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다시 희망의 노래를 부를 때 2023년 02월 16일
작성자 김기석
다시 희망의 노래를 부를 때

비극은 불시에 찾아와 평온한 일상을 뒤흔들어 놓는다. 굳건하리라 여겼던 터전이 흔들릴 때 무너지는 것은 건물만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론도 무너지고 사람들이 구별을 위해 세워놓은 장벽들도 무너진다. 재난이 닥쳐오면 과거와 미래는 사라지고 견뎌야 할 현재만이 도드라진다. 스스로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도 무너지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세웠던 계획도 모두 중단된다. 재난 앞에서 인간은 자기가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를 자각한다.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뒤흔든 진도 7.8의 지진으로 이미 3만 3천 명이 희생되었다. 여전히 무너진 건물의 잔해 속에 갇힌 사람들이 많으니 희생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잔해에 갇힌 채 숨진 열다섯 살 딸의 손을 차마 놓을 수 없어 그 손을 꼭 잡은 채 허공으로 텅 빈 시선을 던지던 아버지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이번 재난의 비극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2011년 동일본 지진이 발생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때 한 일본 작가는 그 사건은 수많은 사람이 죽은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 수만 명의 개별적인 존재가 죽은 수만 개의 사건이라 말했다. 

정말 그렇다.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숫자로 환원될 수 없다. 숫자로 환원되는 순간 개별적 존재로서의 삶의 서사가 사라진다. 숫자는 슬픔의 깊이를 드러내지 못한다. 재난의 책임을 져야 하는 이들은 희생된 이들의 이름이 호명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름들이 환기시키는 사건의 비극성을 숨기기 위해서이다. 각종 사고를 통해 죽어간 이들의 이름을 공적으로 호명하는 행위는 무정한 세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이다.

미국의 작가 레베카 솔닛은 ‘대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혁명적 공동체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사’라는 부제가 붙은 책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대재난이 지금과는 다른 사회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고 말한다. 재난이 초래한 혼돈은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하여 그들 속에 있는 부정적 가능성을 발현되게 만들기도 하지만, 거꾸로 가장 아름다운 가능성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레베카 솔닛은 재난 연구를 통해 ‘인간은 자신에게 많은 것이 요구될 때 최선의 상태가 되기도 한다’며 ‘자연이 한번 손을 대면 전 세계가 친구가 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고 말하는 홉스주의자들의 우울한 주장은 이런 현실 앞에서 주춤할 수밖에 없다. 대형 재난은 종교·국가·이념·빈부의 차이를 무화시킴으로 우리 속에 잠들어 있던 순수한 인류애를 자극한다.

통제하기 어려운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우리가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이다. 재난을 더욱 크게 만든 요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과 분석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폐허를 딛고 일어서야 할 사람들의 설 땅이 되어주어야 할 때이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과 심연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는 이들의 품이 되어주려는 이들은 그 존재 자체가 세상의 빛이다. 

우주탐사선 보이저2호가 카메라 방향을 돌려 우주 공간 속에 떠있는 지구를 찍고 그 사진을 보내왔을 때 사람들은 경이감에 사로잡혔다. 저 창백한 푸른 점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고향이라는 자각이 드는 순간, 나라와 나라,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던 차이는 사소한 것이 되고 말았다. 믿음의 사람들은 분쟁과 갈등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면 믿음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재난을 당한 이들은 우리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묻는 기호로 우리 앞에 서있다.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가 온갖 수모를 당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숙명론에 매몰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선언함으로 강고한 신분사회에 틈을 만들었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로서의 비애를 곱씹으며 애상의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세상의 허물과 모순, 온갖 더러움과 설움을 자기 몸으로 받아들여 정화한 고난 받는 종의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가장 힘겨운 시간에 오히려 인간 정신의 숭고함을 드러냈다. 지금이야말로 생명과 평화의 노래를 불러야 할 때이다.

(2023/02/15일자 국민일보 '김기석의 빛 속으로' 컬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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