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52.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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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신1:29-33
설교일시 2001/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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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신1:29-33
(2001/12/30)


훌륭한 울음터

조선조의 대문장가인 연암 박지원이 중국의 열하지방을 다녀온 소감을 기록한 글 가운데 "好哭場論"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울기 좋은 장소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 되겠지요? 연암의 일행은 새벽 먼동이 트기 전에 길을 떠나 아침부터 강을 건너 냉정이라는 곳에 이르러서 늦은 아침 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십여 리를 더 가서 산기슭을 돌아 나오는데, 중국길에 익숙한 하인 하나가 갑자기 종종걸음을 치더니 말 앞으로 가서 머리를 조아리며 외쳤습니다. "백탑 현신이오!" 했습니다. 이제 곧 백개의 탑이 곧 그 장대한 모습을 드러내 보이리란 뜻이겠지요. 그러나 정작 백탑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십 보를 지나자 그만 눈앞에 아찔해졌습니다. 망망한 視界, 눈 끝간데를 모르게 펼쳐진 아득한 벌판, 그리고 지평선, 백 리의 넓은 벌도 보기 힘든 조선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광경입니다. 그는 그냥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연암은 이렇게 외칩니다.

"아! 참으로 훌륭한 울음터로다."

참으로 뚱딴지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즉시 연암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선다면 비슷한 느낌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방에 한 점 산도 없고, 보이느니 지평선뿐이고, 아득한 옛날의 비는 지금도 내리고, 그 구름이 창창히 떠가고 있는 그 광막한 벌판을 지나며 그는 자기 존재의 작음과, 안목의 협소함과, 살아온 날들의 부끄러움이 한꺼번에 떠오르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울음이 터질 수밖에요.


가장 무자비한 우상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괜히 한번 목놓아 울고 싶습니다. 살아온 날을 돌아보면 발자국이 어지럽기 그지없습니다. 참 열심히 산다고는 살았는데, 뭔가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이 우리 마음을 억누릅니다. 참 바빴습니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의 한 장면을 우리도 반복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쉴새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무의식적인 동작으로 너트를 죄고, 돌아가는 톱니바퀴에 낀 채 도시락을 먹는 찰리 채플린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의 슬픈 자화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세계는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함 속에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무너지고, 경제대국 일본이 몰락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이기에 사람들은 벌 수 있을 때 많이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채 살아갑니다. "햇빛 날 때 건초를 많이 만들어 두라"는 서양 속담은 지금 현대인들의 금과옥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이기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뭔가를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감을 느낍니다. 어느 분은 이런 일 중독 증세를 가리켜 '가장 무자비한 우상'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옛 사람은 "발꿈치를 올리고 서있는 자는 오래 서 있을 수 없고, 가랭이를 벌리고 걷는 자는 오래 걸을 수 없다"(企者不立, 跨者不行, {道德經}, 24章) 하였습니다.

한 해살이를 더듬어 돌아보아야 하는 이 때 우리는 신명기의 말씀 앞에 서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백성들을 격려하며 모세가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 이기기 가장 어려운 적은 자기 자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옛 사람도 '남과 싸워 이기는 사람을 가리켜 힘세다 할 수 있지만 자기를 이기는 자야말로 진정으로 강하다'(勝人者有力, 自勝者强, {道德經} 33章) 했습니다. 자기와의 싸워 이기는 것이 왜 어려울까요? 사람에게는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무형의 적이 있습니다. 가보지 않은 길, 해보지 않은 일,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은 항상 우리 속에 가공의 두려움을 낳습니다. 그 두려움은 항상 과장되게 마련입니다. 현실은 맞닥뜨리면 견딜만 한데, 우리는 지레 겁을 먹곤 합니다.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러했습니다. 비옥한 가나안을 앞에 두고도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모세는 그들의 용기를 북돋워주기 위해 지난 날을 상기시킵니다. 출애굽의 여정을 돌이켜 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머뭇거리고, 투덜거리고, 비틀댄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바로의 나라, 종살이의 나라에서 이끌어내시고, 광야를 지나셨습니다. 애굽에서 준비해 온 음식이 떨어졌을 때 만나를 주셨고, 素症(푸성귀 종류만 먹어서 고기가 먹고 싶은 증세)에 시달릴 때는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마실 물이 없을 때는 반석에서 샘물이 솟아나오게 하셨고, 광야의 베두인족과 전투가 벌어지면 대신 싸워주셨습니다. 모세는 이 모든 일을 아이를 품에 안고 온갖 위험을 돌파하는 아버지에 빗대 설명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진 칠 곳을 찾아 주시려고 백성들의 앞에 나아가 모든 일을 준비하셨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척후병이 된 셈입니다. 또 행여 백성들이 잘못된 길로 갈새라,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이끄셨음을 상기시킵니다.

미당 서정주 선생은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다"([自畵像]에서) 하고 노래했습니다. 방황하고 모색하면서 성장했다는 말이겠지요. 하지만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고전15:10). 그렇습니다.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세상적인 우리가 그래도 이만큼 사는 것은 하나님이 순간순간 우리를 매만지시고, 우리의 앞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히브리의 지혜자도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잠16:9)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하나님은 두 경우에 웃으신답니다. 하나는 의사가 "염려 마십시오. 이 아이는 제게 맡기십시오" 하고 말할 때인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아이를 데려가려고 하는데, 이 사람은 자기가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다른 하나는 두 형제가 경계선을 그어 땅을 가르면서 "이쪽은 내 땅이고 저쪽은 네 땅이다." 하고 말할 때인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온 우주가 내 것인데 이 사람들은 그 조각을 가지고 자기 거라고 주장하는구나!"

물론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땅에 씨앗을 심고, 물을 줄 수는 있지만, 그 씨앗이 자라도록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건강을 위해 운동을 열심히 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도 건강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도 예기치 않은 사태 때문에 일이 틀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노력한 것에 비해서 더 많은 것을 거둘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여쭈어보아야 합니다. 화가는 때로 붓질을 멈추고 물러서서 자기가 그리는 작품을 바라봅니다. 부분에 집착하다 보면 전체적인 균형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부들은 가계부를 쓰면서 살림살이의 규모를 점검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간혹 멈추어 서서 자기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카산드라 크로스의 시간

세월이 갈수록 우리는 희망의 조짐보다는 절망의 조짐을 더 많이 보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전쟁과 분쟁이 끊이질 않습니다. '힘의 논리'가 '사랑의 논리'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심은 점점 각박해져가고, 귀감이 되어야 할 지도자들은 진흙탕 속에서 뒹굴고 있습니다. 악령에 사로잡혀 비탈길을 내리달리는 돼지떼처럼 우리는 위험을 향해 질주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희망을 노래하고 사랑을 말하는 것은 위선처럼 보입니다. 인간 세상에 희망이 있나요? 이 나라에 무슨 희망이라도 있나요? 이런 질문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우리에게 모세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심을 잊지 말라구요. 믿음의 반댓말은 불신앙이 아니라, 절망과 낙심입니다. 믿음이란 자기가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힘껏 잡고 놓지 않는 것(擇善固執)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망각할 때 우리는 두려움이라는 허깨비를 기르게 됩니다.

[카산드라 크로싱]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희귀한 균에 감염된 사람이 탄 기차가 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기차는 순식간에 환자수용소로 변합니다. 기차 안에는 의사도 한 사람 있었지만 속수무책입니다. 기차를 세울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기차는 카산드라 크로스라는 다리를 향해 질주하고 있습니다. 그 다리는 붕괴의 위험 때문에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다리입니다. 그 열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셈입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헬리콥터 한 대가 기차 위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헬리콥터로부터 구명줄이 내려오고, 실험을 위해 개 한 마리를 구출해냅니다. 그런데 기차 밖으로 나가자 다 죽어가던 개가 의식을 회복합니다. 과학자들은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산소가 개를 살린 것 같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정체를 알 수 없는 병원균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신선한 산소인 것 같다는 것입니다. 비좁고 혼탁한 기차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부터 공급되는 무균의 산소였습니다. 영문모를 두려움에 시달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영혼의 평화를 맛보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신선한 공기입니다.


평화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야말로 우리를 살릴 산소입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내년을 '전쟁의 해'(war year)가 될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저는 신문을 통해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첫 사람들을 유혹했던 뱀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네가 신처럼 될 것이다"(You shall be as God). 우린 이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품에 안고 계십니다. 자기 아들을 안음 같이 이스라엘을 해방의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절망의 땅에서 희망의 노래를 부릅니다. 미움과 갈등의 땅에서 평화의 노래를 부릅니다. 슬픔의 땅에서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분쟁의 땅에서 화해의 노래를 부릅니다.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섬김의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피폐해진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주님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산소처럼 신선하고, 순결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밤이 되었는데도 아이들이 잘 생각을 하지 않자, 아버지가 아이들 방에 들어가 말했답니다. "이제 잘 시간이 되었구나. 자, 기도하고 자렴." 그러자 막내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는 아주 재미있고 즐거운 하루를 보냈어요. 우리의 내일을 위하여 어떤 계획을 세우셨는지 궁금해요." 이게 믿음이 아닌가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한결같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힘겨웠지만 우리가 지금 살아있는 것처럼, 내일도 우리는 힘겨운 삶을 살게 되겠지만, 한 가지 변할 수 없는 사실은 주님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우리를 안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이 큰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까지 우리를 지켜시고, 선한 길로 인도해주신 하나님이 내일도 우리를 위해 길을 예비해 주실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늘 승리하시기를 빕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