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49.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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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렘36:27-32
설교일시 200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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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
렘36:27-32
(2001/12/9)


날줄이 가지런해야

大雪도 지나고 이제 바야흐로 겨울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문득 긴긴 겨울밤, 식구들이 아랫목에 붙어앉아, 이따금 화롯불을 다독이면서 이야기 꽃을 피웠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어머니가 들려주시는 민담을 들으며 신기해하던 기억, 짓궂은 형이나 누나가 들려주는 귀신 이야기에 오금이 저리던 생각이 납니다. 무서운 귀신 이야기에 질릴 때쯤 되면 저는 슬며시 일어나 건넌방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가마니틀이 한 대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곳에 앉아 가마니를 짜고 계셨던 것입니다. 볏집으로 가늘게 꼰 새끼줄로 날을 걸고, 바농대에다가 짚을 물려서 새끼 사이에 밀어넣고, 바디로 내리쳐 탄탄히 다지는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저는 그 놀라운 직조의 마술에 매료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는 그 일에 나도 동참시켜달라고 아버지께 졸라대곤 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바디로 내리치는 일은 나도 할 수 있으니 일을 시켜달라구요. 아버지는 짚이나 고르라고 하시다가도 막내의 떼를 받아주시곤 했습니다. 바디를 힘껏 내리쳐야 벼가 새지 않는다고 주의를 주곤 하셨지만, 제가 쳤던 곳은 언제나 허술했던 기억이 납니다.

또 비교적 한가하실 때면 자리틀에 고드렛돌을 매놓고 부들자리를 매시던 모습도 아련히 떠오릅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아버지가 유난히 공을 들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날을 매는 것이었습니다. 날줄이 흔들리면 자리는 술 한 잔 먹은 것처럼 흔들리게 됩니다. 저는 오늘 유년시절의 그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다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너는 인생의 날줄을 제대로 걸고 사니? 그게 제대로 서야 생이 반듯한 법인데.'


창조의 매체가 말씀이라는 사실

날줄이 가지런해야 인생의 천도 바로 짜이는 법입니다. 날줄을 가리켜 경(經)이라 하고, 씨줄을 가리켜 위(緯)라 합니다. 경과 위가 합쳐진 經緯라는 말은 일의 자초지종을 일컫는 말입니다. 잘 살려면 '경'이 바로 서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 삶의 기준이 되는 것을 기록해 놓은 책을 가리켜 우리는 '경전'이라 합니다. 유교는 四書三經을 가지고 있습니다. 논어·맹자·중용·대학이 사서이고, 시경·서경·주역이 삼경입니다. 기독교인은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책을 '거룩한 경전'이라는 의미의 성경이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까닭은 한마디로 사람다운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날마다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추어보듯, 날마다 가까이 두고 내 삶의 실상을 비춰보아야 할 영혼의 거울인 셈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 기독교인은 네모난 세모꼴이란 말처럼 형용 모순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주님과 만납니다. 말씀은 곧 그분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말씀 속에 그분의 영이 담겨있고, 말씀 속에 주님의 꿈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는 예전의 사람일 수 없습니다. 말씀은 뭔가 사건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의 매체가 말씀이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통찰력입니다. 왠지 아세요? 참말 속에는 알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말은 빈 말이 많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빈 말이 없습니다. 이사야는 시적인 은유로 이것을 표현했습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땅을 적셔서 싹이 돋아 열매를 맺게 하고,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사람에게 먹을거리를 주고 나서야,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나의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야, 내가 하라고 보낸 일을 성취하고 나서야,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사55:10-11)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에 들 때도 있고, 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를 책망하는 말씀은 듣기 싫습니다. 격려하고 위로하는 말씀은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 둘이 다 필요합니다. 특히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말씀이 내게 다가올 때 그 말씀에 마음을 열어야 우리 영혼이 자랍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을 영접하지 못한 못난 사람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

예레미야는 참담한 시대를 살았던 예언자입니다. 개혁적인 통치자였던 요시야 임금은 애굽의 북진을 막기 위해 전쟁터에 나갔다가 전사하고 맙니다. 그에게는 엘리야김과 여호아하스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둘 중의 누가 왕이 되느냐가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되었을 때 백성들은 애굽에 대해 굴욕적인 외교를 거절하는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하지만 애굽 왕 느고는 즉시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여호아하스를 사로잡아 애굽으로 데려가고, 엘리야김을 애굽왕으로 세웁니다. 꼭두각시 왕인 셈입니다. 그들은 엘리아김의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꾸는데,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세우셨다'입니다. 일종의 사기입니다.

여호야김은 25세에 왕이 되어 11년을 다스렸습니다만 유다는 국체를 잃어버린 허깨비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호야김은 느고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신하 국가를 자청했습니다. 조공을 바치자니 그는 점점 백성들에게 가혹한 폭군이 되어갔습니다. 폭군은 외롭게 마련이지요. 그는 점점 이기적으로 변해갔고, 외로움을 보상받으려는지 아주 사치스럽게 살았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이런 삶의 결국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예측해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그는 친 애굽정책을 괘씸하게 여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사로잡혀 쇠사슬에 묶인 채 바벨론으로 잡혀가 거기서 죽었습니다. 비극적인 최후였습니다. 그에게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왕궁의 시위대 뜰에 갇혀 있던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두루마리에 기록하여 그것을 백성들에게 알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제자인 바룩을 불러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적게 하고, 성전에 가서 백성들 앞에서 그 말씀을 읽으라고 지시합니다. 바룩은 지시대로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깨닫고 돌이키면 허물을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가 아직은 있었습니다. 백성들도 고관들도 그 말씀을 듣고 놀랐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 목전에까지 왔음을 그들은 느낀 것입니다. 아직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룩에게 명하여 예레미야와 함께 은신할 것을 권한 다음 왕에게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왕에게 그 두려운 예언을 다 들려 아룁니다. 이제 모든 것은 왕의 결정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야김은 갈 데까지 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상숭배의 죄에다가 '휴브리스'의 죄까지 짓고 맙니다. 왕은 여후디를 보내어 그 두루마리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여후디는 달려가 그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왕과 고관들 앞에서 예언을 낭독했습니다. 그때 왕은 겨울 별궁에 머물고 있었는데, 왕의 앞에는 난로가 있었습니다. 그는 여후디가 읽은 부분을 칼로 잘라 내어서 그것을 난로에 집어 넣곤 했습니다. 몇몇 신하들이 그러지 말라고 간청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두루마리를 다 태운 후에 예레미야와 바룩을 잡아 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이미 안전한 곳에 숨겨두셨습니다.

성경은 참으로 통렬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후에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명하셔서 여호야김이 태워버린 말씀은 물론이고, 그보다 더 많은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없앨 수 없습니다. 두루마리를 불에 태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태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이들이 있는 한 하나님의 말씀은 거듭거듭 침묵을 뚫고 솟아나오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나의 말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마24:35)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라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 듣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사람들에게 보내실 때 종종 말씀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부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너의 배를 불리며, 너의 속을 그것으로 가득히 채워라."(겔3:3)


하나님의 사람은 말씀으로 배를 채워야 합니다. 이 말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겠습니다. 말 따로, 삶 따로라면 누가 우리가 전하는 이야기를 듣겠습니까? 말과 행실이 일치되는 삶을 가리켜 우리 옛 사람들은 '誠'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맛은 어떠하던가요? 달던가요, 아니면 쓰던가요? 계시록의 저자인 요한은 아주 솔직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천사의 손에 있는 두루마리를 받아 먹습니다. 그 두루마리에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 말씀의 맛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내 입에는 꿀같이 달았으나, 먹고 나니, 뱃속은 쓰라렸습니다."(계10:10)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는 달콤한 약속과 확신의 말씀으로 다가오지만, 때로는 아주 무서운 경고와 심판의 예언으로도 다가옵니다. 우리가 낙심할 때 주님의 말씀은 우리 삶을 든든히 비끌어맬 기둥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우리가 교만에 빠져 진리의 길에서 벗어날 때 주님의 말씀은 준엄한 채찍질이 되어 우리를 칩니다. 아프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입으로 삼켜 내 몸이 되게 할 때 우리는 더 나은 존재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삶의 날줄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성경을 볼 수 없다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날줄이 흔들리면 우리가 짜는 삶의 천은 엉망이 됩니다. 날마다 성경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 말씀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일제 시대에 YMCA의 총무로 활동하셨던 현동완님의 글이 마음에 깊이 와닿습니다.


참 찾아 예는 길에
한참 두참 쉬지 말라
참참이 찾아가서 영원한 참 갈 것이니
참된 마음 참 참을 보면
가득참을 얻으리


내용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을 찾아가는 구도의 길에서 한눈을 팔거나 넋을 놓고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살다보면 그 길을 걷는 것이 힘겨울 때도 있지요. 하지만 휴식에의 유혹을 참아내면서 끝끝내 애쓰다보면 어느 새 우리 속에 참이 가득차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모두가 날마다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부르고, 말씀이 육신으로 화하는 기쁨 속에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