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아낌만 한 것이 없다 2023년 02월 18일
작성자 김기석
아낌만 한 것이 없다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이 일어난 지 벌써 10여 일이 지났다. 사망자가 4만 1천 명을 넘겼다 한다. 언론은 이제 구조에서 복구로 이행하는 단계를 맞이하고 있다고 전한다. 하지만 한 생명도 쉽게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건물의 잔해에 갇힌 지 228시간 만에 구조된 사람도 있지 않은가? 실낱같은 가능성이라 해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여전히 구조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처리해야 할 문젯거리가 아니라 인간의 인간됨을 묻는 물음표로 우리 앞에 있다.

거대 언어모델 인공지능인 챗지피티(ChatGPT)가 등장하면서 인지혁명이 멀지 않았다고들 말한다. 아직은 초기 단계이지만 챗지피티는 적절한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제공해준다. 논문의 얼개도 짜고, 설교문도 작성하고, 시도 그럴싸하게 쓰고, 소설의 플롯도 만든다. 머뭇거림이나 주저함과는 거리가 멀다. 사유를 위한 성찰적 거리는 설 자리가 없다. 편리한 도구임이 분명하지만 그만큼 위험도 크다. 거짓 정보와 합성 데이터가 섞여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도구는 인간 삶을 뒤흔드는 미묘한 지점을 보듬지 못한다.

우리는 가끔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굳건하다고 믿었던 터전이 흔들릴 때 그 믿음 위에 세웠던 우리의 가치 세계도 흔들린다. 지성이나 교양으로 통제할 수 없는 일이 불시에 닥쳐올 때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취약함에 놀란다. 이럴 때 말은 무기력하기 이를 데 없다. 옳은 말, 좋은 말이 상처가 될 때도 있다. 가끔은 사태에 대한 해석의 욕구를 내려놓고 타자가 처한 고통의 깊이 속에 함께 머물러야 한다. 큰 슬픔이나 고통, 우울감은 말이 미치지 못하는 어둠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등을 토닥여주는 동작 하나가 천 마디 말보다 많은 것을 전달할 때가 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환대로서의 주체는 누군가를 아래에서 떠받쳐주는 사람을 가리킨다. 사람은 표정, 눈빛, 접촉을 통해서도 말을 한다. 그런 말들이 누군가에게는 설 땅이 된다. 인간의 인간됨은 누군가의 설 땅이 되려는 데서 발현된다.

알베르 카뮈는 ‘편도나무들’이라는 글에서 우리가 지닌 인간으로서의 책무는 사람들의 무한한 고통을 진정시켜 줄 몇 가지 공식들을 찾아내는 것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찢어진 것을 다시 꿰매야 하고 이토록 명백하게 부당한 세계 속에서 정의가 상상 가능한 것이 되도록 해야 하며 이 세기의 불행에 중독된 민중에게 행복이 의미 있는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어둠을 응시하는 이들의 눈빛은 어둠을 닮기 쉽다. 옳고 그름을 가려내기 위해 눈을 홉뜨다 보면 다른 이들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해야 할 정치인들은 오히려 갈등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것 같다. 우리는 타자를 선의의 경쟁 상대가 아닌 제거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디스토피아를 보고 있다. 타자를 부정하는 태도의 이면에는 자기 파괴의 열정이 있다.

노자는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데 아끼는 것처럼 좋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아낌은 그의 있음에 대한 존중인 동시에 그에게 뭔가를 배우려는 열린 태도이다. 효율성의 신화에 사로잡힌 세상은 물건도 사람도 아끼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한 해 동안 산업재해로 유명을 달리하는 이들이 800명이 넘는다 한다. 재해 사고는 10만 건이 넘게 일어난다. 이런 일이 반복되지만 좀처럼 제도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비용에 대한 계산이 생명의 문제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용납해서는 안 되는 것을 용납할 때 인간의 존엄은 무너진다. 목표를 이루는 데 방해가 되는 이들을 배제하고 제거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이것이 세계화 시대의 실상이다. 프리드먼은 세계화를 가리켜 ‘황금의 구속복’이라 했다. 누구도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구속복’을 입고 행복할 수는 없다. 이런 논리에 사로잡힌 이들은 버림받은 이들이 흘리는 눈물과 피가 삶의 자리를 척박하게 만든다는 사실은 고려하지 않는다. 생명을 아끼는 것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삶의 보루이다.

골고루 가난하던 시절, 어른들은 단 한 톨의 쌀도 하수구로 흘려보내지 않았다. 밥을 다 푼 후 가마솥을 부신 물조차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그것은 가축들 차지였다. 아낌은 인색함이나 궁상을 떠는 게 아니라 삶을 성화하는 일이다. 물건과 사람을 아끼는 것은 이 경박하고 폭력적인 세태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이다.

(2023/02/18일자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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