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5. 선지자 오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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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대하28:9-15
설교일시 20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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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오뎃
대하28:9-15
(2002/2/3)


삶의 체취가 밴 이름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이름이 아름답게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우주의 장구한 흐름 속에서 보자면 우리는 기껏해야 한 점 먼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먼지에 지나지 않는 삶이지만 우리의 삶은 위대합니다. 파스칼은 그의 『팡세』1절 첫머리에서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생각'에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생각'이란 내 속에서 '터져 나오는'(生) '깨달음'(覺)입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느냐가 우리의 삶의 내용과 질을 결정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았던 흔적들은 시간과 함께 고운 재처럼 스러지고, 남는 것은 오직 '이름'뿐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 속에는 우리 삶의 체취와 향내가 배어 있습니다. 유다라는 이름이나, 빌라도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불쾌감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프란체스코라는 이름은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그들은 이미 우리 곁에 있지만 않지만 우리의 정신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의 이름은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 어떤 느낌을 자아내고 있을까요?

아하스라는 이름은 어떤가요? 조금이라도 성경을 읽으신 분이라면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뭔가 불길한 기운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는 분단 시기 남왕국 유다의 왕이었습니다. 역대기의 사가는 역대 왕들의 치적과 삶을 간단하게 요약하는 중에 아하스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치 아니하고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만들고 또 힌놈의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 자녀를 불사르고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한지라.(대하28:1-4)


들으신 바와 같이 그에 대해 긍정적인 표현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물론 세상에 좋은 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역대기 사가는 그의 장점을 찾아 언급할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그가 서있던 삶의 방향이 총체적으로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치 아니했다', 이 한 마디로 그의 삶은 결론이 난 셈입니다. 뒤에 나온 다양한 우상숭배의 모습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그의 삶의 그려낸 흔적일 뿐입니다. 아하스는 어떤 의미에서 종교적인 사람입니다. 문제는 그의 종교가 사대주의적이고, 미신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풍요와 다산을 보장해준다는 바알 신을 섬겼고, 강대국 사람들이 섬겼던 신들에게 절을 했습니다. 그의 신앙은 절대자의 뜻을 따르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안녕, 그리고 권력의 획득이었습니다. 그러니 나눔과 돌봄과 섬김을 요구하는 하나님이 그에게는 큰 매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희망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매를 번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아하스의 경우가 꼭 그랬습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우상에게 매달리는 삶의 결국은 무엇입니까? 별 수 없이 정신 차릴 때까지 매를 맞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아람 사람을 보내시고, 북왕국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내셔서 유다 왕국을 치게 합니다. 이게 소위 수리아-에브라임 전쟁인데요, 정말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왕의 죄 때문에 백성들이 희생당하고 고생한다는 게 어찌 보면 불합리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게 역사입니다. 지도자가 바로 서야 하고, 지도자를 바로 세워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 전쟁에서 죽은 사람 가운데는 아하스의 아들, 궁내대신, 그리고 총리대신도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재산을 약탈당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가 되어 이스라엘로 끌려갔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전쟁포로는 종이 되었던 것을 아시지요? 이제 포로가 된 이들에게 남은 것은 신산스런 미래뿐이었습니다. 희망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희망도 없던 그 상황에서 희망은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아직 깨어있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성서를 잘 아는 이들에게도 낯선 이름입니다만 '오뎃'이라는 선지자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는 승전을 자축하며 떠들썩하게 개선하는 군대 앞에 나갑니다. 환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책망하기 위해서입니다. 승전에 도취된 그들 앞에서 오뎃은 찬물을 끼얹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유다를 치신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었다. 그런데 너희는 노기가 충천하여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모자라서, 형제 나라인 유다의 백성을 잡아 노예를 삼으려고 하는구나. 너희에게는 죄가 없느냐?' 무서운 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노자의 『도덕경』(30章)에 나오는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인간세상에서 전쟁이 없을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부득이(不得已)할 경우, 즉 국민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런 때,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전쟁이랍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故로 善者는 果而已요 不敢以取强이라
목적을 겨우 이룰 따름이요 감히 강함을 취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 말은 싸움에서 이긴 뒤에도 패전한 나라에 대해서 교만하거나 억압을 하거나 그러지 않고, 군비를 확충해서 더 강해지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의 미국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이기더니, 과감히 북한과 이란과 이라크를 '악의 중심 축'(axis of evil)이라고 선언하면서 군비확장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노자의 다음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物壯則老하나니 是謂不道라 허거니와 不道는 早已니라.
모든 사물은 강장해지면 노쇠하니 이를 일컬어 도에 어긋난다고 하거니와 도에 어긋나면 일찍 끝난다


너무 강해지면 그 다음은 약해지게 마련인데, 약해지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뎃은 이스라엘 군인들의 행태가 하나님의 듯에 어긋난 행동임을 꿰뚫어 보았기에 단호히 군대 앞에 선 것입니다. 그리고 사로잡아 온 포로를 놓아 돌아가게 하라고 말합니다. 토인비는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창조적 소수라고 했습니다만, 바른 소리는 언제나 고독한 법입니다. 하지만 쇠북을 두드리는 듯한 그의 소리에 공명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입니다.


말씀에 공명하는 사람들

에브라임의 지도자 네 사람이 나서서 개선하는 군대 앞에 서서 말합니다.

"너희는 이 포로를 이리로 끌어들이지 못하리라. 너희의 경영하는 일이 우리로 여호와께 허물이 있게 함이니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더하게 함이로다. 우리의 허물이 이미 커서 진노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임박하였느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 오뎃의 입장에 공감했습니다. 그리고 확고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어쩌면 역적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를 냈습니다. 당장의 이득을 위해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군인들은 자기들의 전리품을 포기하고 물러섰습니다. 그러자 네 사람의 지도자들은 포로들을 잘 보살폈습니다. 벗은 자들에게는 입히고, 맨발인 이들에게는 신발을 신기고, 상처입은 이들에게는 기름을 발라주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기력이 쇠진한 이들은 나귀에 태워 유다 땅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저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일어난 이 기적적인 이야기를 보면서 깊이 감동했습니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는 노래는 이런 경우에 불러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금 오뎃은 어디에 있나?

패배자들의 신음소리와, 승리자의 교만한 웃음소리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억누르고 있을 때, 벌떡 일어나 '이건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 오뎃과 같은 사람이 지금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잡아간 전쟁포로들을 쿠바의 '관타나모'에 있는 미군기지에 억류했습니다. 그곳에서 포로들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그 사실이 알려져 세계 각국의 여론이 비등하자, 럼스펠드 국방 장관은 웃음 띤 얼굴로 세계를 향해 말했습니다. '그들은 전쟁 포로가 아니라 테러리스트들이기 때문에 전쟁 포로에 대한 규약을 담은 제네바 협정에 따른 대우를 해줄 필요가 없소.' 얼마나 교만한 말입니까? 미국의 오뎃은 어디에 있나요? 오뎃의 말에 공감하고 일어나 군대 앞에 섰던 그 지도자들은 다 어디에 있나요? 건전한 시민 정신은 어디에 있고,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다 무엇을 하고 있나요?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힘은 사랑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12:21) 했습니다. 선과 악의 싸움터에서 단호히 선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야 할 사람들, 오뎃과 지도자들은 바로 우리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약한 듯 보이지만 강합니다. 사랑은 무력한 듯 보여도 세상 변혁의 씨앗이 그 속에 있습니다. 우리 교우들 모두가 오뎃이 걸었던 길, 또 예수님이 걸으셨던 그 길을 단호히 선택하기를 바랍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