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함께 살기 위해 필요한 것 2023년 07월 02일
작성자 김기석
함께 살기 위해 필요한 것

일본이 다핵종제거설비인 알프스를 통과한 물을 30여 년에 걸쳐 태평양에 방류하겠다고 밝힌 시점이 다가온다. 국내에서는 때 아닌 논쟁이 활발하다. 어떤 이들은 그 물을 처리수라 부르며 인체에 무해하다고 말한다. 국정의 고위 책임자들과 원자력 연구자들 가운데는 그 물을 몇 리터라도 마실 수 있다고 장담한다. 그들은 그 물을 원전 오염수라고 부르는 이들이 괴담을 퍼뜨리고 있다고 매도한다.
 
환경운동가들과 의사들은 아직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현실이기에 신중해야 일부 다고 경고한다. 원전에서 나오는 방사선 동위원소 세슘-137은 반감기가 무려 37년이고, 세슘은 해양생물 속에 농축되어 그것을 섭취하는 사람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생식 기능이 떨어지고 기형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정부도 이런 위험성을 인지하고 우리 해역과 수산물에 대한 안전 관리 강화를 위해 총 177억 원 규모의 예비비를 추가 편성했다고 밝혔다. 어민들과 상인들은 해산물 소비가 줄어들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미묘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우리 삶에 스며들고 있다. 제 아무리 보짱이 굳은 사람이라 해도 불안감조차 물리치기는 쉽지 않다. 소금을 사 재는 이들도 생기고, 차량을 이용하여 소금을 훔치다가 붙잡힌 이도 있다. 아이들의 건강 문제에 누구보다 예민한 학부모들은 다량의 김을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기도 한다는 소문도 있다.

원전 오염수 못지않게 심각한 것이 있다. 거리에 나부끼는 플래카드에 적힌 내용들이다. 대상을 특정하지 않는 분열적 정보가 기관총처럼 우리 가슴을 저격한다. 정당들이 내건 것이든 시민단체가 내건 것이든 부정적인 표현 일색이다. 대립적이고 분열적인 제로섬 사고를 강요하는 정치적 구호를 보며 후련함을 느끼는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르겠지만 국민 대다수는 그런 언어를 폭력으로 경험한다. 그런 텍스트를 접하며 마음이 따뜻해지고 맑아지고 넓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른 이들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해 동원되는 수사가 우리 시대의 망탈리테를 만든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이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설득은 그럴듯한 말에서 나오지 않는다. 말을 통해 전해지는, 그리고 그 생각을 올곧게 만들어주는 품성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정치인들의 말을 사람들이 좀처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뚝별스런 그들의 언행 속에서 품성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한나 아렌트는 정치란 ‘함께-함의 형식을 탐구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함께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다. 상생의 정치는 그저 꿈에 불과한 것일까?

메소포타미아나 그리스 신화의 창세 신화는 폭력으로 물들어 있다. 세상은 신들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 만들어졌다. 세상의 질료는 패배한 신들의 피와 몸이다. 찢긴 몸과 땅에 흐른 피가 세상의 씨앗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세상에 만연한 갈등과 전쟁과 폭력의 이유를 설명해주는 데 유용하다. 투쟁은 삶의 불가피한 요소라고 인정하는 순간 세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되고 만다. 그런 세상에서 평화를 꿈꾸는 것은 몽상에 가깝다. 갈등 혹은 전쟁은 승자와 패자를 낳는다. 승자는 오만에 빠지기 쉽고 패자는 속으로 한을 품는다. 보이지 않는 적대감이 친밀한 소통을 막는다.

성경이 들려주는 창조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신은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했다. 창조 작업이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을 볼 때마다 신은 ‘보기에 좋다’며 기뻐했다. 폭력의 서사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기쁨이 들어선 것이다. 신은 사흘 동안은 뭇 생명들이 살아갈 공간을 만들고 그 후 사흘 동안은 그 공간을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온갖 식물과 동물로 채웠다. 일곱째 되는 날 신은 안식을 누렸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과학자들이 말하는 우주 발생론과 경쟁하지 않는다. 창조 이야기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속에 깃든 신비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아름답다. 그것을 함부로 파괴하거나 남용할 권한을 부여받은 존재는 없다. 인간은 신이 만든 세상에 잠시 왔다 가는 존재일 뿐이다.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자연을 닦달하는 삶은 결국은 공멸로 이어질 뿐이다. 자연도 함께 살아야 할 소중한 이웃이다. 그 이웃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야말로 인간됨의 조건이 아닐까?  

(* 2023/06/07/01자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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