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50. 벽과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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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35:1-10
설교일시 200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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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과 문
사35:1-10
(2001/12/16)


사랑하는 이의 집 앞을 서성이면서 그 집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본 적이 있으십니까? 혹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 누군가의 마음을 열려고 무던히 애를 쓰다가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린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벽' 앞에 서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분입니다. 절벽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밑으로 곤두박질칠 것 같은 아찔한 현깃증을 느낍니다. 하지만 아무리 외쳐도 대답이 없는 벽 앞에 섰을 때는 절망감이 찾아옵니다. 세상에는 벽들이 참 많습니다. 세상도 때로는 벽이 되어 우리 앞을 가로막고, 가까운 사람들이 벽으로 바뀌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열려라, 참깨" 하는 주문으로 그 벽을 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벽 너머 세계

한 해를 마감해 가는 지금, 여러분은 어떤 벽 앞에 서 계십니까? 그리고 누구 앞에 벽이 되어 서있지는 않으십니까? 가난하고 외로운 하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옆방에 살고 있는 얼굴이 창백하고 아름다운 한 처녀를 짝사랑합니다. 가족도 친구도 돈도 없는 그는, 성탄절이 되자 전 존재가 애정을 갈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그는 홀로 자기 방에 있다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침대가 삐걱이는 소리, 이상한 신음소리…벽에 귀를 대고 그 소리를 듣고 있던 그는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배신감에 사로잡힙니다. 세상에 더할 수 없이 순결하게만 여겨졌던 처녀에 대한 환상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잠시 후 옆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젊은이는 마침내 살 희망을 잃고 목을 매고 맙니다. 경찰이 와서 그 젊은이의 시신을 수습해가는 동안, 하숙집 아주머니는 처녀의 방을 열다가 비명을 지르고 맙니다. 처녀는 침대에 엎딘 채 죽어있었습니다. 비소중독이었습니다. 처녀의 유서는 '고통스러운 고독'과 '삶에 대한 총체적인 혐오감'이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했음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외로운 두 혼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쓸쓸해하다가 죽고 만 것입니다(로맹 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중에서 [벽]). 세상은 이처럼 사랑을 갈망하는 외로운 혼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벽이었습니다. 이것은 소설 속의 이야기입니다만 우리에게 강한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인정이 메말라 팍팍한 세상입니다. 저마다 바쁘다고 아우성이니 이웃들의 처지를 살뜰하게 보살펴주는 사람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메마른 대지에 단비가 되어 내리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그늘진 곳에서 인정의 꽃을 말없이 피워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1-2)


이 대목은 미래에 어떠어떠한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한 서술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서술법은 항상 명령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그런 아름다운 세상이 저절로 올 테니 중뿔나게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세상을 열기 위해 지금 결단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게 하라"(Let the wilderness and the dry-lands exult). 광야같은 세상에서 성도들은 꽃을 피워내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인류는 전쟁의 참화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국가'라는 책에서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란 강자의 편익"이라고 했습니다만, 이것은 타락한 인류의 모습일 뿐입니다. 전쟁에 패한 자들이 항복할 권리마저 부정하는 미국의 오만을 보면서 우리는 가인의 후예들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그렇다고 낙심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투덜거리라고 부름받은 것이 아니고, 세상에 기쁨의 꽃을 피워내라고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이 제 아무리 척박해도 우리 속에 있는 꿈이 죽지 않는 한 우리는 낙심할 수 없습니다. 겨울에 내리는 차가운 눈이 오히려 씨앗을 이불처럼 덮어줘서 이듬해 봄에 싹이 움트게 해주는 것처럼, 우리가 날마다 마주치는 죄악된 현실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꽃 피우는 삶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겠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고,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나는 세상을 꿈꾸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혹은 나약한 자들의 미망이 아닙니다. 세상에 꿈보다 힘이 센 것은 없습니다. 서양 속담에 '해야 할 일이 있는 한 사람은 어떻게든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수 조영남씨가 영화촬영감독인 정일성씨와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말을 들었습니다. 정일성 감독은 한 때 직장암으로 다 죽게 되었답니다. 인생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는데, 어느 날 임권택 감독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기가 구상하고 있는 새 영화 이야기를 한참 하더니, 그 영화를 당신이 꼭 찍어야 한다고 하더랍니다.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구요. 정감독은 그 말 때문에 일어설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조영남씨가 무릎을 탁 치면서 하는 말이 이래요. "하, 세상에 그보다 더 좋은 치료제는 없네요!" 그래요. 희망보다 더 좋은 치료제는 없어요.

하나님이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고 계시고, 나도 그 일에 동참하도록 요구받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함부로 낙심할 수 없어요.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에요. 해야 할 일이 분명해요. 이사야는 우리가 하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니까 쉽게 이야기 하네요.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주며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3-4)


'약한 이를 무시하고, 무릎이 후둘거려 비틀거리는 이의 딴죽을 걸어 넘어뜨리려는 게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너희는 그래선 안된다. 오히려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부축해주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쩔쩔매고 있는 이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어라. 하나님 여호와가 다 보고 계신다는 것, 하나님이 공평하게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라.' 이럴 때 세상은 살만한 세상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술에 걸려 깊은 잠에 빠져든 공주, 개구리로 변한 왕자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 마술이 풀리는 것은 언제지요? 왕자가 공주에게 입맞춤할 때, 공주가 흉한 개구리를 친구로 받아들일 때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볼품없어 보이는 사람들, 못나 보이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할 때 세상은 아름다운 본디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회복된 세상의 꿈

이사야는 그런 세상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5-6)

세상은 지금 마녀의 마술에 걸린 것처럼 흉하게 변했습니다. 몸에 장애를 가진 분들도 더러 있습니다만, 어쩌면 우리는 너나없이 영혼의 장애를 지니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고,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사니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할 때 우리는 내 속에 숨겨져 있던 아름다움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사람에 대해서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애완견에게 온통 정성을 기울이는 분을 만났습니다. 지나친 것 같아서 여쭈어보았어요. "왜 강아지를 키우세요?" 그분은 1초도 생각하지 않고 대답하더군요. "최소한 개는 주인을 배신하는 일은 없으니까요." "얼마나 쓰린 경험을 많이 하셨으면…", 하고 혀를 찼더니 웃으시데요. 그러더니 "세상을 이렇게까지 만든 게 다 사람 아닙니까?" 하면서 열을 올리셨어요. 딴은 맞는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죄송하게도 내 속에서 이상한 의혹이 떠올랐어요. '아니, 내가 지금 어떤 동물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나?' 그분은 자기도 그 경멸스러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주 잠깐 잊으신 것 같았어요.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 사람이라는 말은 맞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가야 하는 것도 사람입니다.


그래도 사람이 희망이다

너무 쉽게 사람에 대해서 절망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을 들어서 세상의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보고 시험보라고 하면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 별로 없을 걸요.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졌을 때,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끌고 읍장 앞에 가서 소리쳤습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행17:6). 영어 성경을 보니까 이 대목을 이렇게 번역했어요. "The people who have been turning the whole world upside down have come here now." 한 마디로 세상을 전복시키는 사람들이라는 거지요. 놀랍지 않습니까?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지만 예수의 혼에 사로잡히자, 세상을 뒤집어엎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놀라운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기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파렴치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인색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때를 만나지 못했고, 그들을 선한 길로 이끌어줄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뿐입니다. 비노바 바베라는 분은 세상에는 문 없는 벽은 없다고 했어요. 벽처럼 마음을 굳게 닫고 사는 사람이라 해서 함부로 외면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마음을 열 문을 찾아야 합니다. 어쩌면 그는 누가 와서 내 마음을 좀 열어달라고 속으로 외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문을 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내와 사랑과 존중과 이해가 아닐까요?


담을 낮추라

한꺼번에 우리가 답답한 세상의 문을,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제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한 담의 높이를 낮출 수는 있겠지요. 한 칸 두 칸, 우리 사이에 쌓아올린 분리의 벽돌을 덜어낼 때 우리는 이웃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말을 건넬 수도 있을 겁니다. 먼저 눈길을 주고받으면서 눈길이 생기고, 말을 주고 받으며 말길이 열리고, 마음을 통해 마음 길이 생기고, 내왕하면서 상호소통의 길이 열리면, 그 길은 '거룩한 길'이 됩니다. 사랑과 이해로 만든 그 길은 곧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그 길은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걷는 길입니다.

주님이 가까이 오고 계십니다. 은모래를 깔아 귀한 손님을 맞이했던 옛사람들처럼 오실 주님을 위해 우리가 깔아야 할 은모래는 마음의 벽들을 낮추고, 벽 속에서 문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 겨울에 여러분이 머무는 곳마다 아름다운 사랑의 꽃이 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