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22. 여호와닛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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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출17:8-16
설교일시 200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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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닛시
출17:8-16
(2002/6/2)


위기 앞에서

히브리인들이 예속의 땅 애굽을 벗어나 자유의 새 땅을 향하는 길목에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 군대의 다급한 추격으로부터 벗어냐야 했고, 홍해 바다를 건너야 했습니다. 추격을 벗어났다는 감격도 잠시일 뿐, 그들은 마실 물이 없어 고생했고,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음식이 떨어졌을 때 굶주림의 공포를 견뎌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치러야 할 대가가 많았습니다. 자유로 향하는 여정은 그렇게 쉽게 끝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힘있는 이들의 폭력과 간섭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분홍빛 꿈은 광야의 모래 먼지 속에서 하얗게 사위어가고 그들에게는 생존에 대한 노골적인 공포만이 남았습니다. 과연 우리가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이 떠오르면서 그들은 비루한 본성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작은 어려움조차 크게 느꼈고, 위기가 닥쳐오면 쉽게 지도자들에게 화살을 돌렸습니다.

르비딤에 장막을 쳤을 때도 그들은 마실 물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모세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호렙산 반석을 치면 샘물이 솟구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모세는 백성의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반석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해서 목마른 이들의 마른 목을 축이게 했습니다. 백성들은 비로소 하나님이 그들 중에 계심을 알았습니다. 시나이 반도 일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아말렉족이 싸움을 걸어온 것은 그때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소중히 관리하고 있던 샘터와 오아시스, 그리고 목초지를 빼앗길까 두려워 이스라엘을 몰아내려 한 것입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내부적인 불평을 잠재우는 데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외부로부터의 공격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켜야 하는 책임을 떠맡게 되었습니다. 홍해를 건넌 후에 이스라엘이 맞이한 최대의 위기였습니다.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사활이 걸려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지팡이를 굳게 잡고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군사들을 가려 뽑아서 내일의 전투에 대비하라면서, 자기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겠다고 합니다. 모세는 스스로 전투에 나가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혈기로 사람을 쳐죽이는 젊은 날의 그 모세가 아닙니다. 열정 하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치기어린 젊은이가 아닙니다. 그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압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합니다. 여기서 모세가 손에 잡겠다고 말한 지팡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상징합니다. 모세는 애굽의 술객들과 대결할 때에도 그 지팡이를 들고 있었습니다. 호렙산의 반석을 쳐 물이 솟아나게 한 것도 그 지팡이입니다. 그는 산꼭대기에 서서 그 지팡이를 두 손으로 쳐듭니다. 그가 붙들고 있는 것은 그저 오래된 나무 막대기가 아니라, 그를 해방전쟁에 뛰어들게 만든 하나님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간디는 眞理把持運動을 주창했습니다. 진리를 든든히 붙잡는 것만이 참 삶의 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산 위에서 붙잡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백성들은 주저없이 전투에 임했습니다. 마실 물 때문에 하나님께 불평을 터뜨리고 그분을 시험하던 그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함께 하심을 경험했기에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나갔던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의 믿음이 성장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전투 상황을 상세히 보도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와 백성들의 무용을 전하지 않습니다. 카메라로 이 대목을 담는다면 초점은 산꼭대기에 손을 높이 들고 있는 모세에게 맞춰져있고, 산밑의 전쟁상황은 보일 듯 말 듯한 배경으로 처리될 것입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피곤하여 손이 쳐지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전쟁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처럼 보이지만, 출애굽기의 기록자는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사실을 도드라지게 드러내고 싶은 것입니다. 모세의 팔이 내려갈 때마다 이스라엘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때 모세를 수행했던 아론과 훌은 넓적한 돌을 가져다가 그 위에 모세를 앉히고 양편에서 모세의 팔을 붙들어주었습니다.


동역자

여기서 우리는 아주 아름다운 지원공동체의 모습을 봅니다. 아론과 훌은 자기들이 역사의 주역이 아님을 압니다. 모세에 대해 시기심을 갖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조역에 만족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백성에게 임하는 것이지, 누가 그 일의 통로가 되었느냐가 아님을 인식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위대한 영적 지도자였고, 강철같은 신념의 소유자였지만 그도 인간이었기에 때로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 그의 곁에 아론과 훌이라는 동역자가 있다는 사실은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동역자란 '멍에를 함께 멘 사람'을 뜻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도 동역자를 필요로 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앞두고 삶과 죽음의 문지방에 서있던 주님은 제자들이 기도로 당신을 도와주기를 원하셨습니다. 바울은 그가 로마서 16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소중한 동역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처럼 위대한 일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배가 항해하기 위해서는 배를 띄워주는 물이 필요하듯이, 우리가 경험하는 위대한 역사는 '중심'을 든든히 붙잡고 선 진실한 한 사람과 그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었던 동역자들이 함께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토인비는 역사가란 물결을 따라 흘러가는 배의 돛대 끝에 올라가서 물결을 살피는 존재라고 했는데, 교회에서 목사의 역할도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뜻을 예민하게 살펴서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목사는 직접 전투의 현장에 직접 나가 싸우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성도들을 잘 인도하고 그들의 거룩한 삶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간구하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팔이 밑으로 쳐졌던 것처럼, 목사도 때로는 영적으로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필요한 이들이 아론과 훌입니다. 말없이 다가와 지친 팔을 거들어주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생은 탄력을 받게 마련입니다. 저는 감히 모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한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영적인 싸움터에서 밀린다면 그것은 나의 불성실함 때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소비주의, 권위주의와의 싸움

여호수아와 그의 군사들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심을 확신하면서 아말렉과의 전투에 용감하게 임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의 배후를 노리는 영적인 아말렉과의 전투에 나서야 합니다. 진정한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 영적인 아말렉은 무엇입니까? 너무 지나친 단순화처럼 들릴는지 모르지만 저는 그것을 '소비주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쓰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라는 그럴듯한 속삭임이 우리의 영혼을 흐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물건이 늘어날수록 정신의 힘은 약해지게 마련입니다. 영적인 성장은 단순한 삶과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 하셨는데, 청결한 마음은 조촐하고 소박한 삶을 선택하지 않는 한 얻을 수 없습니다. 고즈넉한 달빛을 즐기기 위해서는 등불을 꺼야 하고, 솔숲을 스쳐오는 청풍에 귀를 기울이려면 라디오를 꺼야 합니다. 인생은 돈 없이도 누릴 수 있는 것이 많은 데 사람들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만 귀한 줄 알고 삽니다. 이게 다 영적인 아말렉입니다.

또 다른 영적인 아말렉으로 나는 '권위주의'를 들고 싶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매우 권위주의적인 속성을 가지고 삽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長幼有序'의 '尊長倫理'를 내면화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어른과 아이는 똑같이 존엄한 존재이고,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무조건 어른들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어른의 견해와 배치되는 의견을 또박또박 이야기하면 '버르장머리없는 놈'으로 낙인찍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사람들을 서열화하고 그 서열에 따라 반응을 하는 일에 매우 익숙합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성숙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권위주의는 다른 말로 하면 '지배에의 욕망'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는 지배관계가 뒤집힌 곳입니다. 으뜸이 되려는 사람은 모든 이의 종이 되는 세상, 主요 스승인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는 세상, 세상에서 못나보이는 사람들이 천국의 주인이 되는 세상 말입니다. 권위주의적인 문화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는 점잖치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이 '술꾼에 먹보, 세리와 죄인의 친구'입니다. 우리 속에 내면화된 권위주의와 싸울 때 우리는 영적인 삶의 문턱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산꼭대기에서 손을 들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원하고, 아론과 훌은 동역자가 되어 그를 돕고, 여호수아는 전쟁터에서 전투를 수행함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은 성취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말렉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그곳에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쌓고 그 제단의 이름을 여호와닛시라 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깃발'은 신의 현존과 능력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닛시라는 이름의 제단은 그들이 거둔 최초의 승리가 자기들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출애굽기가 기록된 시기는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의 군사적 위협 아래에 있었던 주전 8세기경입니다. 이때는 이스라엘도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상무주의 정신을 북돋는 시대였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성서 기자는 승리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지원병이 되라

우리는 지금 영적인 아말렉과의 전투에 부름받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부름에 응답했던 사람들처럼, 영적인 전투에 지원병들이 되십시오. 주님은 지금 사람을 죽이기 위한 전투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한 전투,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기 위한 전투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살맛을 되돌려주기 위한 전투, 무기를 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드는 전투에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승리는 이미 우리 것입니다. 우리의 사령관이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우리 개개인은 약합니다. 홀로는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가 아닌 '우리'가 싸움에 나서고, 주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기에 우리는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해마다 우리 교회도 여호와닛시의 제단을 하나씩 쌓아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