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장벽이 무너질 때 2022년 11월 23일
작성자 김기석
장벽이 무너질 때

교회력의 마지막 주간을 보내고 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자아내는 느낌이 자못 쓸쓸하다. 뒤를 돌아보니 시간 위에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기만 하다. 기다림의 절기를 앞에 두고 지금은 잠시 숨을 고르고 지향을 바로 해야 할 때이다. 안일과 나태, 상실감과 회의는 선물처럼 다가오는 시간을 늙게 만든다. 변화를 거절하는 것이야말로 늙음의 징조이다. 코헬렛은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탄식했다. 그의 말은 유한한 것들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충고이지 역사 허무주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린다. 그런 현실의 구현이신 분을 기다린다. 진실한 기다림은 기다림의 대상이 오실 곳에 미리 가는 것이고, 그가 이루실 세상을 선취하는 것이다.

소비사회는 불만족과 불안을 창조함으로 번성한다. 불만족은 타자와의 비교 의식에서 발생한다. 남들과 구별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는 순간 안식은 허락되지 않는다. 잠시 숨을 돌리는 순간 경쟁자에게 추월당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경쟁을 내면화하고 사는 이들 사이에 갈등이 없을 수 없다. 평화로운 공존의 가능성이 줄어들면서 현실은 보이지 않는 전장으로 변한다.

1954년에 무자페르 쉐리프(Muzafer Sherif)는 집단 갈등과 이기심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기 위한 모의실험을 했다. 그는 11살짜리 백인 아이들 22명을 선발했다. 그 아이들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무자페르는 그 아이들을 무작위로 두 그룹으로 나눈 후 따로따로 오클라호마에 있는 여름 캠프에 데려갔다. 아이들은 다른 그룹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첫째 주에는 아이들 사이에 팀워크를 만드는데 진력했다. 그들은 팀 이름을 깃발과 셔츠에 새겨 넣은 후 함께 걷기도 하고 수영도 했다. 둘째 주에는 두 팀을 대면시키고 여러 가지 상황을 부여해 경쟁심을 유도했다. 이긴 팀에게는 트로피, 메달, 상금을 줬다. 긴장감이 조성되었고 아이들은 다른 팀을 야유하는 노래를 부르거나 노골적으로 약을 올리기도 했다. 급기야는 상대 캠프를 급습하여 맞수의 깃발을 내려 불태우기도 했다. 그들은 급기야 같은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도 거절했다. 셋째 주에는 분열된 그들을 통합하는 길을 모색했다. 화해를 위한 모임이 주선되고, 영화를 함께 보고, 불꽃놀이도 함께 하도록 했다. 실험자들은 이런 노력을 통해 긴장을 완화하고 화해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아이들은 이내 이전의 갈등 속에 빠져들었다.

무자페르는 새로운 실험에 착수했다. 캠프에 물을 공급하는 파이프를 막아버림으로 두 팀 모두를 위험에 빠뜨렸다. 문제가 발생하자 두 그룹은 문제 해결을 위해 협력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문제가 해결되자 아이들은 하이파이브를 하며 기뻐했다. 타고 다니는 버스가 진창에 빠지자 아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달려들어 차를 밀었다. 이 과정을 통해 두 팀은 서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버리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승리한 팀 아이들은 상으로 받은 돈으로 음료수를 구입해 다른 팀 아이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그룹 상호간의 적대감의 장벽을 허문 것은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력했던 경험이었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 네 편 내 편을 가르고,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따지다 보면 갈등의 골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를 위협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협력하다 보면 상대의 좋은 점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사회의 갈등 수준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한반도의 평화가 위태롭다. 기후 붕괴의 현실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토라는 원수의 짐승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보면 반드시 임자에게 돌려주어야 하고, 짐에 눌려 쓰러지면 일으켜 세우기 위해 협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곤경에 처한 짐승을 돌보기 위해 협력하는 순간 적의가 누그러지고 화해의 가능성이 열린다. 무너진 다리는 이어야 하고, 장벽은 허물어야 한다. 지금 오고 계신 그분은 우리를 그런 자리로 부르신다.

(* 2022/11/23 일자 국민일보 '김기석의 빛 속으로' 컬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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