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어디에나 있는 고향 2023년 01월 21일
작성자 김기석
어디에나 있는 고향

많은 사람이 일시적 귀향을 서두르는 시간에 엉뚱하게도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계 작가인 장 아메리가 떠오른다. 그는 평생 나치의 절멸수용소에서 겪은 고문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1978년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고문이 그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고문이 “타자에 의한 내 자아의 경계 침해”라며 고문에 시달린 기억이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을 고향처럼 느낄 수 없다고 말한다. 고향은 저기 어딘가에 있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구성되는 사회적 실체인지도 모르겠다. ‘달러가 있는 곳이 고향’이라는 말도 같은 사실을 가리킨다.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 고향을 기억 속에서만 떠올릴 수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세상은 낯선 곳이다. 1934년에 나온 노래 ‘타향살이’는 고향을 상실한 이들의 처연한 심정을 이렇게 노래한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어/부평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망연한 시선이 절로 느껴진다. 
몇 해 전 베들레헴에 갔을 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가르는 6미터 높이의 콘크리트 분리 장벽 앞에 한참 머물렀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장벽에 그린 벽화들을 하나하나 보는 동안 세계 최대의 감옥에 갇힌 그들의 처지가 떠올라 답답했다.

벽화를 따라 걷다가 후미진 곳에서 데이트를 하던 젊은이들을 만났다. 그들은 낯선 이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왔고 나 또한 그들에게 격려하는 말을 건넸다. 상황이 암담하기는 하지만 언젠가 이 장벽은 무너질 것이고,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한껏 살 수 있는 때가 올 터이니 희망을 품으라고. 담담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듣던 한 젊은이가 쓸쓸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당신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언제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지만, 우리는 어디에도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희망을 잃었습니다.” 담장이 높아갈수록 세상은 안전해지는 걸까? 담장을 만드는 이들은 담장 너머의 사람들을 비존재로 취급하거나, 자기들의 안락한 삶을 위협할 잠재적 위험으로 간주한다. 평화가 깃들 여지가 없다.

이런 이들은 팔레스타인 땅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 지금 우리 주위에도 많다. 난민, 이주 노동자, 장애자, 탈북민, 정서적 고립 상태 속에 살고 있는 이들 말이다. 반복되어 나타나는 대형 참사와 산업 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고 또한 남아 있는 이들에게서 고향을 박탈한다. 그들을 더욱 힘겹게 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무정함을 상기시키는 이들의 존재를 사람들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사실이다. 설 땅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오히려 더 가파른 벼랑 끝으로 내모는 몰인정이 횡행한다.

예수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산에다 남겨두고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가는 목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합리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 방식이다. 하나를 찾으려다가 아흔아홉까지 잃어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을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은 대개 자기가 아흔아홉에 속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쉽게 탓한다. 그 한 마리 때문에 우리가 모두 위험에 빠졌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배제의 전략이 작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길을 잃은 양 한 마리의 신세가 될 때가 있다. 그때는 목자가 자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필사적으로 바라지 않겠는가? 하나를 쉽게 포기하는 사회는 언제든 아흔아홉도 버릴 수 있는 사회이다. 지금 안전한 자리에 있다고 방심하면 안 된다. 

낯선 타자에게 적대적 시선을 보냄으로 정신적 고향을 박탈할 때 세상은 한결 위험한 곳으로 바뀐다. 조지 오웰이 소설 ‘1984’에서 그려 보이는 세상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곳이다. 가상의 나라인 오세아니아는 기존의 모든 언어를 대치할 신어(Newspeak)를 제정한다. 신어는 체제의 신봉자들에게 걸맞은 세계관과 정신 습관에 대한 표현 수단을 제공하는 동시에, 다른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신어를 만드는 이들은 바람직하지 못한 의미를 지닌 말은 삭제하고, 언어의 2차적 의미를 제거하려 한다. 선택할 수 있는 어휘가 적어지면 사고하려는 유혹도 사라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양함과 차이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일은 전체주의의 유혹에 항거하는 일인 동시에 누군가에게 고향을 선물하는 일이다. 선택에 따라 고향은 어디에나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 2023/01/21일자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원고입니다)
목록편집삭제

임원택(23 01-31 12:01)
안녕하셨어요? 김기석 목사님!
늘 좋은 말씀 전해주셔서 감사드리며, 당당뉴스 칼럼에 댓글로 질문을 드렸지만 답이 없으셔서, 결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교회 홈페이지를 찾아와서 질문을 드립니다.
다름이 아니라, 위 네 번째 단락에서 '난민, 이주 노동자, 장애자, 극민'이라고 쓰신 부분의 '극민'이 무슨 뜻인지요? 혹시 오타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극한에 몰린 분들을 일컫는 목사님만의 표현인지 등 다른 뜻이 있는지 여쭙니다.
그럼 주님의 은혜가 목사님과 청파교회 성도님들과 늘 함께하길 기원하면서, 감사 인사 드립니다.
삭제
시연(23 01-31 03:01)
감사합니다. 제대로 교정을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극민’은 ‘탈북민’을 염두에 둔 것인데 글 쓰는 과정 중에 이상하게 바뀌었군요. 수정하겠습니다.
삭제
임원택(23 01-31 07:01)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회가 되면 예배 시간에 찾아뵙겠습니다.^^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