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산드로 보티첼리의 ‘모세의 시험과 부르심’ 2020년 03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산드로 보티첼리의 ‘모세의 시험과 부르심’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 하면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비너스의 탄생’을 떠올립니다. 조가비 위에 서 있는 10등신 미녀의 모습은 매우 고혹적으로 보입니다. 비너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즐겨 사용되던 베누스 푸디카(Venus Pudica), 즉 ‘정숙한 비너스‘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비너스는 풍성한 머리카락과 손으로 여체의 은밀한 부분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너스가 취하고 있는 콘트라포스토(contraposto) 자세, 즉 한쪽 다리에 체중을 싣고 다른 쪽 다리를 슬쩍 구부리고 있는 자세는 몸매를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옆에 서서 거품에서 태어나고 있는 비너스에게 숨을 불어넣고 있는 신은 서풍의 신인 제피로스입니다. 그를 부둥켜안고 있는 것은 미풍의 신 아우라입니다. 화면의 오른쪽에서 비너스에게 옷을 건네고 있는 이는 자연의 변화를 관장하는 신인 호라이입니다. 그가 입고 있는 꽃무늬 옷이 화려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보티첼리의 그림을 미학적 측면에서 보고 해석하지만 사실 중세기가 저물어 가던 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조금 충격적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아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림이었으니 말입니다. 이 그림은 보티첼리가 살던 때가 바로 르네상스 시대임을 가시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그림에 마치 흩뿌려진 것처럼 등장하고 있는 꽃들은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축하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의 또 다른 걸작인 ‘봄’(라 프리마베라)도 르네상스 시대의 낙관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체의 율동감과 우아함이 두드러집니다.

보티첼리의 본명은 알레산드로 디 마리아노 필리페피(Alessandro di Mariano Filipepi)입니다. 보티첼리는 ‘작은 술통’이란 뜻인데 그가 애주가는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금 세공인의 작업장에서 일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피렌체의 전성기를 열었던 그 시대의 거장인 프라 필리포 리피, 마사초,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에게 그림을 배웠습니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빼어난 재능을 보인 그를 중용했고 다양한 형식의 그림을 주문했습니다. 교황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메디치가는 그를 바티칸으로 보내 시스티나 예배당에 그림을 그리도록 했습니다. 보티첼리는 예수의 시험 이야기를 소재로 한 그림의 반대편 벽면에 모세의 생애를 다룬 벽화를 그렸습니다.

오늘 함께 살펴보려는 그림은 그 가운데 한 점인 ‘모세의 시험과 부르심’입니다. 1482년 경에 제작된 이 작품은 일단 크기가 압도적입니다(348.5cm*558cm). 이 작품은 모세의 생애 가운데 일곱 개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한 화면 속에 다양한 이야기를 담는 방식은 기베르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담아야 하니 그림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보티첼리는 세부 묘사에 탁월했는데 그것은 어린 시절에 도제로 지내면서 배웠던 금세공 기술을 회화에 접목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등장인물이 많기 때문에 보티첼리는 모세에게 오렌지빛 겉옷과 초록색 망토를 입혔습니다. 화면의 상단을 가르고 있는 무성한 나무가 수직적 중심축이 되어 사건을 분할하고, 인물들의 상하 배치를 통해 각각의 동기에 내포된 거룩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간의 순서에 따라 살펴볼까요? 화면의 우측 하단을 보십시오. 격정에 사로잡힌 모세가 등장합니다. 동족인 히브리인을 괴롭히는 애굽인 감독을 넘어뜨린 채 칼로 내려치려 하고 있습니다. 옆에는 겁에 질린 채 현장을 벗어나는 사람이 보입니다. 그 화면 바로 옆에 있는 등걸만 남은 나무는 모세의 삶의 단절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그 장면 바로 위로는 뒷모습을 보인 채 미디안 광야로 향하는 모세의 모습이 보입니다. 다소 구부정한 그의 모습이 쓸쓸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있는 가늘고 앙상한 가지는 그가 겪어야 할 고단한 미래를 암시하는 듯합니다.

하단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모세가 미디안의 제사장인 이드로의 딸들을 돕는 장면입니다. 양떼를 몰고 샘가로 온 그들을 목동들이 지싯거리며 괴롭히는 것을 보고 모세는 참지 못하고 개입합니다. 두 팔을 벌린 채 몽둥이를 휘둘러 목동들을 몰아내고 있습니다. 아래에는 깊은 우물에서 도르래를 이용하여 물을 길은 모세가 양들을 위해 물을 부어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격렬한 감정은 어느덧 가라앉았습니다. 약자에 대한 연민이 물씬 느껴지는 모습입니다. 그 앞에 서 있는 두 여인 가운데 얼굴을 보이는 인물이 십보라일 것입니다. 보티첼리는 그 여인들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데도 공을 들였습니다. 옷의 굴곡은 섬세하기 이를 데 없고, 여인들의 머리 모양과 장신구도 정교합니다. 십보라가 들고 있는 목자의 지팡이 끝은 세 갈래로 갈라져 있고, 허리께에는 싱싱해 보이는 과일이 매달려 있습니다.

우측 상단에는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는 장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는 명령에 따라 땅 바닥에 주저앉아 신을 벗고 있습니다. 신적 끌림에 사로잡힌 이의 담담함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신’을 벗으라 하셨을까요? 취약함을 드러내라는 것이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신은 고대 그리스 설화에서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나타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꿈 분석가들도 신발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은 모세의 자기 이해를 내려놓으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경험과 판단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신을 벗어야 합니다.

화면의 왼쪽 위로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자신을 드러내고 계신 하나님이 보입니다. 하얀 수염이 난 하나님의 모습은 매우 이채롭습니다. 마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그림에서 하나님의 모습이 ‘제우스’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것과 비슷합니다. 이게 어쩌면 시대정신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모세는 그 앞에 부복의 자세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펼쳐 든 그의 두 손은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하필이면 떨기나무 속에 임재하셨을까요? 떨기나무는 키 작은 관목입니다. 목재로 사용할 수도 없고, 뙤약볕 아래 걸어온 나그네에게 그늘 한 점 드리워주지도 못합니다. 보잘 것 없는 나무입니다. 어쩌면 떨기나무는 애굽이라는 제국 질서의 맨 밑바닥을 형성하고 있던 히브리인들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태양신의 나라임을 자랑하는 애굽, 태양신의 아들을 자처하는 바로에게 그들은 언제든 태워버릴 수 있는 하찮은 존재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런 이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을 태워 재로 변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빛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화면의 왼쪽 하단에는 마침내 압제의 땅을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하는 탈출 공동체의 행렬이 나타납니다. 모세는 맨 앞에서 백성들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이들은 기쁨과 설렘보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불안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입니다. 이 그림 속에 등장한 모세는 불의에 대해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인 동시에, 약자에 대한 연민을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 두 가지 자질이야말로 예속의 길을 떠나 자유로의 긴 여정을 이끌어야 하는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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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ita(20 10-22 08:10)
목사님으로 부터 배우는, 분야를 가리지 않는 여러 인문지식 및 예술 감상...감사와 감동의 말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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