓰는 참 시인인데... 목사님, 하고 부를 때마다 하나님 앞에 알몸으로 선 그를 느끼는, 청파교회 성도로서 나는 늘 행복하다. 물 속에 들어가 앉은 느낌, 그것을 느낌 때마다 영혼은 늘 가볍다. " (이명행 소설가) 글/ 기독교 사상 - 박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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