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9. 차별없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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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5:43-48
설교일시 20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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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없는 사랑
마태 5: 43-48
(2002/3/3)


계속되어야 할 사랑공부

며칠 전 신문에서 오백 년 묵은 씨앗을 심어서 거두었다는 소담한 꽃들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가도 속알이 썩지 않으면 생명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방에서는 씨앗의 알맹이를 가리켜 '仁'이라 합니다. '어질 인' 말입니다. 그래서 살구씨의 속알은 '杏仁'이고, 복숭아씨의 알맹이는 '桃仁'입니다. '어질다'는 뜻의 '仁'이 '씨앗'으로도 쓰인다는 사실이 참 재미있습니다. 결국 생명의 근본, 알짬은 '사랑'이라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사랑' 속에 있을 때 진정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고전13:13)고 말한 것은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도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이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 첫째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그 둘째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12:30-31). 다른 계명들은 사랑을 실천하는데 필요한 부수적인 것들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생 해야 할 공부는 '사랑공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울은 세월이 가면서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했는데(고후4:17), 낡아지지 않는 속사람이란 바로 사랑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랑'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인가요? '어머니'. 그렇지요? 어머니는 사랑의 대표선수입니다.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또 사랑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은 젊은이들이겠지요?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라면 곧잘 무모한 용기를 보이기도 하지요.


자연발생적 사랑을 넘어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도 젊은이들의 사랑도 한계가 분명합니다. 그 사랑은 내 자식, 내 애인에 국한됩니다. 자기 자식을 위해서는 물과 불 속에 뛰어들 수 있는 어머니이지만, 남의 자식을 위해서는 안 그런단 말이에요. 자기 애인을 위해서는 추운 겨울에라도 외투를 벗어 어깨를 둘러줄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못 그럽니다. 이런 사랑은 '자연발생적 사랑'입니다. 이것은 매우 감성적인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애인을 사랑하는 마음도 그저 가수 김상희씨의 노랫말처럼 '그이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정도로 말할 수 있을 뿐이지요. 세상에 이런 사랑만 있다면 화창한 봄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살다보면 꼴 보기 싫은 사람도 만나게 되고, 아주 원수처럼 지내는 사람도 생길 수 있습니다. 제일 쉬운 길은 좋은 사람은 좋아하고, 싫은 사람은 싫어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게 정직해 보입니다. 어느 시인은 '미운 놈 미워하며 살라'고 외칩니다. 속이 다 후련해지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미운 놈 미워하다 보면, 우리 마음속에 평화가 사라지고 맙니다. 내 속에 미움이 있는데 어떻게 평화로울 수 있겠습니까? 미움은 우리 마음 한구석에 쌓여 우리 영혼을 압박합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난감한 요청을 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44)

이 말씀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점잖은 권고가 아닙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내리는 명령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스승으로 모시려 한다면 이 도전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감정과 느낌의 문제인데, 명령한다고 사랑할 수 있나요? 옛날 사람들은 부모의 명령에 따라 낯선 사람과 결혼하기도 했지만, 부모의 명령에 따라 그 대상을 사랑한 것은 아닙니다. 낯선 사람도 사랑하기 어려운데 예수님은 한술 더 떠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은 마음의 이끌림에서 일어나는 느낌은 아닐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감정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의지로서 감정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는 자기 한계를 넘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감정에 바탕을 둔, 즉 마음의 이끌림에 근거한 사랑의 한계를 명백히 지적하고 계십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46-47)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랑의 지평을 넓혀야 합니다. '내' 가족, '내' 애인, '우리' 교회, '우리' 학교, '우리' 고향 사람이니까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외면해버린다면 우리는 영적 미성숙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부디 나를 비껴가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때때로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의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45)


차별없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차별이 없습니다. 성 프란시스는 만일 그에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그리라고 한다면, 지우개를 들고 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그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죄가 지워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허물을 지워주는 일에 인색합니다. 그리고 미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은 우리에게 불쾌한 일을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내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불행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려고 애쓰면서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비약하게 됩니다.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사랑을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 프란시스의 말 한 마디만 더 인용하겠습니다.


모든 인간들의 뱃속 깊은 곳에는, 성스러운 고행자도 있고, 무섭고 더러운 유충도 잠들어 있습니다. 몸을 굽히고 이 유충에게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 그 유충은 날개가 돋아서 나비가 됩니다.


유충은 징그럽고 무섭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비로 바뀌면 아름답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나비'처럼 아름답게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에게 다가가 '사랑합니다'라고 진심으로 말해줌으로써 깨어나도록 하는 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만난 사람은 유충의 단계를 지나 나비가 됩니다. 값없이 주시는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변화시켰습니다. 이제 우리는 만나는 모든 이들 속에 있는 '유충'들을 향해 사랑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랑의 씨를 뿌리도록 초대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뿌린 사랑의 씨앗은 꽃을 피우지 않고 스러지는 법이 없습니다.


사랑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

모스끄바에 '장군'으로 불리우는 노인이 살았습니다. 그는 한평생 유형지와 감옥을 돌아보며 살았습니다. 노인은 죄수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 앞에 멈춰 서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누구에게도 훈시 따위는 거의 한 적이 없었습니다. 노인은 모든 죄수들을 '다정한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노인은 돈을 주기도 했고, 감옥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이따금은 성경도 가지고 갔습니다. 글을 깨우친 죄수들은 유형 길에 그 성경을 읽을 것이고, 또 글을 모르는 동료들에게도 읽어 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죄수에게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물어보는 경우는 드물었고, 죄수가 자기 죄에 관해 먼저 말을 꺼냈을 때만 들어주는 정도였습니다. 그는 죄수들을 친형제처럼 대했지만, 나중에 죄수들은 그를 아버지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어린애를 안고 있는 여자 유형수가 눈에 띌 때면 다가가서 어린애를 어루만져 주고, 그 어린애한테 웃어 보라고 손가락을 딱딱 튀겨 보이기도 했습니다. 시베리아 유형지에는 어른들을 열 둘이나 죽이고 여섯 명의 아이를 찔러 죽인 살인자가 있었습니다. 20년을 그곳에서 보낸 그는 어느 날 엉뚱하게도 한숨을 내쉬며 말했습니다. "지금도 그 장군 할아버지가 살아 있을까?"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묻습니다. "당신은 그 흉악범이 20년 동안 잊지 못했던 장군 할아버지가 그자의 영혼에 어떤 씨앗을 뿌려 놓았는지 알겠어요?"(도스토예프스키, 『백치』중에서)


그래요.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세상에 씨앗을 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진리는 우리가 뿌리는대로 거두리라는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 육체에다 심는 사람은 육체에서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에다 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생을 거둘 것"(갈6:8)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이에게 보여주는 다소의 친절과 사랑은, 내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라 해도 어딘가에서 형체를 입고 쑥쑥 자라고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벌이고 있는 소위 테러와의 전쟁을 두고 보수적인 언론은 그것이 부시의 기독교신앙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도했습니다. 하지만 선인과 악인을 이분법적으로 갈라놓고 선인은 사랑하고 악인은 미워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힘있는 이들의 독선을 경계하기 위한 것입니다. 힘이 정의인 세상에서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고통받는 인류, 상처투성이인 피조 세계는 지금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오직 사랑으로 세상을 보듬어 안을 그런 사람들을 말입니다. 이 사순절 순례길에서 우리의 사랑이 날마다 조금씩 자라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