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48. 늘 깨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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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24:32-44
설교일시 200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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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깨어 있으라
마24:32-44
(2001/12/2, 대강절 첫주)


고양이와 기다림

어느 때부터인지 새벽 거리가 고양이들의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집에서 교회에 이르는 불과 6, 7분 남짓한 시간 동안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많은 고양이들을 봅니다. 대개는 쓰레기 봉지를 뜯고 음식물 찌꺼기를 찾다가 인기척이 나면 슬그머니 자리를 뜨곤 합니다. 도시에 사는 고양이들은 이제 더 이상 쥐를 잡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음식을 구할 수 있는 편리한 방법을 알았기 때문일 겁니다. 고양이도 사람을 닮아가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고양이 하면 생각나는 기억이 있습니다. 흑석동에 살 때입니다. 초가을의 어느 날이었는데, 저는 어지간히 무료했던 모양입니다. 집밖으로 나와 어슥비슥 마을을 기웃거리는데, 어느 집 기와 지붕 위에 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습니다. 잔뜩 긴장해있는 게 뭔가를 노리고 있음에 틀림없었습니다. 저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한 시간이 지날 때까지 고양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조금 지루해져서 떠날까도 생각했지만,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서 더 기다려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1시간 반이 지나도록 고양이는 꼼짝도 앉고 한 곳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지루함도 없었고, 흐트러짐도 없었습니다. 고양이의 모습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 마음은 들끓고 있었습니다. 저는 결국 자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사태의 추이를 더 지켜볼 인내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본 후에 저는 '기다림'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았습니다.


사랑과 기다림

롤랑 바르트라는 사람은 "기다림은 하나의 주문(呪文)이다. 나는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중요한 전화를 기다리는 사람은 방에서 나갈 수도 없고, 화장실에 갈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할 수도 없습니다. 기다림은 그런 것입니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합니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의 不在는 항상 그리움을 낳습니다. 그래서 만남을 고대하며 기다립니다. 바르트의 말을 뒤집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분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분 없이도 삶이 불편하지 않던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분을 사랑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성도들은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턱대고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기다립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 말입니다. 성도들은 자기가 머물고 있는 곳을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심미적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머물다 떠나간 자리에서 은은한 사랑의 향기가 풍겨 나온다면 우리는 제대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이 아무리 힘겨워도 바로 그 자리야말로 주님을 만날 자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구상 선생님이 쓰신 '꽃자리'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자리가 꽃자리이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말세의 징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주의 날이 가까웠다고 하십니다.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가 나오기 시작하면 여름이 가까운 것을 알아차리듯이, 시대의 징조를 유심히 보면서 때를 분별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시대의 징조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거짓 구원자들이 와서 사람들을 미혹(迷惑)할 것입니다.
2) 나라와 나라 사이의 샬롬이 깨지고 기근과 자연재해가 늘어갈 것입니다.
3) 사랑이 식어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미혹하는 거짓 구원자들이 많습니다. 이단 종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곁길로 들어서도록 하는 것들은 다 미혹자들입니다. 광고들은 소비 속에 구원이 있다고, 출세가 구원이라고 우리를 부추깁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문명화된 세계의 야만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양과 문화라는 허울 속에 가려놓았던 인간의 야수성이 정의의 이름으로 날뛰고 있습니다. 무저갱에 갇혔던 묵시록의 짐승들이 날뛰는 것 같은 세상입니다. 하지만 정의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어떤 전쟁도 정의로울 수 없습니다. 사람의 정의는 보편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정의가 다른 이들에게는 부정의가 되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사랑에 대한 담론은 무성합니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담론'의 홍수는 '사랑'이라는 말이 본래 가지고 있던 값을 깎아 내립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쾌락에의 열망도 높아만 갑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을 고양시키고,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고, 죄의 힘을 박탈하는 진실한 사랑의 실천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운 시대입니다. 바울 사도도 로마서에서 말했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13:11).

그러나 그 날과 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을 제대로 살아야 합니다. 되는대로 살기는 쉬어도 제대로 살기는 어렵습니다. 문제는 탐닉(耽溺)입니다. 욕망에 코를 박고 있는 한 하늘의 은은한 향기를 맡을 수는 없습니다. 온 세상이 취해 비틀거립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진노의 잔인 줄도 모르고 손에 잔을 잡고 희희낙낙입니다. 예수님은 노아 시대의 예를 들어 우리를 경계하십니다. 홍수가 시작되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드는 일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자기가 이 땅에 온 이유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자기를 가리켜 '신의 몽당연필'이라 했습니다. 키도 작고 볼품도 없지만,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부름꾼들입니다. 그 일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로토스 열매를 먹은 사람들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에 참여했던 오뒷세이아가 고향인 이타카를 향해 돌아가는 귀향의 기록입니다. 오뒷세이아 일행은 온갖 어려움을 다 겪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그들을 지켜줍니다. 어느 날 그들은 낯선 섬에 상륙합니다.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몰랐기에 오뒷세이아는 그 섬의 형편을 알아보기 위해 부하들을 보냅니다. 돌아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부하들이 돌아오지 앉자 오뒷세이아가 직접 섬을 탐험합니다. 그 섬에는 로토파고이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뜻밖에도 오뒷세이아 일행을 맞아 자기들이 먹는 로토스라는 열매를 대접합니다. 그 열매는 꿀처럼 달았는데, 그 열매를 먹은 사람들은 귀향은 잊어버리고 그 땅에 머물고 싶어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로토스 열매를 먹은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이곳에서 천년만년 살 사람처럼 처신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나없이 갈 사람들입니다. 우리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말입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뒤섞여 있습니다. 참과 거짓이, 거룩함과 속됨이, 그리고 아름다움과 추함이 말입니다.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날이 오면 각자의 본 면목이 드러납니다.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것을 밝히 보여줄 것입니다. 그 날은 불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 (고전3:13)

그는 손에 키를 들었으니 자기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마3:12)


잠에서 깨어나라

오늘 본문은 아주 일상적인 삶의 풍경 속에서 이 진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평화롭게 밭을 갈던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데려가시고 다른 하나는 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손잡이 위와 아래를 나란히 붙잡고 맷돌을 돌리던 사람 중에 하나는 데려가시고 다른 하나는 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읽으면 10여 년 전에 이 땅을 휩쓸었던 휴거소동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 어처구니없는 소동을 생각하며 이 본문을 적당히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은 우리의 실상이 드러나는 날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도연명(陶淵明)의 시구가 생각납니다.


동원에 자란 푸른 소나무 靑松在東圓
뭇풀에 묻혀 안보였으나 衆草沒其姿
찬 서리에 다른 나무 시들자 凝霜殄異類
높은 가지 우뚝 솟아 보이더라 卓然見高枝


우리는 처음 믿을 때보다 구원이 가까운 때를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영혼의 깊은 잠에서 깨어야 합니다. 뭔가에 취한 듯, 홀린 듯 몽롱한 상태에서 주님을 맞을 수는 없습니다. 깨어나십시오. 로토스를 먹고 귀향을 잊지는 않았습니까? 주님이 오신다는 소식이 정말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되려면 오늘을 잘 살아야 합니다. 사랑을 미루지 마십시오. 화해를 미루지 마십시오. 섬김을 미루지 마십시오. 나눔을 미루지 마십시오. 기다리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분과 만나고 싶으십니까? 그 분의 낯을 뵈올 기쁨에 설레십니까? 이 아름다운 기다림의 계절에 주님과 만날 준비를 잘 하며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