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詩는 풍경소리가 되어 2006년 05월 01일
작성자 장혜숙
(진부에 나들이를 갔다. 현관앞에 풍경이 매달려있어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 송권사가 내게 소리가 저렇게 아름다운데 시를 한 편 써야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지금, 지금 나는 참 메말라있다. 옛날에 썼던 글을 들춰보면 가끔은 촉촉하기도 했었는데......... 세월은 나를 무르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야곰야곰 갉아먹고 있다. 정신 차려야지!) <詩는 풍경소리가 되어> 척박한 땅이나 기름진 땅이나 흙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노오란 꽃다지로 뒤덮였는데 시 한 편이라도 지어야 하는 것 아닌가. 대지는 온통 초록으로 무르익는 단내가 진동하는데 시 한 수라도 읊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시를 짓는 것은 하고싶다고 쉽게 손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남들이 지은 시라도 읽을 마음으로 전자도서관의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나는 시에서 풍경(風磬) 소리를 듣는다. 가끔, 때로는 자주, 또는 줄곧 풍경 소리를 그리워한다. 왜 시에서 풍경 소리가 들려올까. 아마도 <詩>라는 상형문자 때문인 것 같다. 사리분별 할 줄 모르던 시절에 <詩>라는 글자를 접했고, 다른 궁리 없이 상형문자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모든 사물의 첫 인상은 살아가는 동안 불현듯 떠올라 권태로운 일상을 살짝 흔들어주거나, 흔들거리는 일상을 차분히 진정시켜주는 역할을 하는데, 시의 첫 인상이 그렇게 나를 지배한다. 그래서 시를 떠올릴 땐 늘 풍경 소리도 함께 듣곤 한다. 산 속 깊숙이 자리잡은 산사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풍경 소리. 풍경엔 물고기가 매달려 있다. 태생지인 물에서부터 멀리 떠나와 산사의 처마끝에 매달려있는 물고기가 숲을 떠도는 바람과 만나는 작은 소리가 시에서 들려온다. 시인은 물 속에서 유영하는 물고기의 은빛 번쩍이는 생명을 싱싱하게 그려내고, 숲속 허공에 매달린 생명 잃은 물고기의 슬픈 몸짓을 애잔하게 그려낸다. 뿐만 아니다. 시인은 절간 처마끝 허공에 매달린 죽은 물고기에게 숲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슬쩍 가르쳐주기도 한다. 바람에 거부하지 말라, 바람에 몸을 맡겨라, 네가 바람과 하나될 때 너는 소리로서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시인은 물고기에게 주술을 건다. 그리하여 물을 떠나온 물고기는 바람과 함께 산사에서 살아간다. 가끔, 때로는 자주, 또는 줄곧 내게 풍경 소리를 선사하며. 시는 말(言)의 사원(寺)이다. 사람들이 절에서 무언가 기원을 하듯 시에는 소망의 언어들이 모여있다. 간절히 기구하는 많은 말(言)들이 절(寺)안에 가득 쌓이면 그것이 바로 시(詩)가 되는 것이다. 시(詩)는 말(言)의 사원(寺-종교)이고 종교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니 시는 곧 우리의 삶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나는 시적인 삶을 살고 있다. 사람들은 “시적(詩的)”이란 말을 참 아름답게 생각한다. 시적인 사랑, 시적인 꿈, 시적인 장면, 시적인 삶, 그렇게 시적인 것은 모두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가 우리의 삶 그 자체라면 어찌 아름다움만 표현하겠는가? 나의 시적인 삶에는 잔인한 고통도 있고, 차가운 질시도 있고, 찌든 얼룩도 있다. 쎄라비(c'est la vie). 거듭거듭 행이 바뀌어 진행되는, 페이지를 넘겨도 끝이 보이지 않는 대서사시적인 삶이다. 시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시를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나는 자주 시를 읽는다. 소리 내어 읊는다. 그런데 시를 짓지는 못한다. 벽돌로 집을 짓자면 담쌓는 일에 거들기는 할 수 있겠으나, 말(言)로 사원(寺)을 짓는 일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나도 언젠가는 시를 쓰고 싶다. 멋진 말(言)의 사원(寺)을 짓고 싶다. 내 시(詩)는 풍경 소리가 되어 숲속 옹달샘으로 찾아가리라. 몸은 절간 처마 끝 자락에 매달려 있어도 소리는 얼굴까지 비추이는 명징한 옹달샘 맑은 물에 닿으리라. 살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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