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7. 충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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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히3:1-6
설교일시 200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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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 성
히3:1-6
(2002/2/17)


흔들리지 않는 중심의 사람

군인들의 인사 구호는 '충성'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군대라는 집단의 특성상 충성을 요구하고, 또 그것을 복창하게 하는 것은 집단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따금 우리는 젊은이들이 선배나 직장 상사를 만나면 '충성!' 하고 인사를 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게 무슨 뜻일까요? 물론 장난이고, 친밀함의 표현임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속에서 비굴한 굴종의 냄새를 맡습니다.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 당신의 권위 앞에서 나는 인격이 없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높은 사람이니까, 나이가 많으니까, 선배니까 마음에 들지 않아도 '충성' 하고 인사한다면 그는 처세에는 밝은 사람일지 모르지만, 진실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윗사람 앞에서는 '네네' 하다가도 뒤에 가면 투덜댑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소인배입니다.

사실 충성이라는 말은 참 좋은 말입니다. 충성스럽다는 말은 매우 긍정적인 평가입니다. 하지만 그 충성이 무엇을 향한 충성이냐가 중요합니다. 깡패가 두목에게 바치는 충성은 좋은 것이 아니지요. 忠이라는 글자는 '中'과 '心'이 합쳐진 말입니다. 마음에 '中'을 얻은 사람만이 '충성스러운' 사람입니다. 이때의 '中'이란 어중간한 중간이 아닙니다. 흔들리지 않는 중심입니다. 중심에 굳게 선 사람이 충성스런 사람입니다. 하늘에 머리를 두고 사는 사람의 중심은 마땅히 하나님이십니다. 중심을 가진 사람은 어느 곳에 있든지, 상황이 어떠하든지 중심을 잃지 않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크리스찬"이라는 우리 교회의 표어는 그리스도라는 중심을 가진 사람이 되자는 초대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으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자는 말이지요. 영화를 보면 가끔 사람들이 집안에서 나쁜 짓을 하려 할 때면 자기 부모의 사진을 돌려놓거나, 수건 같은 것으로 덮어놓더군요. 우리는 그런 광경을 보면서 공감의 미소를 짓곤 합니다. 우리는 가끔 주님의 눈길에 수건을 덮어놓고 기독교인이 아닌 것처럼 처신할 때가 많아요. 그렇지 않은가요?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안팎이 꼭 일치 되셨습니다.


모세의 충성, 예수의 충성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다른 여러 대상들과 비교하고 있어요. 비교의 대상이 있어야 그가 어떤 존재인지가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저는 제 키가 작은 편은 아니라고 스스로 주장하지만, 병규 옆에 서면 소인이지요. 하지만 전도사님 옆에 서면 보기가 꽤 괜찮아요. 그처럼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천사보다도 위대하신 분으로, 그리고 모세보다도 위대한 분으로 드러내고 있어요.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사환으로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스러웠던 것처럼, 예수님도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차이는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아들로서 보냄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의 구성원으로서 충성을 다했지만, 예수님은 그 집을 맡은 아들로서 충성을 다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유의해야 할 부분은 예수님의 충성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 충성스러웠나요?

히브리서 기자는 1절에서 예수님을 '믿는 도리의 사도', 그리고 '대제사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중적인 책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도란 뭔가를 위임받아서 위임해주신 이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권을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길을 여는 사도이십니다. 또한 주님은 인류의 죄를 어깨에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청하는 대제사장이십니다.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이 누구시고,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조심스럽게 숙고하고,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교인들은 남이 제시한 해답을 자신의 답으로 삼으려는 영적 게으름을 보입니다. 우리 믿음이 자라지 않는 까닭은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지성의 희생이 아닙니다. 자꾸 묻고, 또 생각해야 답이 나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를 붙잡은 사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도로서의, 그리고 대제사장으로서의 직무에 충성스러운 분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충성의 대상은 하나님 곧 진리입니다. 충성을 다하는 이들의 특색은 어떠한가요? 자기의 직무를 감당하는 데 불필요한 것들을 다 버립니다. 값진 진주를 발견한 상인은 그 진주를 구하기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팝니다. 많은 것을 팔아 하나를 사는 것이 삶의 성숙입니다. 결국에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를 얻기 위해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님 앞에 늘 엎드리셨습니다. 엎드리지 않고는 깨끗하게 자기를 비울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영달을 위해 다른 이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비겁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얻기 위해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은 용기입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그런 용기를 잃고 살아갑니다. 엎드려 절 한 번만 하면 천하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는 사탄을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 외치시며 내가 경배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하셨던 예수님은 얼마나 당당하십니까? 오늘 우리 삶이 누추하고, 너절하고, 맥이 빠진 이유는 사탄과 적당히 신사협정을 맺고 살기 때문은 아닙니까? 주님은 지금도 충성스러운 일꾼들을 찾고 계십니다. 당신이 위임하신 일을 성심으로 감당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잠25:13)


誠意 공부

우리는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성실한 일꾼입니까? 혹시 우리에게 맡겨지는 일이 격에 맞지 않는다고 투덜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게 맡겨지는 일이 내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일을 소홀히 한 적은 없는지요?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16:10)


우리가 어떤 이의 사람됨을 알려면 그에게 주어진 하찮아 보이는 일을 그가 어떻게 감당하는가를 보면 됩니다. 저는 걸레질하는 것에도 인격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자기 마음을 담아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은 다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늘 성실하십니다.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성실해지려고 함으로써 하늘을 닮습니다. 동양인들도 사람 공부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 '誠意' 공부라 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 뜻을 가지런히 해서 至極한 精誠을 다해야 내적인 힘이 생긴다 했습니다. 그런데 '誠意' 공부에서 중요한 것은 쉬지 않는 것이에요. 至誠은 不息이라 했어요. 어떤 일을 하든 한 10년은 지속하겠다는 결의가 필요해요. 지속에의 열정이 없이는 아무 일도 이룰 수 없어요. 좋은 뜻을 세우고 의욕적으로 일하다가도, 시간이 가면서 시들해져 버리는 사람들을 흔히 봅니다. 내공이 약해서입니다. 힘들어도 최초의 뜻을 굳게 잡고 오래 계속해나가야 좋은 결실을 거두게 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지속의 열정을 잃지 않을 수 있나요? 그것은 결의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먼 길을 가는 방법은 한 걸음을 제대로 내딛는 것인 것과 같이, 우리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매사에 정성을 다할 때 우리는 그 일을 오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나 일을 할 때, 내일 또 만날 사람인데 혹은 내일도 기회는 또 있는데 하면 정성스러움이 사라져요.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그리고 내게 주어진 일이야말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精誠스런 사람'이 됩니다. 정성스런 사람은 소박하지만 알찬 생의 열매를 거두게 마련입니다.

일본에서 가정 도서관 운동을 하는 어느 할머니는 30년을 한결같이 자기 집 방 한 칸을 동네 주민들에게 일주일에 두 번씩 개방했답니다. 어린이들에게 책을 읽게 해야겠다는 중년의 꿈을 노인이 된 지금까지도 굳게 잡고 있는 것이지요. 30년이 지나니까 이제 처음에 할머니의 도서관을 찾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온답니다. 하나의 역사가 만들어진 것이지요.

저는 우리 교회에서 성가대원으로, 교사로, 푸른어린이도서관 봉사자, 애니아의 집 봉사자로 일하는 이들이 수십 년을 한결같이 그 일을 감당해줬으면 좋겠어요. 똑같은 일을 계속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아요. 더 좋은 일, 나를 더 필요로 하는 일이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옛말처럼, 좀 시류를 덜 타는, 그리고 느리고 미련해 보이는 이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게 아닐까요? 예수님은 당신에게 위임된 사명을 성심껏 감당하셨습니다. 그 결과가 십자가였습니다. 그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구원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가시밭길처럼 팍팍한 세상 길을 예수님은 맨발로, 사랑과 섬김의 맨발로 걸어 마침내 구원의 길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걷는 이들입니다. 주님께서 온 몸으로 이루어내신 그 길을 걸으면서,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 이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맡기신 일이 무엇이든 확신과 자부심을 가지고, 쉬지 않고 오랫동안 그 일을 감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집안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음력으로 임오년 첫 번째 주일인 오늘, 하나님의 집안 사람이 되기 위해 맡겨주신 일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다짐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