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8. 다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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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눅10:20-21
설교일시 20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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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자
눅10:20-21
(2002/5/5)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

며칠 전 친구들을 만났는데, 다들 지친 표정들이었습니다. 한 친구가 이런 제안을 했어요.

"내가 오늘 대화 주제를 제시할게. '사는 낙'이 무엇인지 논하시오."
여러분도 눈치를 채셨겠습니다만, 이것은 제안자 자신이 딱히 '사는 낙'이라 할 만한 일을 찾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왜 안 그렇겠어요. 연일 폭로되는 지도층들의 부정과 부패는 엘리 가문의 몰락을 보는 듯하고, 날로 흉포해져가는 세상을 보면서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친구들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주제를 회피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친구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어요.
"나는 '사는 낙'이 있어."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물었습니다.
"뭔데?" 그러자 싱거운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비밀이야."
같이 한참 웃었습니다. 없다고 하면 비참하니까 일단 있다고 해놓고, 캐물으니까 비밀이라고 엉너리를 친 것입니다. 성령에 충만한 삶은 신바람나는 생활이라는 데, 우리 삶은 점점 바람빠진 타이어처럼 삐걱거립니다. 워즈워드의 시가 생각납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마음 뛰노나니
내가 어렸을 때 그러하였고
어른 된 지금도 그러하거늘
만일 늙어서 그렇지 아니할진대
차라리 나를 죽게 하소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원컨대 나의 하루하루를
타고난 경건으로 이어가게 하소서.


지금 우리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시인은 어른이 된 지금도 무지개를 보면 마음이 뛰논다고 말합니다. 만일 늙어서라도 그 마음을 잃게 된다면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합니다. 설렘이 없는 삶은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일 겁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참 파격적인 말이지만 뜻을 새겨보면 맞는 말입니다.

어린이는 생명입니다. 생명은 자꾸자꾸 변화합니다. 변화가 중지되면 굳어지고, 굳어지면 죽게 마련입니다. 노자는 생명에 가까운 것은 부드럽고, 죽음에 가까운 것은 딱딱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속에서 어린이가 뛰놀 때 우리는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은 참입니다. 우리 속에 숨어버린 어린이를 다시 불러내야 합니다. 그 어린이와 더불어 놀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어린이를 멀리 하고 살았습니다.


놀 줄 모르는 삶의 비극

그 결과 우리는 놀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느라고 숨이 찰 지경입니다. 조금만 지체해도 추월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주변을 둘러볼 여유 없이 달려갑니다. 그러면서 정신은 점점 피폐해집니다. 인디언들은 부지런히 달려가다가도 간혹 멈추어 서서 무엇인가를 기다린대요. 미처 따라오지 못한 혼을 기다리는 거지요.

웃기는 이야기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아주 소중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공이라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열매를 얻기 위해 우리 혼을 뱀에게 맡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넋이 나간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좀 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루 종일 방바닥에 엎드려 빈둥거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몸은 쉬면서도 마음이 쉬지 못하면 그건 참다운 휴식이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의 일상생활과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하면서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참 잘 놉니다. 놀이에 몰두하는 아이들의 눈은 생동감에 가득 차 있습니다. 눈이 생동한다는 것은 아이들 속에서 뭔가 창조적인 역사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놀이는 참다운 의미의 안식이 됩니다.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그 자체가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쩌면 타락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창조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회복하지 않는 한 '사는 낙'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일부러라도 시간을 만들어서 좋은 음악도 듣고, 미술관에도 가고, 자연과도 접하고, 뭔가 살아있는 것을 길러보십시오. 그것도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우리 속의 어린이가 숨어버린 후 우리를 지배하는 감정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어린이들은 낯선 친구를 만나면 잠시 동안의 탐색 끝에 금방 친해집니다. 또 자기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습니다. 그 호기심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아이들은 성장해갑니다. 어른들은 새로운 것보다는 익숙한 것을 좋아합니다. 낯선 것은 무조건 위험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새것 강박증 때문에 항상 무엇인가를 구매하지 않고는 불행해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고 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새것 강박증은 사실은 익숙한 것들에 대한 집착입니다. 소비주의는 타인에 대한 과시를 의도한다는 점에서 가학적이지만, 곧잘 열등감에 빠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피학적입니다. 값진 물건을 구매하고 소비한다고 해서 우리 삶의 질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소비주의에 빠진 이들은 대개 새로운 삶을 향해 길 떠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릇 생명이란 거듭거듭 자기의 안락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야 성장합니다. 낯선 것을 향해 나아갈 때 삶의 지평은 넓어집니다. 익숙한 길로만 다니지 말고 새로운 길을 걸어보십시오. 받는 사랑에만 익숙했거든 이제는 주는 사랑을 실천해 보십시오. 모으는 일에 익숙해졌거든 이제 나누는 일을 시작해 보십시오. 섬김을 받는 것이 익숙하다면 이제는 섬기는 일을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우리 삶에 균형이 잡힐 것입니다.


위계질서에 대한 숭배

우리 속의 어린이가 숨어버린 후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위계질서에 대한 숭배입니다. 새들의 세계도 서열이 뚜렷해서 모이를 먹는 순서가 있답니다. 그걸 'pecking order'라고 한대요. 쪼는 순서란 말이지요. 어른들은 누구를 만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에 서열을 정합니다. 대개 나이, 사회적 지위, 학벌, 체격 등이 중요한 척도가 됩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서열이 낮은 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하고, 서열이 높은 사람 앞에서는 꼬리를 사립니다. 이게 권위주의의 뿌리입니다.

우리 사회에 진정한 대화가 없는 까닭은 서열을 지키려는 무의식적인 동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견해나 글을 반박하면 그 사람은 버릇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힙니다. 그리고 그 집단의 질서를 무너뜨린 사람이라 해서 왕따를 당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할 소리도 못하면서 왜소해져 갑니다.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다는 것, 이게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위기입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가장 어른들을 존경하지 않는다고 통계를 보고 큰 일이라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항상 이익 원리에 따라 처신하는 어른들을 보면서 존경을 철회해 버린 겁니다. 어떻게 보면 피해자는 그들입니다.

이익 원리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원칙에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린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가 있어 세상은 유지됩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면서 모두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아름다운 옷이라고 칭찬할 때, 오직 어린아이 하나만 깔깔 웃으면서 '임금님은 벌거숭이'라고 외쳤습니다. 헛된 권위에 집착하는 사람은 참된 권위 앞에 무릎을 꿇지 못합니다. 자꾸만 우리 속의 지배욕을 지워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제자들에게 랍비·아버지·지도자 소리를 듣지 말라 했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다 하셨습니다.


예수라는 어린이

다시 한번 말합니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어린이가 깨어나야 제대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흉포하고, 부패한 세상은 어린이가 쫓겨난 세상입니다. 참 속상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보고 혀를 차고, 서로 손가락질을 해댑니다. 하지만 우리는 원망하고 탄식하라고 부름 받은 사람이 아니라, 고치고 싸매고 새롭게 하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길입니다.

그런데 점잖으신 그 시대의 어른들은 예수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어린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죄인들과도 잘 어울리고, 온 세상 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약동하는 생명을 보고,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어린이 예수, 그 예수는 추문거리였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십니다. 진리는 오직 예수님께 마음을 여는 어린이 같은 사람들에게만 계시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우신 뜻입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왔든 이제는 돌아가 기본을 다시 세울 때입니다. 신뢰가 무너진 세상, 어린이가 사라진 음란하고 타락한 세계에 어린이가 돌아와야 합니다. 세상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고, 낯선 사람들과도 잘 사귀고, 토라졌다가도 곧잘 화해할 줄 알고, 창조적이고, 영적인 어린이 말입니다. 터진 웅덩이처럼 물을 담지 못하는 우리 사회를 사랑으로 고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구름이 제 아무리 짙어도 우리는 구름 너머에 있는 태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비록 부패하고, 흉포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소망의 근거입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