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 평화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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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왕하6:15-23
설교일시 20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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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만들기
왕하6:15-23
(2002/1/6)


한 사람이 강고한 성보다 낫다

아람 왕은 참 미칠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만 하면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방비를 철저히 하니 말입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그는 자기 측근들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적과 내통하는 사람이 있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의심이 자기들에게 돌아오자 참모들도 겁이 났습니다. 그러다가 일의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의 도움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의 배후에 엘리사가 있음을 왕에게 알렸습니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왕하6:12)


우리 같으면 '설마 그럴 리가!' 하고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아람 왕은 그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입니다. 엘리사를 먼저 제거하지 않고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알아차렸을 때 그는 기민하게 움직입니다. 그는 날랜 군사들을 보내 엘리사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밤중에 엘리사가 머물고 있는 성을 겹겹이 에워쌉니다. 아침해가 떠오를 무렵 부지런한 엘리사의 사환은 성밖을 내다보다가 화들짝 놀라고 맙니다. 많은 기병들과 병거들이 성을 에워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주인에게 달려들어가 외칩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6:15)

이제는 별 수 없이 죽게 되었다는 절규입니다. 그렇지만 스승 엘리사는 별로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담담합니다. 오히려 종을 나무라듯이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6:16)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종은 곧 그 말이 진실임을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사환의 눈이 밝아지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자 곧 그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는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를 두르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아람 사람들을 만나러 가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그러자 그들의 눈이 어둡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사를 눈앞에 두고도 엘리사를 찾지 못했습니다. 마치 빌라도가 진리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엘리사는 그들에게 길을 안내해주겠다면서 그들을 데리고 사마리아 성으로 들어갑니다.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의 수도이고 천혜의 요새입니다. 아람 군인의 입장에서는 '호랑이 굴'인 셈입니다. 사마리아 성에 도착해서야 그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들은 공포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를 보고 '저들을 죽일까요'라고 거듭 묻고 있습니다. 엘리사의 말 한마디가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기들이 누구입니까? 엘리사를 죽이러 온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살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뜻밖의 소리를 듣습니다.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 주인에게로 돌려 보내소서."(6:22)


죽음을 각오한 상황에서 음식 대접이라니요? 아람 군인들은 그 뜻밖의 말에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왕이 준비한 잔치 음식을 받아먹고 무사히 호랑이 굴을 빠져나갔습니다. 성경은 그 후 아람 군이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후에 두 민족간의 갈등이 더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적대하는 사람들이나 민족들이 갈등을 극복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저는 오늘의 이야기에서 몇 가지의 교훈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성도들은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살아야 합니다. 엘리사가 아람 왕의 시도를 좌절시킬 수 있었던 것은 남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늘과 내통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늘 높이 떠있는 미국의 첩보위성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작은 변화까지도 다 감지해서 미국 본토에 있는 슈퍼컴퓨터에 전송한답니다. 우리가 전화로 주고받는 작은 정보까지도 마음먹으면 다 알아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무서운 세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생각까지 다 알고 계십니다. 예언자는 그런 하나님의 마음과 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한 종들에게 하시려는 일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시지 않았다면 엘리사가 어떻게 아람인들의 의도를 알아차렸겠습니까? 그는 늘 하나님과의 'hot line'을 가동하고 살았습니다. 누구나 처음부터 하나님의 의도를 다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처음에는 단지 부분적으로만 알 뿐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말한 것처럼 그날이 오면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떠십니까? 아무리 시간이 흘러가도 하늘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구요? 그렇다면 우리 신앙이 병든 것은 아닐까요? 세상의 소음 때문에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구요? 아기의 엄마는 시장의 북새통 속에서도 자기 아기의 목소리를 가려 듣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엄마의 마음이 아기를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들립니다. 한 알의 모래알 속에도 우주가 담겨있다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무심코 피어나는 들꽃 한 송이도 뜻없이 피어나지 않는다면, 세상은 하나님의 소리로 소리로 가득차 있다 할 것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돌아보면서, 예민하게 혼을 가다듬는 이들은 하늘의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 혼을 약탈하려는 것들이 너무도 많은 세상입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소비할 수 있어야 성공한 사람이라는 허구의 신화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노리는 적들이 어디에 웅크리고 있는지 알지 못하면 우리는 영적인 싸움에서 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의 소리를 들은 사람은 역사에 대해 책임의식을 갖습니다. 세상의 어떤 일도 그와 무관하지 않음을 압니다. 우리가 살아 숨쉬고 있는 이 세계는 바로 우리 모두의 삶의 자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삶의 마당을 깨끗하게 보존하고, 지키는 일은 눈을 뜬 모든 이들의 당연한 책임입니다. 엘리사는 자기가 들은 하늘의 소리를 왕에게 알려 대책을 세우도록 했습니다. 이 시대의 종교인들의 의무는 모든 것을 경제중심주의로 몰아가는 세상을 향해 하늘의 뜻을 알리는 것입니다. 고통받는 인류가 있다는 것과, 피조물들이 신음하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합니다.


눈을 떠 하나님의 도우심을 보라

성도들은 또한 눈을 뜬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엘리사의 종은 성을 에워싼 아람 군인들을 보았을 때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이제는 죽게 되었다고 탄식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태연했습니다. 그 둘은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종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았고, 엘리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까지 보았다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뜻밖의 도움이나 위로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영적인 침체를 겪을 때, 그래서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짜증스러워질 때, 뜻하지 않은 전화 한 통이, 혹은 편지 한 통이 우리를 일으켜 세울 때가 있습니다. 나는 기억도 못하는데, '당신의 도움으로 내가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다'는 고백을 들으면 내심 부끄러음을 느낍니다. 그러다가 문득 '아, 나를 일으켜 세우려고 하나님이 이 사람을 시키셨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눈을 뜨면 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려고 얼마나 많은 이들을 동원하고 계신지 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시인은 노래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때로는 나의 부모가, 때로는 나의 자식이, 때로는 나의 스승이, 때로는 나의 제자가, 때로는 나를 사랑하는 이가, 때로는 나를 미워하는 이가 하나님의 지팡이 역할을 하기도 하고, 막대기 노릇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분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쓰임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가 드린 기도와 우리가 행한 사랑의 수고가 불말과 불병거로 바뀌어 우리를 지켜줍니다. 온 산에 가득한 불말과 불병거를 보고 있는 사람이 세상의 위협에 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낙관주의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평화 만들기

마지막으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사랑으로 미움을 이기려는 마음입니다. 이스라엘 왕은 활 한 바탕 쏘지 않고 아람의 정예군을 사로잡았습니다.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격이라 하겠습니다. 그는 그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의 생각은 다릅니다. 죽인다고 해서 무슨 득이 있겠습니까? 엘리사는 왕을 설득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람 군인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합니다. 이스라엘판 '햇빛정책'이라 할까요? 그는 칼로 얻는 승리보다는 사랑으로 얻는 승리가 더 값진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물론 그것은 더딘 길입니다. 어리석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은 가야 할 길이었습니다. 이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는 데만 필요한 덕목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직면하게 되는 많은 분쟁 상황 속에서 성도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는지를 엘리사는 가리켜 보이고 있습니다. 성도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스스로 촉매가 되어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이라 하십니다. 올해는 우리 모두 그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는 엘리사의 선언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