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2.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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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롬11:17-24
설교일시 200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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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
롬11:17-24
(2002/1/13)


밤·대추·감

차례상에 올리는 과일 중에 빠뜨릴 수 없는 게 밤, 대추, 감이라지요? 그런데 그 이유가 상당히 교육적입니다. 밤을 땅에 심으면 그 원래의 모양이 열매를 거둘 때까지 땅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답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근본을 잃지 말라는 뜻에서 올리는 것일 겁니다. 대추는 일단 꽃이 진 후에 열매가 열리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서 대추는 자손이 번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감은 반드시 한번은 접붙임을 해주어야 한다지요? 그렇지 않으면 고욤이 되고 만대요. 차례상에 감을 올리는 것은 그러니까 좋은 스승을 만나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라는 뜻이랍니다.

자손 번성을 염원하는 것, 근본을 잃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을 하는 것은 우리들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인간적 과제입니다. 나를 있게 한 뿌리가 제 아무리 못났어도 그 뿌리를 멸시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얼마 전 다리가 몹시 불편한 50대의 아주머니가 텔레비전에 나왔습니다. 수십 년 관절염을 알아 잘 걷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자식들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아주 많이 흘렸어요. 다리를 심하게 저는 엄마가 부끄러웠을 텐 데도 아이들은 오히려 친구들에게 우리 엄마라고 명랑하게 소개하곤 했다는 겁니다. 엄마는 그게 너무나 고마웠대요. 당연한 일이지만 그게 당연하게만 생각되지 않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가 뿌리로부터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터전이 흔들리는 사회는 자기 뿌리를 소홀히 여기고, 결국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까지도 망각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의 욕망에 의해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된 시대, 곧 신의 일식의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엄히 경고합니다.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자식이라고 기르고 키웠는데,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저를 어떻게 먹여 키우는지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사1:2-3).


자기의 뿌리를 잊지 않고 산다는 것처럼 소중한 일은 없습니다. "개구리 올챙잇적 생각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형편이 달라지면 삶의 태도까지 바뀌는 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버릇인 모양입니다.


이스라엘은 부자가 되더니, 반역자가 되었다. 먹거리가 넉넉해지고, 실컷 먹고 나더니, 자기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기들의 반석이신 구원자를 업신여겼다.(신32:15)


향기가 사라진 후

성숙한 사람이란 받은 바 은혜와 사랑을 잊지 않는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로마교회에는 유대인이 아닌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신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살다가 복음에 접하고 나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은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할 수 없고, 오로지 주님의 은혜로만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에 접했을 때 그들은 감격했을 것입니다. 만해 한용운이 노래한대로 그것은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잊을 수 없는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기에 하나님과 이웃들에게 못할 일도 하면서 살아가는 자기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주신다는 말씀은 얼마나 큰 위로였겠습니까? 벌을 받아 마땅한 자기들을 오히려 따뜻한 품에 안아주시는 그 크신 사랑 앞에서 그들은 다만 감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마음에 지속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감격이나 감사는 향수와 마찬가지로 휘발성이 강합니다. 쉬 사라집니다.

감격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잿빛 현실뿐입니다. 복음이 주는 감격 속에서 바라본 형제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있지만, 감격이 증발한 후에 바라본 형제의 얼굴은 낯설기도 하고, 권태롭기까지 합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허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위태로운 동서(同棲)가 시작됩니다. 때때로 본의 아니게 상처가 되는 말을 주고받기도 하면서 사랑의 공동체는 점차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로마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율법에 집착하고 있는 유대인 형제들의 완고함을 비웃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높아진 것입니다. 최초의 감격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신앙적 교만이었습니다.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남의 눈에서 티끌을 찾으려는 것처럼 영적 건강에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높은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자기갱신의 노력을 중지했음을 뜻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문제임을 망각할 때 남의 허물 찾기에 몰두합니다. 베드로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준다"(벧전4:8) 했습니다. 허물 찾기는 사랑의 무덤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이 식어가고 있는 로마 교회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 비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들고 나온 것이 올리브 나무의 비유입니다.


접붙임 받은 우리

사도 바울은 비유대인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참올리브 나무에 접붙임 받은 돌올리브 나무라고 말합니다. 비록 유대인들이 지금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고는 있지만 그들의 뿌리는 여전히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꺾인 것은 '가지'이지 '뿌리'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적인 전통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가지가 뿌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가지를 살린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두려워해야 할 일이지요. 하나님께서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제가 접붙임을 받은 돌올리브 나무임을 절감합니다. 교회는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습니다. 믿음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기 위해 소중한 생명을 바친 이들 덕분에 우리는 지금 신앙적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가끔 저는 교회에 대해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과 섬김을 통해 서로를 살리는 공동체여야 할 교회가 그 본래적 소명을 잃은 채 표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문간의 나사로는 점점 야위어 가는데, 물질적으로 넉넉해진 교회는 중산층들의 사교장처럼 변해 가고 있어요. 당신들의 천국이 되어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허리에 수건을 동인 채 대야에 물을 떠다가 허리를 굽혀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던 예수님의 모습은 가물가물 멀어지고 있어요. 자유의 이정표가 되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사람들을 신앙적 몽매함 속에 묶어두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해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추문거리가 되고 있는 게 사실 아닌가요? 우리는 지금 본래적인 소명을 잃고 방황하고 있어요.

저는 사실 기존의 교회에 대해 비판적인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또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는 그런 교회를 통해 은혜를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와 만났고, 소명을 받아 목회 사역을 하고 있어요. 교회는 어쨌든 저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영적인 어머니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부정적인 모습도 있지만, 또 일반 사회가 할 수 없는 일도 많이 하고 있는 게 사실이에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려고 자기의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드리는 이들이 있어요. 강도 만난 이웃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이 있어요. 우리는 어쩌면 그런 이들에 기대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몰라요. 어느 신학자는 교회가 역사 속에서 많은 과오를 범한 것도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교회를 통해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신다고 했어요. 교회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좋아요. 하지만 애정 없는 날선 비판은 곤란해요. 그것은 마치 접붙임을 받은 돌올리브 나무가 원 뿌리를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길 위에 서있는 사람들

우리가 높은 마음을 품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자기 갱신을 위한 노력을 중지할 때예요. 우리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을 많이 남겨놓고 있어요. 바울 같은 이도 자기는 아직도 멀었다고 고백했어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3:12)


길 위에 있는 사람은 남을 보고 나무랄 수 없어요. 서로의 부족함을 가엾게 여기고, 사랑으로 허물을 가리워주며,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는 어디쯤 있나요? 나찌 치하에서 순교하신 디이트리히 본회퍼 목사님 아시지요? 한번은 누군가가 와서 기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물었어요. 그러자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어요.


"만일 세상이 형제의 하나를 업신여긴다면 그리스도인은 그를 사랑하고 섬길 것이고, 세상이 그에게 폭력을 가한다면 그리스도인은 그를 원조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세상이 그를 모욕하고 천대한다면 그리스도인은 그 형제의 부끄러움을 덜어주기 위해서 그 자신의 영광을 희생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정의를 거부하는 곳에서, 그리스도인은 자비를 추구해야 하고, 세상이 거짓말에서 피할 곳을 찾는다면, 그리스도인은 벙어리를 위해서 입을 열고, 진리를 증거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인에게 요구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역사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 이웃에 대해서 책임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해가 바뀌어 나이도 한 살 더 먹었으니 이제 우리 신앙의 나무도 더 옹골차게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향해 선물이 되기로 작정하는 순간, 우리 가슴에는 아름다운 신앙의 꽃이 피어날 것입니다. 부디 높은 마음을 품지 마십시오. 항상 우리가 누군가의 '덕분에' 살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때때로 내 삶을 구속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들, 때때로 만나기 버겁게 생각되는 이들,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설 땅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땅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허리를 숙이십시오. 그 속에 삶의 보화가 숨겨져 있습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