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6. 연민과 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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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행3:1-10
설교일시 2002/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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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과 존중
행3:1-10
(2002/4/21, 장애인 주일)


오늘은 우리가 장애우들을 기억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날 때부터 장애를 안고 태어난 이도 있고, 중도에 병이나 사고로 장애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의 생각이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그래도 장애우들은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안으로 위축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 속에 갇혀 지내는 분들도 많습니다. 사회적으로 암암리에 강요되는 疎外도 가슴 아픈 것인데, 스스로 울타리 밖으로 나서려 하지 않는 疎內의 현실이 더욱 가슴 아픕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우리는 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사람을 두고 벌어졌던 논쟁을 기억합니다. '그가 앞을 못 보는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냐'가 논쟁의 발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가세한 그 논쟁은 앞 못 보는 이의 고통을 더욱 크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대화 중에 이미 그의 현실은 누군가의 죄의 결과라고 단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대화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주님은 논의의 주인공이면서도 정작 소외되고 있던 그 앞 못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문제에 접근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에 대한 신학적 입장이 아닙니다. 그가 겪고 있는 현실적인 아픔과 불편함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이해나 신앙고백이 아니라, 신앙실천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적 통념을 뒤집어엎는 전복적 사고였습니다.


물음표로 서있는 사람들

당장 굶주림 속에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그들이 가난하게 된 이유를 따지는 것은 배부른 자들의 교만입니다. 먼저 먹여야 합니다. 이유를 따지는 것은 그 이후에 해도 됩니다. 우리는 얼마 전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인 최옥란 씨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그의 죽음이 던지는 사회적 메시지가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에밀 뒤르카임의 말을 빌자면 그의 자살은 '사회적 자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꿈은 너무나 소박했습니다. 아홉 살 난 아들을 부양하며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부에서 지급하는 생계급여와 장애인 수당을 합쳐 받는 30만 5천 원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노점상을 하며 돈을 벌려고 했지만, 수입이 생기면 생계급여가 줄어들고, 임대주택에서도 쫓겨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일을 포기하고 맙니다. 일의 포기는 곧 아들을 포기하는 것이고, 아들의 포기는 곧 살 희망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쉽게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분노합니다. 그래서 장애인들의 살 권리를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며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라고, 최저 생계비를 지급하라고 요구하며 철옹성같은 세상과 싸웠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침내 벽과 같은 세상에 절망하여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냉랭한 세상에서의 탈주인 셈입니다. 그의 죽음은 올림픽을 개최하고 월드컵을 개최한다는 이 나라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묻는 물음표로 우리 앞에 서있습니다. 그는 "길 가는 모든 나그네들이여, 이 일이 그대들과는 관계가 없는가?"(애1:12)라고 묻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어려운 이웃들과 만나기를 꺼립니다. 어쩌면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우리 삶의 평온을 깨뜨릴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장애인들을 위해 라르슈 공동체를 만든 쟝 바니에 신부는 한 가난한 여인에게 사람들이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속내를 이렇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이 여인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간다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 자녀들의 이름을 알기 시작하고
그녀의 과거와
그녀의 생활을 알기 시작한다면
만일 내가 그녀와 일체감을 나눈다면
나는 더 이상
전과 같이 먹을 수 없을 것이고
더 이상 사치와 낭비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관심을 가진다면
나의 생활이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생활을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쌓아 온 그 생활이
무너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 장애를 지닌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과 연루되면 우리 생활이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랍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마음을 열면 우리가 치뤄야 할 대가가 너무도 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 수 있으면 어려운 사람들을 바라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 곁에 멈춰 서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지나쳐서 저만치 멀어진 후에 혀를 차며 말합니다. '세상이 왜 이 모양이지.' 그리고는 재빨리 나의 울타리 속으로 숨어버리고 맙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름다운 문 앞에서

성전 '미문', 곧 아름다운 문 앞에는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이 풍경처럼 앉아 사람들의 호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전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시정거리의 사람들보다는 주머니를 잘 여는 법이니, 그는 참 좋은 목을 잡은 셈입니다. 그 날도 그는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 사람들의 주머니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누군가가 자기 앞에 멈춰 서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놀란 눈으로 올려다봅니다. 낯선 두 사람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은 연민과 자비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움찔 놀라 시선을 떨궜습니다. 아무도 그를 그렇게는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낯선 사나이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우리를 보시오!" 못 걷는 사람은 뭐를 주려나 보다 하면서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때 한 사나이가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그 걷지 못하는 사람은 뭔지 모를 기운이 자기 속에서 뜨겁게 약동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침내 그 사나이가 손을 내밀어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을 때 그는 벌떡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꿈도 꿔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주저앉은 채 한 세상을 사는 것이 자기의 운명이려니 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견딜 수 없이 뜨거운 기운이 솟아올라 그는 그 기운을 내뱉었습니다.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더 이상 성전 문앞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증언하는 사람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

우리는 이 간결한 이야기 속에서 어려움 속에 살고 있는 이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선은 그들 앞에 멈추어 서야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멈춰 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앞에 멈춰 섰습니다. 멈춰 섬이 관계맺음의 첫 단계입니다. 분명히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의 앞에 멈춰 서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영혼이 병들었음을 나타냅니다.

다음은 그를 바라보고 그의 말을 듣는 단계입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베드로와 요한은 그 걷지 못하는 사람을 풍경처럼 대하지 않고, 이웃으로 대했습니다. 그는 위험한 사람도 더러운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불편한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눈길과 눈길이 마주칠 때 두 사도는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은 접촉하는 단계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한 후에 베드로는 그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접촉하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사람의 눈을 어루만져 고쳐주셨습니다. 열병에 시달리는 베드로의 장모를 붙잡아 일으켰습니다. 죽음의 깊은 잠에 빠진 야이로의 딸을 잡아 일으켜 살리셨습니다.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심으로 고쳐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접촉은 그 사람과 우리 사이에 신뢰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병원이나 장애인 시설을 방문하면 환자나 장애우들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꺼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접촉하지 않고는 깊은 유대감이 형성될 수 없습니다.


영혼의 샤워

사실 장애를 가진 분들은 아주 부가가치가 높은 일에 종사하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생산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다지 유능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분들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소중한 존재들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세상에 있는 어느 생명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몸에 빗대 설명하면서, 다양한 지체들이 독립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유기적으로 결합해 한 몸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가장 연약한 지체가 가장 소중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약한 지체가 소중히 여김을 받지 않는 공동체는 사랑이 없는 공동체이고, 사랑이 없으면 공동체의 유대감은 깨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장애인들은 우리의 양심 앞에 세워진 물음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우리 사회의 연약한 지체들인 그들의 어려움에 깊이 공감하고, 그들의 살 권리를 마음 깊이 인정하고 존중하고, 그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 영혼에 드리운 죄의 어둠은 한결 옅어질 것입니다. 장애인 시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면서 목욕봉사를 하는 어느 소방 공무원이 하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분들의 몸을 닦아드리는 데 오히려 내 영혼의 때가 벗겨지는 것 같아요." 그들과 만난다는 것은 일종의 영혼의 샤워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장애 속에 살고 있는 분들이 우리보다 더 순수하고, 더 유쾌하고, 더 영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멈춰 서고, 말을 건네고, 이야기를 듣고,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협력하는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잃어버렸던 우리의 본디 모습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삶과 연대하기 위해 용기를 내십시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