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1. 고통, 생의 동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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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시119:65-72
설교일시 200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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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생의 동반자
시119:65-72
(2002/3/17)


마음에 맞는 사람과 길을 가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입니다. 청신한 아침처럼 항상 유쾌한 분위기를 만드는 사람과 만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아무런 가식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드러내 보여도 부담스럽지 않은 사람을 가리켜 친구라 합니다. 친구는 어쩌면 인간 영혼의 해방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차마 보일 수 없는 나의 유치한 모습까지도 웃음으로 받아주니 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술을 마셔야 깊은 대화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술은 체면과 이성의 끈을 느슨하게 풀어놓아서, 마음 깊은 곳에 숨긴 속내를 드러내도록 만든다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처럼 근엄한 표정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해소의 장치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감정의 배설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술 깬 후에 사람들의 관계가 더 깊어지고, 돈독해졌나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보이니 말입니다.


백아와 종자기

옛날 중국에 백아(伯牙)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거문고의 명인이었습니다. 허풍이 심한 중국인들은 백아가 거문고를 뜯으면 마차를 끌고 가던 네 마리 말조차도 하늘을 우러러 목을 늘여빼고 푸푸 숨을 내쉬었는데 그것은 기분이 좋아 하늘을 보고 깔깔 웃는 형상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는 태산(泰山)으로 놀러갔는데, 갑자기 날씨가 변하더니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백아는 서둘러 절벽 밑으로 들어가 비를 피했습니다. 무료하게 있던 그는 거문고를 뜯기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소나기가 그치고 한줄기 눈부신 햇살이 나무 이파리 사이에 쏟아지자, 절벽 위에는 황금빛 그림자가 일렁이기 시작했습니다. 흥이 난 백아는 손가락으로 현을 퉁기면서 연주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이때 종자기라는 젊은 나무꾼이 땔감을 짊어지고 가다가 내려놓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듣던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정말로 비 내리는 소리와 똑같네." 백아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부러 손가락에 힘을 주어 거문고의 줄을 세게 또는 약하게 누르고 뜯으며 산이 무너지는 듯한 곡조를 연주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도 종자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산이 무너지는 소리로구나!" 백아는 자기도 모르게 거문고를 밀어놓고 청년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들은 곧 평생의 벗이 되었습니다. 친구를 가리켜 '知音'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이들의 관계에서 나온 말입니다. 나중에 종자기가 죽었을 때, 백아는 거문고를 들고 그의 무덤 앞에 와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음악을 한 곡조 연주하였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품 속에서 칼을 꺼내어 거문고를 줄을 끊어버렸습니다. 이게 소위 伯牙絶鉉이라는 것입니다. 백아는 그 때부터 다시는 거문고를 뜯지 않았다고 합니다. 내 마음의 내밀한 탄식을 알아들을 수 있는 벗이 이 세상에 없으니, 연주할 맛이 없어졌다는 것이지요. 저는 백아가 연주를 그만 둔 행위를 가상하다고 칭찬하고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만, 자기 마음의 소리를 알아들을 줄 아는 친구를 가졌다는 점에서는 그를 부러워합니다. 이런 이가 우리 곁에 있다면 세상은 견딜만할 거예요.


반갑지 않은 동반자

그런데 이런 친구는 고사하고 우리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평생을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생의 동반자가 있습니다. 苦痛입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고통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우는 것은 숨을 쉬기 위해서라면서요. 그런데 어떤 이는 '내가 왜 태어났나?' 하고 탄식한다고 하더군요. 세상 사는 게 얼마나 고단하면 이런 말을 하겠어요. 도착증적인 환자를 제외하면 괴로움과 아픔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고통을 떨쳐버리려고 안간힘을 다합니다. 쾌락에 몸을 맡기기도 하고, 술에 탐닉하기도 합니다. 정도가 심한 사람들은 마약의 힘을 빌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통은 끈 달린 테니스볼처럼 저쪽으로 힘껏 쳐내면, 꼭 그만큼의 힘으로 되돌아오곤 합니다. 살다가 힘에 겨우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힐끔거리면서 왜 내 짐이 이렇게 무거운가 탄식합니다. 하지만 걱정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고, 근심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니 고통이 다가올 때 '왜 내게 이런 일이……?' 하면서 억울해 하지 마십시오. 반갑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는 손님으로 맞으십시오. 그리고 고통의 얼굴을 똑바로 보십시오. 그래야 고통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과 힘껏 싸워야 합니다. 치통이 심한 데,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고 버틴다면, 그 정신력은 가상하지만 미련한 사람이라는 평가는 피할 길이 없을 겁니다. 약을 먹든지, 이를 뽑아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야지요. 배가 고프다면 귀찮더라도 밥을 짓든지, 밖에 나가 사먹기라도 해야지요.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고통과 싸우는 것이 싫어서 그 속에 머문다면 할 수 없지요. 그냥 그렇게 살라지요 뭐. 하지만 사람은 고통과 싸우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도 알지 못하는 힘을 발견하게 됩니다. 聖人들에게 만일 아무런 고통도 없었다면 그들 속에서 그렇게도 깊은 영성과 사랑의 물줄기가 솟아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 그것은 우리의 한계를 자각하게 만드는 것인 동시에, 우리가 새로운 단계로 도약할 수 있도록 하는 디딤돌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고통, 혹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도 합니다. 편안하기만 하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찾겠어요?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까지는 잘못된 길을 걸었으나,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킵니다.(67)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의 율례를 배웠습니다.(71)

고난을 당하는 것도 속상한데, 고난으로부터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됩니다. 고난이 닥쳐오면 눈을 부릅뜨고 '고난'과 '고통'이 뒷짐에 숨기고 있는 선물을 얻어내야 해요. 얍복 나루에서 주의 사자와 씨름을 하던 야곱이 어떻게 했는지 아시지요? 동이 틀 무렵 주의 사자가 떠나려 하자, 그는 더욱 단단히 그의 소맷부리를 붙잡고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씁니다(창32:26). 그래서 그는 자기 삶에 드리웠던 기름기, 즉 자기 이익을 위해 약삭빨랐던 '야곱'을 벗고,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의미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괴로움과 아픔이라는 것은 우리 생의 동반자로서 소중한 역할을 합니다. 시인은 그것을 통해 주님의 말씀과 뜻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고통 속으로 들어가기

그런데 성도들은 개인적인 고통과의 씨름에만 매달리면 안 됩니다. 능동적으로 고통의 바람 속으로 들어가기도 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고통을 강요하는 제도와 질서에 대해서도 맞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살 권리를 박탈하는 제도와 맞서고, 장애를 가진 이들이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싸움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이런 저런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싸움에 나서야 합니다. 학대받는 여성·아동·노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기아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도저히 자기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낼 수 없는 사람들의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머리를 싸매야 합니다. 소말리아의 어린이들이 굶주려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넉넉한 나의 식탁이 죄스러웠습니다. 저는 일단 우리 교우들이 만든 사순절 저금통을 소말리아 어린이들을 위해 사용하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진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땅에 매여 살고 있는 우리를 구하여,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겪는 것과 똑같은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저는 히브리서 기자의 말을 통해 한없는 위로를 얻습니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당하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2:18)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범하지 않으셨습니다.(4:15)


예수의 고난과 결합하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육신의 고통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운명처럼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우리들에게는 얼마나 큰 위안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겪는 모든 아픔과 슬픔, 그리고 고통을 주님은 관념적으로가 아니라, 육체적으로 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아파하시고, 그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셨던 십자가, 그 위에서 겪으셨던 주님의 고통과 우리의 고통이 결합될 때, 특별히 다른 이들의 생의 문제를 풀어주기 위해 능동적으로 선택한 고통이 결합될 때 십자가의 고통과 결합할 때, 그것은 구원의 연료로 바뀝니다. 이것이 놀라운 신앙의 신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얻을 수 있나요? 저는 시편 119편을 읽다가 92절의 말씀 앞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의 법을 내 기쁨으로 삼지 아니하였더면, 나는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그리고 고난을 창조적인 생의 연료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영웅적인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주의 법을 기쁨으로 삼을 때 우리는 비로소 고난을 이길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시시때때로 한적한 곳을 찾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신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의 일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의 결합으로부터 힘이 나옵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 말입니다.

사노라면 힘겨운 일이 많습니다. 또한 세상에는 우리의 땀과 피와 눈물을 기다리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고난의 길입니다. 하지만 가시가 싫다고 해서 장미꽃을 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생의 재료를 가지고 아름다운 인생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고통이나 슬픔조차도 하나님께 봉헌되면 아름다운 빛을 얻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지금 사순절기의 가파른 고갯길을 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던 그 고난이 나와 무관한 것일 수 없음을 아십시오. 그리고 그 고난의 길을 주님과 함께 걸으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시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꿈을 이루는 일에 초대받았습니다. 그 초대를 귀히 여기는 사람은 고통을 경험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고통 너머에 있는 영생도 경험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그 십자가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