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목회서신] 하늘 숨 들이마시고 2020년 06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하늘 숨 들이마시고

“그 때에는, 광야에 공평이 자리잡고 기름진 땅에 의가 머물 것이다. 의의 열매는 평화요, 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다.”(사32:16-17)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한 주간 동안도 잘 지내셨습니까? 계절이 참 빠르게 전환되고 있습니다. 낮에는 제법 초여름 더위가 느껴집니다. 교회 마당에 있는 포도나무는 제법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제법 크게 맺힌 매실은 조금씩 색이 변해가고 있습니다. 거둘 때가 다가오기 때문일 겁니다. 올해는 산수유나무에 열매가 많이 맺히지 않았습니다. 가을이면 붉은 열매를 보는 것이 기쁨이었는데 올해는 그른 것 같습니다. 감나무는 변화무쌍한 온도에 적응하지 못했는지 아직 꽃을 피우지 못했습니다. 날마다 살피지만 감감무소식입니다. 올해는 포기해야 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곧 대추나무에 꽃이 피겠지요? 투덜거리지 않고 제 몸의 건강이 허락하는 만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푸나무들의 성실함에 고개가 숙어집니다.

제 사무실에는 평화 노래꾼 홍순관 님이 보내준 글씨 한 점이 있습니다. “꽃은 꽃 숨을 쉬고 나무는 나무 숨을 쉰다 아침은 아침 숨을 쉬고 저녁은 저녁 숨을 쉰다.“ 그 글씨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내 숨을 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또 묻습니다. 숨 가쁘게 달리느라 잊어버린 것은 없는지, 남의 숨을 쉬려고 허덕이며 사는 것은 아닌지….

사실 이런 생각에 골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미국 미네아폴리스에서 경찰의 폭력에 죽어간 조지 플로이드가 한 말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제발, 숨을 쉴 수가 없어요.” “엄마, 숨을 쉴 수가 없어요”라고 말한 후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의식이 가물거리는 순간 40대의 장년인 그는 ‘엄마’를 떠올렸습니다. 그가 누구이든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없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입니다. 수많은 미국인이 조지 플로이드의 희생에 분노했고, 미국 주류 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백인 우월주의’를 청산해야 한다는 외침이 미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그의 죽음이 성숙한 사회의 밑돌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며칠 전 우리는 9살 어린아이가 여행 가방 속에 7시간 동안 갇혔다가 심정지에 이르렀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의붓어머니는 그 아이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훈육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어찌 이리 포악하고 무정한지 모르겠습니다. 그 여리디여린 생명에게 가한 그 폭력은 우리 사회의 생명 감수성이 메말라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징입니다. 생명과 평화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생명을 귀히 여기지 않는 곳에 평화는 없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다니카와 슌타로의 ‘지구가 너무도 사나운 날에는’이라는 시가 자꾸 떠오릅니다. 인정이 메마른 세상에 지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구가 너무도 사나운 날에는
나는 화성에게 말 걸고 싶어진다
이쪽은 흐려서
기압도 낮고
바람도 강해질 뿐
이봐!
그쪽은 어때
달이 보고 있다
완전히 냉정한 제3자로서
많은 별이 주시해서 아프다
아직도 어린 지구의 자식들이여
지구가 너무도 사나운 날에는
화성의 붉은색이 따뜻한 것이다”
(하략)


많은 별들이 주시하고 있는데, 지구에 살고 있는 호모 사피엔스는 사납기 이를 데 없습니다. 속도와 효율을 숭상하고 경쟁을 내면화하고 사는 한 우리의 사나움은 누그러지지 않을 겁니다. 이제 새로운 삶을 연습해야 합니다. 곁에 있는 이들을 향한 가파른 시선, 비평적 시선을 거두어야 합니다. 차이를 보듬어 안는 넉넉함이 필요합니다. 앨버트 슈바이쳐가 가르친 ‘생명 경외’ 사상은 ‘모든 생명은 살기를 원한다’는 단순한 명제 위에 서 있습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평화를 만듭니다. 제러미 리프킨은 인류의 역사를 공감의 확대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 말을 붙들고 싶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 앞에서 사람들이 숙연해지는 까닭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의 수난 이야기는 십자가를 등에 지고 처형될 언덕으로 가는 길고 험한 여정에서 겪는 나약한 개인을 가감 없이 보여 준다. 도중에 그는 박해자들에게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비틀거리고 넘어진다. 그가 걷는 고통의 길은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 공감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자신이 십자가를 진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만든다. 예수의 고통이 내 고통처럼 느껴진다. 십자가의 길은 공감 확대의 보편적 의식을 일깨운다. 그것은 나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과, 억압과 불의와 배척에 맞서는 모든 사람의 개인적 고통을 인정하는 것이다.”(제러미 리프킨, <공감의 시대>, 이경남 옮김, 민음사, 2010, 294쪽)

누구에게나 슬픔의 지층이 있습니다. 그것은 숨기고 싶은 상처일 수도 있고, 잊고 싶은 아픔일 수도 있지만, 그 슬픔의 지층이야말로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고 그리스도의 신비로 이끌어주는 통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픔과 아픔, 좌절과 고통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다른 이들의 슬픔과 아픔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이들에게 슬픔은 ‘복된 슬픔’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 느닷없이 닥쳐온 불행과 고통에 속절없이 무너지기보다는 그것을 공감의 연민의 재료로 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하지만, 서로가 기댈 언덕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깊은 산중에서 길을 잃었을 때 저 멀리 보이는 불빛 하나가 희망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서로에게 그런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기 누군가가 나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절망의 심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상황이 더 나빠지지만 않는다면 금명간에 현장 예배를 재개할 예정입니다. 방역 수칙을 잘 지키며 예배를 드리면 될 것입니다. 속회와 선교회 모임을 하고 있진 못하지만 서로 긴밀히 연락을 유지하시면 좋겠습니다. 기쁘게 여기신다면 저를 초대해주셔도 좋겠습니다. 영상예배가 일상이 되면서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 지방에 살고 계신 분들이 우리 교회 교인으로 등록하고 계십니다. 한편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이것 또한 변화된 환경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새롭게 우리 교인이 되신 분들에게도 따뜻한 환영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교회학교 교사들은 좋은 교육 환경을 만들기 위해 회의를 거듭하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주춤했지만 우리는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어느 곳에 있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입니다.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주위에 청량하면서도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으십시오. 하늘 숨 들이마시고 일상을 성화하며 사십시오. 여러분이 있어 참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2020년 6월 5일
김기석 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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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정(20 06-06 01:06)
목사님!
이렇게까지 될줄 몰랐는데, 연한 봄날이 가고 짙은 여름이 다 되도록 함께 모여 예배드릴수 없음에 슬퍼집니다. 오가는 수고없이 온라인 예배에 익숙해지는 것에 두려움도 느낍니다.
그러나 언제나 함께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루하루를 잘 살다가 학교에서 상을 받아 신이나서 엄마가 계신 집으로 달려가는아이처럼 기쁜 기대를 안고 예배당으로 나아가겠습니다
목사님 고맙습니다!
늘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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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옥(20 07-31 04:07)
공감, 복된 슬픔 이런 말씀이 우리 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속도와 효율, 경쟁 이런 것들이 인간의 사나움을 내면화합니다.
사람답게 살게 도와주어야 하는 교육 조차도 경쟁으로 몰아 인간을 사납게 합니다.
이제 새로운 삶을 연습해야 한다는 말씀, 가파른 시선, 비평적 시선을 거두고
차이를 보듬어 안는 넉넉함이 필요하다는 말씀에 적극 공감합니다.
늘 좋은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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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국(20 07-31 07:07)
목사님 창가에 핀 꽃이며 나무들은 목사님을 많이 닮은듯합니다. 수수하고 알차고 그러나 아름다운 모습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꽃밭입니다.
목사님 성서학당에서 들려주시는 말씀으로 제 마음이 많이 정화되었고 제 눈과 마음도 착해진듯합니다.
목사님 늘 건강하셔서 오래도록 귀한 말씀 증거해 주시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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