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2. 태산처럼 굳게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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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50:4-9
설교일시 200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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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처럼 굳게 서서
사50:4-9
(2002/3/24, 종려주일)


무거운 마음을 부리라

예수님의 일생을 떠올릴 때마다 제게는 '당당함'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지갑이 든든한 사람의 당당함이 아닙니다. 든든한 빽을 가진 이의 건방진 당당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당당하심은 남의 평가와 판단에 좌우되지 않는 자립(自立)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힘있는 이들 앞에서 주눅드는 법이 없었고, 그를 모함하고 모욕하는 무리들 앞에서도 마음의 평화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어지럽게 잔물결을 일으키는 저의 심약함에 비하면 예수님은 굳건한 태산과도 같으십니다. 사람들의 칭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비난에 속상해 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은 당신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땅에 깔고 올리브 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환영에 도취되지 않으셨습니다.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을 당하고, 총독에게서 모욕을 받을 때도 예수님은 고요했습니다. 그 고요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염세주의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아니면 죽음 이후에 맞이할 부활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저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그 고요함의 뿌리라고 생각합니다.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 위를 걸으시는 주님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우리가 세상의 풍파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영혼의 고요함을 잃을 때입니다. 염려가 우리 마음속을 파고들 때 우리는 허둥거리기 시작하고, 허둥대면 무거워지고, 무거워지면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순간이 왜 없으셨겠어요. 하지만 주님이 언제 어디서 누구를 대하든 한결같은 모습을 잃지 않으셨던 것은, 시시때때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무거워진 마음을 부리곤 하셨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가 자유로워지려면 사소한 일에도 상처입고, 속상해하고, 격분하는 자아를 자꾸만 비워내야 해요. 물기를 잔뜩 머금은 구름처럼 도저히 마음을 주체할 길 없어 허둥거리다가 누군가에게 그 마음의 짐을 부려놓고 나면, 좀 머쓱해질 때가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까지 속상해하고, 안달할 일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기 때문입니다.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다가 뒤로 물러나 캔버스를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도 삶 전체를 조망하는 자리에 서 보어야 합니다.


문제로부터 벗어나는 길

칼 구스타프 융이라는 심리학자는 "삶의 가장 중대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문제로부터 '벗어나야' 한답니다. 어떤 문제로부터 벗어나려면 보다 높은 수준의 의식의 지평이 열려야 합니다. 나의 현실을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하는 순간 해결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던 문제가 '절박성'을 잃게 되는 것이지요.

박완서 선생님의 책 중에『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이 있어요. 자기가 겪은 일을 소설로 형상화한 작품인데요. 작가는 의대에 다니던 아들을 갑작스런 사고로 잃었어요. 참척의 고통을 당한 어머니는 도무지 그 현실을 인정할 수가 없어요.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내게 이런 일이∼?" 이게 그 어머니의 질문이에요. 하지만 거기에는 답이 있을 리가 없어요. 어떤 그럴싸한 말도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할 수 없어요. 그는 사람들을 피해 한적한 수녀원에 가서 머물게 돼요. 그 고요함 속에서 자기 자신을 살펴보고, 수녀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어느 날 질문이 바뀌어요. "왜 이런 일이 내게는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래요, 그렇게 생각할 아무런 근거도 없어요. 나는 예쁘니까, 나는 젊으니까, 나는 목사니까, 나는 부자니까, 나는 위대한 학자니까……. 이건 답이 될 수 없지요. 이 작가의 경우 질문이 바뀌니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거예요. 작가는 그 때서야 현실로 복귀할 수 있었어요. 내가 어느 자리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현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마련입니다.


고난받는 종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고난받는 종은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귀를 열고 살아갑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어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습니다. 지친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 위로해주는 정 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미움을 받고, 고난을 당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마음에 상처를 입지도, 의기소침해지지도 않습니다.


"나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다. 내게 침을 뱉고 나를 모욕하여도 내가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6)


어떻게 보면 노예적인 굴종으로 보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되로 받으면 말로 갚아주라고 가르칩니다. 은혜 받은 걸 그렇게 갚으라는 말이 아니지요? 한 대 맞으면 곱절로 갚아주라는 말이지요. 그래야 바보 취급받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고난받는 종은 부당한 폭력과 모욕을 그냥 그대로 감수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스토아학파 사람들이 말하는 마음의 평정 때문인가요? 노예출신의 스토아 철학자였던 에픽테투스는 어느 날 화가 잔뜩 난 주인이 자기 팔을 꺾자 '그러다가 팔이 부러지겠어요' 하고 말했다지요. 노예의 평온한 목소리와 표정에 주인은 더 화가 나서 팔을 더 심하게 비틀었고, 아시는 바와 같이 팔은 부러지고 말았어요. 그때 그가 했다는 말 아시지요? "거 봐요, 내가 그럴 거라고 했잖아요." 이 정도면 대단하지요? 스토아 철학에서는 이처럼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 초연한 마음을 가리켜 아파테이아(apatheia)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고난받는 종이 모욕과 폭력을 견딘 것은 아파테이아와는 다릅니다.


"그들이 나를 모욕하여도 마음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7)


그는 이를 악물고 부당함을 견디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의 마음속에는 분노가 쌓였을 것입니다. 물론 그는 모든 어려움을 견디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힘은 자기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 힘은 언제나 자기 가까이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선을 위해 싸우다가 고난을 당하는 이들의 처지를 헤아리고 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했기에 그는 고난의 현실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젖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가랑비 때문에 화를 내지 않는 법입니다. 그는 부당한 폭력에 마음 상하지 않았습니다. 폭력을 가하는 이들은 그의 몸은 괴롭힐 수는 있었지만 영혼까지 뒤흔들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이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폭력을 부둥켜안고

그러나 우리는 더 큰 승리의 길이 있음을 봅니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모두가 승자인 길 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걸으셨던 길입니다. 인간의 야만적인 폭력과 모욕 앞에 서셨던 예수님을 생각해 봅니다. 유다의 배신으로 체포당하신 후부터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죽기까지 함께 하겠다며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은 다 달아났습니다. 올리브 나무 가지를 흔들며 그를 환영하던 군중들은 어느새 폭력과 음모의 하수인으로 몰락했습니다. 군인들은 그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조롱하고 모욕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고통의 시간을 홀로 견뎌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음속에 원망이나 미움은 없습니다. 오직 슬픔뿐입니다. 무력해진 동료 인간을 향해 던지는 사람들의 야유와 조롱과 폭력처럼 슬픈 것은 없습니다. 주님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온 몸으로 폭력의 역사를 부둥켜안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23:34). 하늘 아버지에 대한 궁극적인 신뢰가 있었기에 예수님은 사랑으로 악을 감싸안은 것입니다.

십자가, 그것은 인간의 야수성이 온전히 드러난 현장입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는 동시에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쉽게 흘러 넘치다가 금방 말라버리는 개울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바다 같이 如如한 분, 우리는 그분에게 사로잡혔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지셨던 그 십자가를 통해 열린 구원의 길, 사랑의 길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길을 걸어야 하나님께 이를 수 있음도 믿습니다. 예수님이 폭력과 미움을 사랑의 포대기로 싸안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참 무기력합니다. 작은 모욕에도 상처받고, 누군가 내게 작은 손해라도 입히면 곧장 사랑의 시선을 거두어버립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피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중심을 얻으면

쟁기를 매보지 않는 소는 밭에 들어가기 전에 길에서 무거운 돌을 끌면서 밭가는 연습을 합니다.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코뚜레가 당겨질 때의 고통, 목의 멍에, 어깨에 걸린 나무가 스치면서 낸 상처, 농부 아저씨의 낯선 외침, 소는 눈물을 흘리며 연습을 합니다. 그래야 밭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도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다가 모욕을 받기도 하고, 손해를 보기도 하고,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점점 성도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팽이를 돌리는 아이들을 보십시오.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는 팽이를 곧추 세우기 위해서 아이들은 연신 팽이채를 휘둘러댑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팽이가 중심을 찾고 고요해지면 아이도 팽이채를 거둡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 삶이 작은 바람에도 속절없이 흔들리는 것은 아직 생의 중심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중심을 얻어야 태산처럼 든든해집니다.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세월이 갈수록 예수님의 중심과 우리의 중심이 하나가 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고난당하시고, 모욕당하신 주님, 그분의 상하신 몸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찬185장1절). 날마다 겪는 일들에 一喜一悲하지 말고,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의의 병기로 주님께 바치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밭을 가는 소들처럼, 우리도 눈물로 씨를 뿌리면 마침내 거두는 날이 올 것입니다. 먼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될 때 우리 삶은 참으로 든든하게 설 것입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