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아내 (결혼 30년을 보내며) 2006년 05월 23일
작성자 윤석철
아내 (결혼 30년을 보내며) 부부가 30년을 함께 살면 서로 속속들이 다 알고 있을까? ‘눈빛만 봐도 다 안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나는 아내를 아직도 잘 모른다. 제법 큰 사건인데도 별 것 아니라는 듯 덤덤히 넘어간다. 그렇게 대범해 보이던 아내가 때로는 아주 사소한 일에 버럭 화를 내고 난리를 친다. 참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내 아내이다. 흔들림 없이 큰 일을 넘기고, 작은 일에 괜한 엄살을 부려 큰일을 잘 참아낸 스트레스를 푸는 모양이다. 그것이 위안이 될까? 안쓰럽다. 아내, 5형제의 둘째 며느리다. 예쁜 딸 낳고 아들 둘까지 낳았으니 고맙기 그지 없다. 그런데 그것이 좀 미묘하다. 형수와 계수 둘이 모두 딸만 둘씩 낳았기 때문이다(지금은 동생 둘이 아들을 하나씩 낳았다). 혼자만 아들 낳은 것이 민망해서 아내는 늘 조심했다. 큰 며느리 서운할까 봐 그 예쁜 손자들을 덥석 안아주지 못하시던 어머니처럼 딸만 낳은 다른 동서들 눈치 보느라고 아들 낳은 아내는 오히려 몸을 낮추고 살았다. 동생들 혼사 때나 집안에 다른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아내는 또 조심조심이었다. 지금은 대학 교수지만 그때는 어려운 고등학교 선생님이던 형님, 그 형님보다 사업가인 내가 좀 더 비용부담을 하기 때문이다. 아내는 큰 동서 눈치 보느라, 시아주버니 눈치 보느라 목소리를 죽이고 조심했다. 그 후 먼 곳으로 형님이 이사를 가셨기 때문에 명절과 큰 행사를 우리 집에서 도맡아 지냈다. 그 때마다 몸 고생과 더불어 조심조심 마음 고생까지 했다. 8남매가 어우러지며 살아가는 동안 대소사가 끊이지 않았다. 누구보다 큰 역할을 맡은 아내는 뜻밖의 어려움이나 불쾌한 일을 겪는 일도 많았다. 그 때마다 아내는 혼자 억울함을 참아야 했다. 왜냐면 아내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니까. 무얼 그리 조심조심 하냐고 하면 그저 그래야 한단다. 아내는 좀 억울하다. 아내가 억울한 것은 집안에서뿐만 아니다. 누릴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비록 작은 사업체이지만 내가 최고경영자로 있기 때문에 ‘사모님’으로 불리는 아내는 또 몸을 낮추고 행동을 조심한다. 선물이나 멋진 증정품을 탐하지 않는 아내가 고맙다.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차례가 안 오면 그만이다. 남으면 그때 갖는다는 것이 나와 아내의 생각이다. 물론 직원들은 사장님 몫, 사모님 몫을 먼저 챙기지만 아내는 일단 받은 것도 직원들에게 잘 나눠준다. 외국 손님들이 가져오는 선물 중 특별히 아내 몫으로 이름 붙여진 것만 아내가 받는다. 그렇더라도 그것을 곧잘 직원에게 나눠준다. 특히 아이들이 좋아하는 초콜렛이나 맛있는 과자면 아예 뜯어보지도 않고 직원에게 넘긴다. 어느 자리에선가 남의 손으로 넘어가는 선물을 바라보던 우리 아이들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회사에 들어온 선물도 집으로 가져오지 못하게 하는 사모님, 집이 멀어 굶고 출근하는 직원을 위하여 아침 먹을 거리를 따뜻이 싸주는 사모님, 이런 아내가 회사경영에 큰 자금을 보태주는 것 보다 더 큰 힘을 보태고 있다. 아내는 회사에 들렸을 때 내가 자리에 없어도 절대로 내 의자에 앉지 않는다. 의자는 단지 물건일 뿐인 것을…. ‘사장님 자리’에 함부로 앉지 않으므로 직원들에게 사모님 행세를 하지 않는다. 그런 일로 나를 욕되게 하지 않는다. 사장은 아내 자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남편 덕에 사모님 대접을 받으니 그 값을 해야 한단다. 그러나 내가 사장이 아니어도 아내는 어디서 푸대접 받을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지난 30년간 나는 이런 일들에 대해 별 생각 없이 지내왔다. 그러나 이제 함께 나이 들어 가면서 당연한 것으로 보이던 아내의 처신 하나하나를 고맙게 생각한다. 아내는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불편함을 안고 살아왔다. 칭찬인지 흉인지, 아내가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하는 일이 몇 가지 있다. 식품이 유통기한 되기 전에 치워 버린다. 먹던지, 누구에게 나눠 주던지.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식품의 유통기한 넘기냐는 것이다. 그 동안 적금도 여러 번 중도 해약했다. 계약 만기될 때까지 참고 기다리지를 못한다. 돈을 써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아내는 고민한다. 은행에 적금을 쌓아놓고 없는 척을 못한다. 끝까지 적금을 지키지 못하는 아내를 나는 바보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내의 생활 방식은 아주 단순하다. 전업주부면 집안 일에 프로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내가 세운 프로 전업주부의 기준이 때로 너무 높아 보인다. 여성으로서 남녀차별은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지만 남녀의 차이는 인정한다. 아내는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는 인간의 권리를 주장한다. 이 정도면 나는 아내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남편일까? 결혼 생활 30년. 겨울이면 부엌 아궁이 앞에 구두를 놓아두었다가 출근하는 내게 내어 밀던 젊은 아내, 내가 목욕하는 동안 속옷을 아랫목 이불 속에 넣어두던 아내. 작년 3월부터는 내가 신문에 글을 연재하는 것을 도와주느라고 자기가 하던 일을 중지했다. 참 많은 시간을 나에게 할애했다. 하고 싶은 일이 많고 많은 아내인데 가족에게 해야 할 일을 제쳐두고 자기 실속을 차리지는 못한다. 어제, 장미 100송이를 선물했다. 장모님과 아내에게서 미련하고 쓸데없는 짓 한다고 구박만 받은 나의 결혼 30주년 기념일이 지나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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