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9. 집착을 여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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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눅2:41-52
설교일시 200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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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을 여읜 사랑
눅2:41-52
(2002/5/12, 어버이주일)


요즘 자식들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한 부모가 많습니다. 어제 일자 한겨레신문의 4단 짜리 만화는 이러한 세태를 신랄하게 꼬집고 있습니다. 눈가에 근심이 가득한 미주알씨가 뒷짐을 진 채 서성거립니다. 그러다가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기 동료에게 말을 건넵니다. "자식 서랍 열기가 겁난대." 그리고 삼단에는 아들의 책상 서랍에서 돈 다발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당황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옵니다. 마지막 단에는 어느 가난한 아버지가 아들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가 "카드 빚 수백 만원"이라고 쓰인 종이를 보고는 졸도할 듯 놀라고 있습니다. 이걸 보고 이 땅의 부모님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어지간하면 자식들 책상 서랍은 열지 마십시오."

웃을 일이 별로 없는 세상인데, 저는 며칠 전 신문을 보다가 한참 웃었습니다. 『집으로』라는 영화에 출연한 71세의 김을분 할머니가 대종상 신인상 후보가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영화를 본 관객이 전국에서 300만 명을 넘어섰다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하면서도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기가 어려웠습니다. 시골에서 조용히 사시던 할머니가 졸지에 신인 여우가 되었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이 영화에 몰리는 이유는 뭘까요?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요, 우리는 뭔가 가장 소중한 것을 잊고 살고 있어요. 그건 거룩한 소명(聖召)으로서의 가정입니다. 가정은 교회 못지 않게 세상에 있는 성소(聖所)입니다.


聖召, 聖所

가정은 사랑에 바탕을 둔 참된 삶의 일치를 배우는 곳이라는 점에서 거룩한 곳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 가정에서 경험한 정서적, 종교적, 문화적 분위기는 일평생 우리 삶의 기본 정조를 이룹니다. 따뜻하고 수용적이고 개방적인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정서적인 안정감이 있습니다. 일등, 일등을 외치는 세상이지만 꼴찌조차 사랑 받는 곳이 가정입니다. 만일 아이가 꼴찌이기 때문에 사람 취급받지 못하는 집이라면 그건 가정이 아니지요. 꼴찌조차 귀한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곳이기에 가정은 거룩한 곳입니다.

가정은 또한 아름다운 삶의 모범을 보는 곳이라는 점에서 거룩한 곳입니다. 극심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청소년들은 부모와 형제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치관을 형성해갑니다. 검소하게 살면서도 어려운 이들과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부모, 평소에는 봄바람처럼 부드럽다가도 불의 앞에서는 사자와 같고, 작은 이익에 양심을 팔지 않고, 지름길을 마다한 채 삶의 원칙들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도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자기 삶의 중심을 잃지 않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기 길을 묵묵히 가게 될 겁니다.

또 가정은 가장 약한 사람이 가장 소중히 여김을 받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거룩합니다. 병든 부모를 극진히 모시는 분들을 보면 저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들이라고 힘든 순간이 왜 없겠어요. 그래도 그분들은 묵묵히 그 일을 감당합니다. 보상을 바라기 때문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그러는 거지요. 고래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고래의 행태 가운데 우리 인간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데가 있다고 말합니다. 고래들은 거동이 불편한 동료를 결코 나 몰라라 하지 않는대요. 학자들은 다친 동료를 여러 고래들이 둘러싸고 거의 들어나르듯 하는 광경을 여러 번 보았다고 합니다. 그물에 걸린 동료를 구출하기 위해 그물을 물어뜯기도 하고, 다른 동료와 고래잡이배 사이에 뛰어들어 사냥을 방해하기도 한답니다. 고래는 물 속에 살지만 허파로 숨을 쉬는 젖먹이동물인데, 부상을 당해 움직일 수 없게 되면 물 위로 올라와 숨을 쉴 수가 없게 되므로 쉽게 목숨을 잃는다는군요. 그런 친구를 등에 업고 그가 충분히 기력을 되찾을 때까지 떠받치고 있는 고래의 모습이야말로 가정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싶어요.

아름다운 가정은 생명을 낳고, 기르고, 보살피고, 지지해줌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예표가 된다는 의미에서 거룩합니다. 가정은 '살림의 공동체'입니다. 가족 구성원들 모두가 서로를 북돋워 살리는 역할을 할 때 그 가정은 거룩한 성소라 할 수 있겠습니다. 거룩한 성소의 중앙에는 사랑의 나무가 자라야 합니다. 사랑만이 생명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집착을 여읜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을 하되 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색으로 아이들의 삶을 마구 칠해버리면 안 됩니다. 나의 틀 속에 아이들을 꼭 끼워 넣으면 아이 속에 있는 '천재'는 죽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사랑이라는 美名下에 자행되는 폭력이고 범죄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제도 속에 밀어 넣는 이유는, 그래서 세상이 울리는 북소리에 발맞추도록 강요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 아이 혼자 뒤떨어지는 것 아닌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우리가 뭔가를 잊고 있기에 생기는 일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기도 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 아이들에 대해서 가장 잘 아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관심이 많다는 사실 말입니다.


복사판으로 살 것인가, 원판으로 살 것인가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열 두 살 되던 해에 부모님을 따라 예루살렘 순례에 나섰다가 부모와 떨어져 성전에 남았던 일화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그 화려하고 장엄한 종교 축제에 상당한 감명을 받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엄마 아버지가 자리를 뜬 것도 모른 채 선생들과 토론에 열중했겠지요. 근심에 가득 차서 왔던 길을 더듬어 성전까지 다시 온 요셉과 마리아는 떡심이 다 풀렸을 겁니다. 그런데 아이를 잃어버려 사색이 다 된 자기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너무나 태연합니다. 마리아는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짐짓 엄격한 어조로 꾸짖습니다.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소년 예수의 대답이 참 의외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당혹스러운 대답입니다. 소년 예수는 자기가 사사롭게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지만, 공적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존재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일종의 독립 선언이라 해야 할까요? 요셉과 마리아가 수다스런 부모였다면 어쩌면 땅바닥에 퍼질러앉아 "아이고, 자식이라고 다 키워놨더니 하는 소리 좀 보소" 하면서 눈물바람을 했을지도 모를 순간입니다. 우리 아이한테 "너 같으면 어떤 반응을 했겠니?" 하고 물었더니, 자기 같으면 "그래, 그러면 너 여기서 살아라" 할거래요. 그런데 성경은 요셉과 마리아의 반응에 대해서 일언반구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볼 때, 늘 그렇게는 안되겠지만 가끔은 '이 애가 나를 통해 이 세상에 오기는 했지만, 기실은 하나님의 자녀이지' 하고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그들의 생명이 더 큰 생명이신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해야 그들을 더욱 존중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사실을 부모들에게 상기시켜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모두 고유한 존재의 이유를 가지고 왔습니다. 나와 똑같은 사람은 이 우주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복제인간이 나온다면 모를까요.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그래서 우리는 원판이지 복사판이 아니라고 했어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복사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남이 뭘 사면 나도 사야 하고, 남이 뭘 먹었다 하면 나도 먹어야 하고, 남이 애들 학원에 보내면 나도 해야 하고……. 그러니 삶은 바빠지고, 바쁜 데 반비례해서 행복감은 줄어드는 거지요. 기가 막힌 것은 아이들도 바쁘다는 것입니다. 한눈 팔 겨를도 없이 궤도를 따라 죽자 하고 뛰는 아이들을 보면 불쌍해요. 아이들이 바쁘니까, 부모들은 아이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해줍니다. 그러니 사람답게 사는 방법, 즉 공동체 속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몸으로 익혀야 할 일들을 소홀히 하게 되지요. 제발 공부만 시키지 말고, 아이들도 가정에서건 교회에서건 자기 몫의 일을 하게 하세요.


나사렛의 성 가족

저는 소년 시절의 예수에 관한 일화를 마감하는 성서 기자의 이야기 솜씨에 놀랍니다.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내려가 나사렛으로 돌아가서, 그들에게 순종하면서 지냈다.
예수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부모와 자식간에 있음직한 아름다운 관계는 이 간결한 두 마디 말로 넉넉히 표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나사렛의 이 거룩한 가정에 깃든 평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 가정에는 하늘 아버지의 뜻을 가슴에 새기고 살지만, 자신을 있게 해주신 부모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겸손하고 온유한 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사렛의 그 가정에는 이해할 수 없는 아들의 말과 행동조차도 지극한 사랑과 염려와 관심 속에서 바라보는 자애로운 어머니가 있습니다. 아들이 걷는 수난의 길이 마음 아파 때로는 울기도 하지만, 결코 그 길을 가로막지 않는 믿음의 어머니가 있습니다.

또 나사렛의 그 가정에는 그곳에 있으면서 말없이 온갖 존재를 껴안고 있는 산처럼 고요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들은 각자 독립적인 존재이면서도, 거룩한 사랑 가운데서 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서로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상대방을 조정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지극히 사랑하지만 서로에 대한 집착의 끈을 조금씩 잘라내면서 그 가족은 더 큰 사랑의 세계를 열었습니다. 나와 내 가족만을 사랑하는 작은 사랑은 세상에 많은 분리의 담들을 만듭니다. 하지만 더 큰 사랑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 그 담을 조금씩 허물 때 우리는 그 거룩한 가족의 일원이 될 것입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