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20. 사로잡힌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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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행2:14-21
설교일시 2002/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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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잡힌 영혼
행2:14-21
(2002/5/19)


카이로스

신학교에 다니던 시절 저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가지고 꽤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믿음 좋은 사람은 아니었어요. 교회는 빠지지 않고 나갔지요. 봉사할 일이 있으면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기도 했구요. 공부도 나름대로는 꽤 진지하게 했어요. 그래도 '나는 믿음의 사람인가?' 하고 물으면 확고하게 '아멘' 할 수가 없었어요. 믿음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저는 예수님이 참 좋았어요. 그분처럼 살고 싶었어요. 나는 할 수 있는 한 내 손을 뻗어 진리를 손에 쥐고 싶었어요. 하지만 애를 쓰면 쓸수록 왠지 진리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웠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그의 말이 내 속을 확 뚫고 지나갔어요. 그는 "믿음이란 궁극적인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Faith is the state of being grasped by ultimate concern)라고 규정했어요. '아, 믿음이란 내가 의지적으로, 능동적으로 뭔가를 하는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궁극적 관심이신 하나님에게 확 사로잡히는 것이로구나. 그러니까 믿음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구나.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이구나.' 이렇게 깨닫고 나니까 가슴이 후련해졌어요.

그런데 사로잡힌다는 것은 우리가 임의로 조작할 수 없는 거예요. 첫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이 '오늘은 누구를 만나든 사랑할 거야' 하고 결심하기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잖아요? 딱 그날이 오는 거지요. 그걸 성경에서는 '카이로스'라고 해요. 카이로스는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시간, 그래서 뭔가 영원한 것이 태어나는 순간이에요.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가끔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 그러시잖아요? 주님은 그 때를 기다리면서 사셨던 것이지요.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났던 그 결정적인 시간을 만나기 위해 그렇게 먼길을 헤맸던 거예요. 존 웨슬리 목사도 성령의 뜨거움을 체험했던 올더스게이트의 그 거리에 당도하기 위해 그렇게도 먼길을 에둘렀던 거구요. 그런데 역사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사로잡힘의 사건이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나타났어요.


골방에서 세상으로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그 광경을 상당히 시청각적으로 전해줍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었다" 합니다. 하나님의 숨이 그들 가운데 세차게 불어온 것입니다. 아담의 코에 불어넣어졌던 그 숨, 에스겔이 보았던 마른뼈의 골짜기에 불어왔던 그 숨, 그 바람이 골방에 틀어박혀 있던 제자들에게 불어온 것입니다. 또 불의 혀 같은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했다고 하지요? 하얗게 재로 변한 그들의 희망이 바야흐로 다시금 불타오르는 순간입니다. 그 불은 사람이 피운 것이 아니기에 꺼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밖으로 나가 외쳤습니다. 당신들이 미워하여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성령이 대체 그들 속에 어떤 변화를 일으킨 것일까요?


성령이 하시는 일

첫째, 성령은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확증해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오랫동안 다녀도 바람 빠진 타이어처럼 맥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까닭은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확신은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주어져야 해요. 오직 성령이 우리 가슴에 임해야만 우리는 참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요. 제자들은 예수 곁에 3년이나 머물렀지만 그분이 주님이라는 내적인 확신에까지 도달하지는 못했어요. 그러나 성령을 체험하고 나니까 모든 것이 확실해졌어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했는데, 주님의 이름을 그냥 갑돌이, 갑순이를 부르듯이 부른다고 구원을 얻겠어요? 그렇지는 않지요. 의심 많은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는 깊은 경외심에 사로잡혀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 하고 주님을 불렀어요. 그러니까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분을 내 삶의 주인으로 확고하게 모신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죽으라시면 죽고, 살라시면 사는 겁니다. 어렵다구요? 성령이 우리 속에 임하시면 어렵지 않습니다.


둘째, 성령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줍니다. 요한복음은 성령을 '保惠師'라고 하는데요, '보'는 보장한다는 뜻이고, '혜'는 은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공짜로 주어지는 겁니다. 돈을 주고 사거나,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에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도들이 그곳에 가서 사람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자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는 아주 매혹되었어요. 그것은 세상의 어떤 마술보다도 멋져 보였던 것이지요. 그는 사도들에게 돈을 주면서 자기에게도 그런 권능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베드로의 준열한 꾸짖음을 듣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행8:20). 만일 어떤 사람이 치유의 은사를 받았는데, 사람들을 고쳐준 대가로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시몬의 운명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화천에 가면 수맥을 잘 보는 목사님이 한 분 계신 데 그분은 사람들이 부르면 언제라도 달려갑니다. 그런데 그분은 결코 사례를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인데, 그걸 가지고 돈벌이를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거저 주십니다.

'보혜사' 할 때, '사'는 선생님이라고 했지요? 선생님은 가르치는 분이에요. 실력 없이는 가르칠 수가 없는 법인데, 성령은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를 정확하게 가르쳐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도 공급해 줍니다. 대단한 선생님이시지요. 그런데 왜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지 않나요? 그것은 자기 실력을 과신하기 때문이에요. 이 말은 달리 말하면 하나님에 대해 신뢰하지 못한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이들은 믿음을 통해 이해에 이르게 되는 아주 소중한 배움의 길을 포기하는 거예요. 그들은 자기 경험과 생각에만 의존해요. 우리가 성령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산다면 그분이 하라고 명하시는 일이 다소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그대로 순종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 우리가 커져요.

셋째, 성령은 신명난 삶을 살게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은 맥없이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울한 표정으로 살지 않습니다. 때로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어려움을 즐길 줄 압니다.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보십시오. 성령에 충만해지면 우리의 아들딸들은 예언을 한 대요. 여기서 예언을 한다는 것은 앞일을 알아맞춘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서 살아간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불의한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뛰어든다는 말입니다. 성령에 충만한 젊은이들은 비전을 품고 살게 됩니다. 그들은 죽을 상을 하고 살지 않습니다. 현실이 아무리 힘겹고 괴로워도 그들은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습니다. 노인들이 성령에 충만하게 되면 꿈을 꾸는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서 꿈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나르는 도구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에 충만한 노인들은 세상일에서는 뒷전으로 물러났을는지 몰라도, 하나님의 구원사의 소중한 일꾼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감사히 여기면서 신명나게 살아갑니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성령은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엘리트들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사모하는 모든 이들에게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엘리트적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은 다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자기가 세계사의 흐름을 뒤바꿔놓게 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성령에 사로잡히게 되었을 때 그들은 역사 변혁의 누룩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때때로 평화 없는 세상,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을 보면서 한탄을 합니다. 전문가들과 지도자들의 무능과 부패함을 비판합니다. 그러면서도 한번도 자신이 그런 세상을 바꾸는 일에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순간 상황은 달라집니다. 세상의 부패를 막아야 할 책임이 내게 있고, 세상을 아름답게 할 책임도 내게 있다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일에 뛰어듭니다.

세상을 바꾼다니까 너무 거창하게 들립니까?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일은 아주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촛불 하나를 밝혀들면 세상은 그만큼 밝아집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는 자신이 하는 일은 갠지스 강에서 물 한 컵을 덜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강물은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자기의 작은 노력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언젠가는 분명히 성취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령강림절인 오늘 우리 모든 성도들이 성령의 은혜에 사로잡히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변혁의 누룩이 되고, 어둠을 사르는 불꽃이 되고, 세상을 정화하는 소금이 되고, 욕망으로 질척거리는 이 세상에 거룩한 삶의 씨앗이 되는 평화의 일꾼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