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4. 근심을 넘어 기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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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16:20-24
설교일시 20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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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을 넘어 기쁨으로
요16:20-24
(2002/4/7)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던지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의 뜻을 헤아려보려고 애를 썼지만 알 수 없었습니다.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가 당신에게 드리워있음을 암시한 것이건만 제자들은 도무지 알아차리지를 못합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들떠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당신이 받을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말해도 그들은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꿈의 종말로서의 죽음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현실을 현실로 보지 못하고, 자기들의 원망사고(wishful thinking)에 따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날 엄연한 현실을 그들에게 일깨워주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근심에 싸여도, 그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이 구절의 앞 문장은 갈보리 언덕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제자들은 먼발치로나마 그 비극적인 광경을 보면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감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의기양양해서 주님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은 숨죽여 울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예수님만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자기들의 꿈도 그곳에 못 박혀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세상에 내렸던 어둠은 제자들의 가슴에도 짙게 드리워 있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셨던 그 수수께끼 같은 말씀이 생각나 더욱 슬픔에 잠겼을 것입니다.


혼란을 거친 후의 평안함

십자가는 모든 익숙하던 것과의 결별입니다. 그리고 낯설기 그지없는 죽음을 받아들임입니다. 십자가는 또한 자신의 생각과 바람을 포기하고 애오라지 하나님의 뜻만을 받들어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아픔이고 근심이고 슬픔입니다. 그것은 더 큰 생명으로 깨어나기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이 겪을 아픔이나 혼란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경험할 희망과 기쁨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너희가 근심에 싸여도, 그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물론 이 말씀은 당신의 부활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부활 사건이 가져온 기쁨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기쁨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근원적인 기쁨입니다. 아무도 빼앗거나 뒤흔들어 놓을 수 없는 기쁨입니다. 한자로 영녕 寧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마음이 항상 조용하고 편안하여 外物에 의하여 혼란되지 아니함'을 뜻합니다. 그런데 앞에 나오는 '영 '은 '어지럽다, 혼란스럽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寧이란 혼란을 거친 후의 평안함과 안정감을 가리킵니다. 혼란을 알지 못하는 평안함은 깨지기 쉽습니다. 그처럼 십자가의 고통과 절망이 있었기에 부활의 소식이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생명의 원리를 출산의 고통에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여인들은 아기를 낳기 전에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맛봅니다.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고통이기에, 홀로 견뎌야 하는 고통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여인들은 새로운 생명을 맞이하는 일에 자신의 목숨을 겁니다. 대만의 신학자인 宋泉盛은 여성을 가리켜 "하나님의 공동 창조자"(co-creator of God)라고 했는데, 이 말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서 더 영적이고 강인한 것은 이런 고통을 경험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여인들의 고통과 두려움은 태어난 새 생명 앞에서 다 사라집니다. 기쁨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출산한 후의 여성들의 얼굴에는 거룩한 빛이 감돕니다.


절로 환한 날이 밝아오기까지

주님은 부활 사건을 경험한 후에 제자들이 맛보게 될 기쁨을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또 수수께끼와 같습니다.


그 날이 오면 너희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23)


이게 무슨 뜻일까요? 묻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것이 자명해진다는 말일 겁니다. 매사가 희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저런 질문을 제기하며 삽니다. 엉뚱한 것에 매혹 당하기도 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며칠 전 새벽에 집에서 내려오는 데 저만치 어느 집 옆에 시커먼 물체가 보여서 깜짝 놀랐습니다. 마치 술 취한 사람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까, 주인에게 버림받은 고릴라 인형이었습니다. 밝았더라면 그런 착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어둠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이 힘겹고 고달픈 이유는 우리 속의 어둠 때문이 아닌가싶습니다. 날이 새고 나면 우리는 별것도 아닌 일 때문에 속을 끓였음을 알게 됩니다.

삶의 실상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삶이 가벼워집니다. 주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하늘의 등불이 하나 밝혀집니다. 그때까지 가슴을 짓누르던 의혹과 두려움의 안개는 저절로 스러지고, 가야 할 길이 절로 환해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길을 묻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곧 길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됨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그 날'이 여러분에게 밝아왔습니까? 아직 '그 날'이 오지 않았다면 주님께 열심히 여쭤보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

예수님은 또 제자들에게 아주 귀한 선물을 하나 남겨주십니다. 이 선물은 우리에게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주님의 배려입니다.


"너희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 구하여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23b-24a)


주님은 당신의 이름을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욕심꾸러기인 우리들에게 말입니다. 이름을 빌려주신다는 것은 그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인감도장을 빌려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참 곤란한 일이지요. 그 도장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할지 모르는데 어떻게 빌려주겠어요. 그런데 주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는 약속과 함께 당신의 이름을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그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시렵니까? 참 두렵습니다.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소원을 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高臺廣室같은 집과 먹을 것을 구하더군요. 우리는 그 이름을 사용하는 데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한다면서 주님의 뜻과 경륜에 어긋나는 것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름의 도용입니다. 가난해서 돈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연약해서 건강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닫힌 생의 문이 열리기를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과도한 욕심을 위해 구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신기한 그릇이 하나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마음에 갖고 싶은 것을 생각하고 그릇 앞으로 나아가면 그릇에 그 물건이 가득 담기는 그런 그릇이었습니다. 말도 필요 없었습니다. 그릇은 자기 앞에 나오는 사람의 마음을 읽어서 원하는 것을 가져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릇은 쉴 새 없이 물건을 쏟아 놓았습니다. 그릇 앞에 오는 사람들은 저마다 값나가는 물건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가물에 콩 나듯이 '사랑'이라든지 '건강'을 구하는 사람들도 있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꾀죄죄한 차림의 소년 하나가 그릇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그릇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여태까지 신통하던 그릇이 갑자기 아무것도 내지 않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소년과 그릇을 번갈아 보며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재수없는 놈 같으니라고." 그때 그 그릇이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너희들은 고작해야 썩어 없어지는 물건을 원했으나 이 아이는 아무것도 욕심을 품지 않고 내게 나왔다. 이 세상에서 이 아이의 마음이 제일 깨끗한 마음이고, 하늘과 같이 빈 마음이다. 나는 본래 하나님이 이 세상 인간들의 마음을 비춰보라고 보낸 하늘의 천사였다."

우리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주님, 당신 자신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이라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때로는 지치고, 생의 짐이 무거워 비틀거릴 때도 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하거나 거역하려 하지말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십시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어떤 일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배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이 함께 계심을 마음 깊이 확신하십시오.

이제 주눅들어 살지 말고 어깨를 펴십시오. 자기 속에 파묻히지만 말고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기 위해 작은 일부터 시작하십시오. 길거리의 쓰레기를 줍는 일, 외로운 이웃의 말벗이 되어주는 일…. 찾아보면 참으로 많은 일들이 우리 손길을 기다립니다. 그 작은 일이야말로 혁명의 시작입니다. 그 일을 하는 동안 어려운 일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근심을 통해 아무도 흔들 수 없는 기쁨의 언덕에 이르게 될 것이니 말입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