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4. 기적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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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태12:38-40
설교일시 200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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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만들기
마12:38-40
(2002/1/27)


이 사람이 내가 본 그 사람입니까?

미국 텍사스 출신의 랜스 암스트롱은 미국은 물론 전 세계 사이클 대회를 휩쓸던 스타였습니다. 그러나 선수로서 최고의 절정에 도달했던 96년, 그에게 고환암이라는 충격적인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혈기왕성한 25살의 스포츠스타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암은 이미 3년째로 접어들어 있었고 암세포는 이미 온몸으로 퍼져 폐와 뇌 조직까지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암이라는 판정을 받았을 때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은 아주 단순했다. '아, 이제 나는 죽는구나.' 내게 내려진 끔찍한 진단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분명히 병원에서 뭔가 잘못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단은 모두 사실이었다."

암스트롱은 현실을 인정하고 암과 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자신의 생명과 사이클을 지키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것입니다. 그는 기자회견을 자청했습니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자신이 암에 걸렸으며 반드시 완쾌해서 사이클 트랙으로 돌아오겠다고 많은 사람들과 약속했습니다. 그는 희망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의사가 전하는 많은 정보 가운데 희망만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나마 '뇌의 상태가 수술을 할 수 있는 상태'라든가 '생존확률이 처음보다 높아졌다'는 등의 작은 희망을 크게 받아들이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반드시 사이클 트랙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사이클은 곧 그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뇌수술 이후 그가 받을 수 있는 항암치료 방식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폐에 무리가 가지만 구토나 현기증은 덜한 것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구토나 현기증은 극심하지만 폐에 손상이 가지 않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는 단연 폐에 손상이 가지 않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사이클선수에게 폐의 손상은 치명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는 철저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끔찍한 구토와 현기증에 시달리면서도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신념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잘 참아낸 항암치료 덕분에 그의 경과는 눈에 띄게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자신이 약속한 사이클 선수로 돌아왔습니다. 투어 드 프랑스대회에 참가한 그는 피레네산맥의 험하고 가파른 길을 달리며 죽음이 눈앞에 있었던 지난날을 생각하며 달렸습니다. 우승은 그의 차지였습니다. 죽음을 극복한 그의 정신력을 이겨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2등과의 격차는 무려 7분이 넘었습니다. 그의 투병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칼 아우스만 박사는 그의 우승광경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내가 본 그 사람입니까? 머리카락 한 올 없이 앙상한 몸으로 침대에 누워 간신히 몸을 움직이던 그 사람입니까? 오 하나님,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랜스 암스트롱은 이 기적 같은 이야기를 담아 책으로 냈습니다. 우리말 제목은『그대를 향하여 달려가리라』이지만, 그 원제는 『It's not about the bike. My journey back to life』입니다. 자전거 선수의 성공담이 아니라, 생의 시련을 극복하고 자기의 진정한 생명을 돌려 받은 사람의 자전적 고백인 것입니다.


기적과 표징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일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을 때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병원에서도 포기한 사람이 멀쩡하게 살아날 때 우리는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기적에 대해서 냉소적인 사람도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저는 세상에 기적이 있음을 믿습니다. 산에서, 혹은 바다에서 조난 당한 사람들이 도무지 벗어날 길 없는 열악한 조건을 극복하고 살아 돌아오면 우리는 '기적적인 생환'이라고 말합니다. 운동경기에서 이제는 승패는 결정이 났다고 체념하는 순간 순식간에 경기를 뒤집어 승리를 따낼 때 해설자는 흥분한 목소리로 외칩니다. "기적입니다." 이렇게 보면 기적이라는 말이 상당히 세속화된 것이 사실이지만, 기적이라는 말에는 어느 정도 종교적인 외경심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적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 그것은 대체로 비일상적인 경험을 가리킵니다. 기적이란 우리의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삶의 질서 속에 성스러운 존재가 개입할 때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온통 기적이야기가 많습니다. 병자를 고치는 이야기는 아주 흔하고, 물이 갈라진다든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다든지, 죽은 자를 살리는 이야기 등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기적 이야기는 성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종교에서나 기적이야기는 아주 빈번하게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가리켜 표징(sign)이라고 합니다. 즉 그 기적들은 무엇인가를 가리킨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 보이는 기호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나의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지, '내가 주장하는 바'가 곧 '나'인 것은 아닙니다. 몸이라고 하는 것은 참 정직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니 말입니다. '몸'과 '맘'이라는 것은 나눌 수 없습니다. 마음에 욕심이 차있으면 우리 몸은 저절로 분주해지고, 비루해집니다. 그러나 마음이 텅 비어 평안하면 몸도 또한 평안합니다. 몸과 마음이 일치된 사람들은 아름답습니다. 예수님 세상에 계시면서 하신 말씀과 몸짓 하나 하나가 그 분이 누구인지를 가리킵니다.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쫓으시고, 소외된 사람의 벗이 되어주시고, 삶의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살맛을 되돌려 주시는 주님을 보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라고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이셨을 뿐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14:11)


하늘을 가리키는 기호로 선 사람

그런데 주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서도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날 때부터 앞 못보는 이가 나옵니다. 그는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시력을 회복했습니다. 시력을 회복한 데서 그치지 않고, 자기 눈을 뜨게 해주신 분이 하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알아차렸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한사코 예수님을 인정하려 하지 않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이 내 눈을 뜨게 하여 주셨는데도,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요9:30)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가리키는 기호로 우뚝 서 계신 데 사람들은 그분이 정말 하늘에서 왔냐고 묻습니다. 만일 하늘에서 오신 것이 분명하면 표징을 보이랍니다. 더 할 나위 없이 분명한 표징을 보면서도 또 표징을 보이라니, 그들은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보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보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역정을 내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예언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사흘 낮 사흘 밤 동안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과 같이, 인자도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마12:39-40)

사람들은 요나의 표적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연결시켜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뜻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사흘 낮 사흘 밤 동안을 땅속에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경험한 초대교회가 첨가한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저는 그것을 '변화의 기적'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과 만난 사람은 다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갈릴리의 어부였던 베드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세리 삭개오는 자기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절망적으로 살면서 자기를 함부로 내던지던 여인 막달라 마리아가 거룩한 마리아로 거듭났습니다. 마치 요나가 하나님을 등지고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보낸 후 니느웨로 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등진 인생에서 하나님을 향한 인생으로의 변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진짜 기적, 그것을 저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이 새로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만 위해서 살던 사람이 다른 이들을 배려하고,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존재로 바뀌는 것, 바로 그것이 요나의 표적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것을 羽化登仙의 사건으로 이해해 보고 싶습니다. 어여쁜 날개를 가진 나비는 처음부터 날개를 달고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나비에게도 애벌레의 시간이 있습니다. 온 몸으로 세상을 기는 시간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욕망의 진창 속에 머물던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생의 시련을 경험합니다. 세상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병도 들고, 이별도 경험하고, 실패의 쓰라림도 맛봅니다. 그 시기는 애벌레가 고치 속에 들어가는 것에 비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독 속에서 자기를 돌아보는 사람은 홀연히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생명이 하나님 안에 있음을 진정으로 알아차리면 염려와 근심이 사라집니다. 자유로워집니다. 더 이상 그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지 않습니다. 자기 감정의 노예가 되어 살지 않습니다. 이때 그는 자기 영혼에 날개가 돋아남을 느낍니다. 비로소 날개 달린 존재가 되는 겁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순간입니다. 나만을 위해 살던 내가 하나님을 위해 살고 이웃을 위한 존재로 거듭난다는 것이 곧 신앙의 기적입니다.

여러분, 표적을 밖에서 구하지 마십시오. 기적을 찾아다니지 마십시오. 주님이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은 바로 우리들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지난 주 우리 교회에서 일어난 기적을 아십니까? 고질적인 문제 거리였던 음식물 쓰레기가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거대한 변혁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작은 실천은 세상을 바꿀 소중한 씨앗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뭔가 의미있는 일에 자원봉사자로 나선다면 우리는 일상 속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기적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거리에서 다 죽어 가는 환자를 데려다가 그가 평안히 임종하도록 돌보아주었는데, 세상에 대한 원망에 가득 차 있던 그는 따뜻한 미소로 수녀님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답니다. 수녀님은 그것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를 돌봄을 통해 우리의 생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자기 생이 기적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암을 극복하고 사람들에게 희망의 아름다움을 증언한 랜스 암스트롱을 보고 칼 아우스만 박사가 했던 말 기억하시지요? "오 하나님,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우리들도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아름답게 완수하려고 최선을 다하며 살 때, 우리는 기적을 만드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애벌레가 변하여 나비가 되듯, 우리는 탐욕의 악취를 버리고, 사랑과 섬김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한평생 품고 가야 할 진정한 꿈이 아니겠습니까? 바다에 묻힌 보물선을 찾겠다면서 세상을 온통 들끓게 만드는 사람들의 꿈이 어떻게 몰락하는지를 보셨지요? 단기간 내에 큰돈을 벌려다가 패가망신하는 이들을 보셨지요? 우리는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며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저는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인들에게 했던 말을 설교의 결론으로 삼고 싶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엡2:10)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