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47. 스올의 뱃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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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나2:1-10
설교일시 2001/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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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올의 뱃속에서
요나2:1-10
(2001/11/25)


다시 한번 살 수 있다면

계절이 바뀌기 때문인가요? 살아온 날을 자꾸 돌아보게 됩니다. 드물지만 귀하고 아름답게 기억되는 날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걷지 말아야 할 길을 걸은 것 같아 내 발등을 찍고 싶을 정도로 후회스러운 날들도 있습니다. 초겨울 저물녘 긴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그 그림자가 나의 몸과 이어져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실감하면서, 지금 내 삶이 어떠하든지 아무도 원망할 수 없고, 원망해서도 안된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결국 내가 선택한 생인걸요.

그래도 사람인지라 '다시 한번 살아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부질없는 생각이기는 하지만요. 어떤 분들은 사는 게 지긋지긋해서 빨리 끝내고 싶다는 분들도 계시기는 합니다. 평탄한 길을 걸어오신 분들보다 고통스런 인생길을 걸어오신 분일수록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의 특색 가운데 하나는 '불가역성'입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지요. 물론 SF영화를 보면 우리의 과거나 미래로 들어가 운명을 바꾸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만, 현실 속에서 그것은 아직은 불가능한 꿈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삶을 꿈꾸는 것은 무망한 노릇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존재로의 탄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거듭남'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나기 위해서는 '모태'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뱃속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니고데모가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했던 반응도 이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물과 성령이라고 하셨습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물은 두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씻음과 죽음이 그것입니다. 물은 씻어줍니다. 씻기 위해서는 먼저 벗어야 합니다. 하지만 부끄럽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어떻게 하나님께 보일 수 있단 말입니까. 나 스스로도 부끄러운 데 말입니다.


물이 때묻은 사람에게 말한다, "이리 오게."
때묻은 사람이 대답한다. "부끄러워서…"
물이 말한다. "나 없이 그 부끄러움을 어떻게 씻어낼 것인가?"


13세기 아프가니스탄의 시인인 루미의 말입니다. 그래요, 물이신 주님께 나아가지 않고는 우리가 정결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물 속에 들어간 사람은 옛 사람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이 자기를 떠받쳐주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는 생명이 하나님의 은총인 줄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사람은 또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은 흔히 불로 표상됩니다. 불은 더러운 것을 태웁니다. 그리고 불은 우리의 혼이 하늘을 향해 타오르도록 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 속에 있는 군더더기들을 태워 재로 만들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꿈만 남겨둡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이 땅에 살고 있으나 소속이 바뀐 사람입니다. 그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중심의 뒤바뀜이 곧 거듭남입니다.

그런데 거듭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거듭나는 것을 싫어하는지도 모릅니다. 거듭나면 세상 재미도 못 볼 것 아니에요? 농담이긴 합니다만 사람들은 새로운 자동차를 사려고 할 때는 기도를 하지 않는답니다. "차를 좀 바꿀까요?" 하면 "몇 년 더 타거라" 하실까 무서워 그런다지요? 일전에도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만, 생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사는 것이 정말 행복해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은 별로 없고, 대개는 몰려서 주님께 옵니다. 하다하다 안되니까 울먹이는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지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의지가지없는 신세가 되어서 결국 손을 들고 만 사람이 있습니다. 요나입니다.


우연과 필연

하나님은 요나를 부르시어 '니느웨'에 가서 임박한 심판에 대해 경고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명령이 요나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의 원수 아닙니까? 그들의 죄 때문에 망하게 되었다니 잘된 일이지요. 그런데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다가 그들이 회개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시는 분이시니, 그들이 회개만 하면 심판을 면하게 될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거역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는 니느웨의 정반대 방향에 있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갑니다. 될 수 있으면 소명의 현장으로부터 멀어지려는 것이지요. 하지만 도망쳐봐야 '하나님 손바닥'(?)이지요. 요나가 탄 배는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풍랑은 잠잠해지지 않습니다. 엉뚱한 열쇠를 가지고는 문을 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침내 요나는 풍랑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음을 이실직고하고는 바다에 던져지기를 자청합니다. 요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멋진 사나이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달아날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는 무고한 생명이 자기 때문에 고통받고 있음을 알았을 때 서슴없이 자기를 던졌습니다.

아시는 바와 마찬가지로 요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큰 물고기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고 계셨다고 말합니다. 요나가 어디쯤에서 바다에 던져질 것을 예측하고 물고기를 그 자리에 대기시킨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큰 물고기는 대양을 자유롭게 헤엄쳐 다니다가 마침 그 시간에 우연히 그곳에 이르렀을 겁니다. 그리고 또 우연히 요나라는 먹이를 삼켰겠지요. 그런데도 성경은 하나님이 그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다고 말합니다. 성서 기자가 지금 사기를 치고 있는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우연처럼 보이는 일도 하나님의 필연 속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연이라는 것은 우리의 유한성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태반은 모른 채 살아갑니다. 하지만 어떤 일도 뜻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뭔가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스올의 뱃속에서

이야기가 다른 길로 가고 있네요. 아무튼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딱 갇혔습니다. 어둡고, 냄새나는 그곳에서 요나는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을 겁니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궁리도 해보았겠지요. 하지만 대책이 없지요. 우리 민담에도 고래 뱃속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들은 가지고 다니던 칼로 고래의 뱃속을 자르면서 탈출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칼도 없었나 봐요.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그는 무엇을 했을까요? 자기를 돌아보는 일 말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요. 어두운 밤은 본래 자기 성찰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밤도 낮과 같이 훤하니까 사람들은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삽니다. 이게 우리 문화의 천박성의 뿌리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던 순간부터 하나님을 등지고 달아나려고 했던 최근의 행적까지가 주마등처럼 그의 마음에 스쳐지나갔을 겁니다. 절망에 몰려 그는 자기가 있는 곳을 '스올의 뱃속'이라 합니다. 스올이란 보이지 않는 세계(the unseen world)를 뜻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스올을 '지옥', '음부'라고 옮겨 놓았습니다. 그곳은 희망의 불빛이라곤 한 점도 비치지 않는 절망의 심연입니다. 그곳에서 마침내 요나는 두 손들고 주님께 나아갑니다. 절박한 처지에서 한사코 피하려 했던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어떻게 보면 뻔뻔하기도 하지만 어쩝니까? 물고기 뱃속에서 부르짖는 요나의 모습은 우매하고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행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으니 말입니다. 힘이 없어 강자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면 그처럼 비참한 일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외경심 때문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릎 꿇을 대상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요나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내 위에 넘칩니다."(3)
"내 영혼까지 물에 잠겼습니다."(5)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고, 땅은 빗장을 질러 나를 가두었습니다."(6)

이것이 그의 상황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시 살리셔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게 하실 것임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늘 기억하며 살 것이고, 주님 앞에 드린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겠다고 다짐합니다. 사람들은 위기에 몰리면 대개 願望思考(wishful thinking)를 갖는다지요? 사형장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사면을 전하는 특사가 달려오기를 기다린대요. 돈 때문에 고생하는 분들은 누군가가 사과상자(?)를 가져오는 꿈을 꾼답니다. 믿음도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믿음은 백일몽이 아닙니다. 원망사고도 아닙니다. 요나는 컴컴한 물고기 뱃속에서, 그 숨막힐 듯 후텁지근한 곳에서 구원자 하나님과 새롭게 만난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전능하신 하나님도 하지 못하시는 일이 하나 있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포기하는 순간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속에도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외면하심 속에도 사랑이 있습니다. 요나는 이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그는 그런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갖습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일으켜주신 확신입니다.


하나님의 뱃속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섰을 때, 하나님은 물고기를 시켜 그를 육지에 토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는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스올의 뱃속에 갇혔던 그가 새로운 세상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는 새로운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그에게 니느웨로 가서 당신의 명한 바를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처럼 소명으로 이어집니다. 구원받음은 그래서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역동적인 삶으로 나타납니다.

스올의 뱃속에 갇힌 듯 답답한 지경을 만난 이들이 있습니까?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맹렬히 타오르는 풀무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엘리야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탄식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지금 내 앞에 당도한 현실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부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의 어둠 속에서 울지만 말고 하나님께 마음을 여십시오. 스올의 뱃속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난 요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렇다면 스올의 배는 사실은 하나님의 배가 아닐까요? 스올의 뱃속은 나의 못난 옛 자아가 죽는 자리인 동시에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탄생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감사함으로 오늘을 살면, 잿빛 현실은 어느새 청신한 은총의 세계로 바뀔 것입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