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23. 잔치는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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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눅14:16-24
설교일시 200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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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는 시작됐다
눅14:16-24
(2002/6/9)


아름다운 열정

월드컵 열기 때문인지 초여름 날씨치고는 매우 덥습니다. 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첫 승리를 거두던 날 온 나라가 붉은 빛으로 넘실거렸습니다. 지방 선거가 코앞이지만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백주에 또 야밤에 거대한 집회를 가졌는데도, 경찰들이 별 시비를 걸지 않는 것을 보니 참 재미있습니다. 어느 젊은이의 말대로 6월 4일은 3.1독립만세운동과 8.15해방 이후에 온 국민이 하나되어 '대∼한·민·국'을 외친 날로 기록되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직장에서 반차(오후만 휴가를 냄)를 얻어 빨간색 셔츠로 갈아입고 흥분된 표정으로 잠실야구장으로 달려가는 젊은 교인을 보면서, '야, 젊음이 좋기는 좋구나'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어보니 우리 김철수 장로님도 서울역에 나가 응원 대열에 합류했다더군요. 가만히 계실 수가 없더래요. 최 모라는 우리 청년은 광화문에 나갔다가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옆에 있는 아가씨와 부둥켜안고 기쁨을 나눴다고 자랑하더군요.

저는 우리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이 폭발적 열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이 열정이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는 일에 집중된다면 대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바뀔까?' 우리 사회 내부에는 열정(pathos)이 있습니다. 국가가 경제 위기에 처하자 결혼반지로부터 아이들 돌반지까지 다 갖다 냅니다. 신명이 나면 못할 일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열정은 지속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소중한 일이라도 해도 지속되지 않는 한 진정한 변화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이성적인 사유의 힘인 로고스(logos)입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일쑤 음성이 높아지는 것은 감정이 이성적인 사유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는 축제가 부족합니다. 음주가무를 즐기는 것은 우리 민족의 유구한 전통입니다만, 그것은 소집단에 국한되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동참하는 축제의 문화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온 동네를 토마토 범벅으로 만드는 스페인 브뇰 지방의 축제이든, 신년을 축하하기 위해 사람들이 서로에게 물을 뿌려대는 태국의 송끄란 축제이든, 황소 떼를 풀어놓고 거리를 질주하는 축제이든, 거대한 천막을 쳐놓고 수만 명이 한꺼번에 맥주를 마시는 뮌헨의 10월 축제이든, 반라의 젊은이들의 춤을 추면서 거리를 행진하는 브라질의 리오 카니발이든, 축제는 한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고무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답답함과 스트레스를 일거에 한번 날려보는 것이지요. 사회가 부여한 숨막힐듯한 질서를 일시에 혼돈에 빠뜨리면서 인류가 잃어버린 어린이성을 회복해보는 것이지요. 자주면 곤란하겠지만, 일년에 한 두 번 정도는 삶에 아주 활력을 줄 것 같아요. 월드컵은 그런 의미에서 엄숙주의 윤리가 지배하고 있는 이 땅에서 벌어진 진정한 축제가 아닌가 싶어요. 하지만 그 속에 함몰되는 것은 곤란해요. 즐기되 너무 집착하지는 말아야지요. 화려한 축제의 이면에 있는 그늘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월드컵 기간 중에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노점상들이나, 일용직 근로자들의 아픔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축제는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말 겁니다.


잔치가 끝난 후에

최영미라는 시인은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시에서 가슴을 설레게 하던 만남이 지나간 후의 쓸쓸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이 시의 마지막 연은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는 말로 끝납니다. 회한을 남긴 채 삶은 계속되겠지만 그렇다고 신날 것도 없고, 울상을 지을 필요도 없지 않느냐는 말이겠지요. 나이 서른에 잔치가 끝났다고 하다니 참 괘씸하지요? 그런데 시인은 알고 있어요.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있다는 사실, 새벽이 오기 전에 사람들을 다시 부르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시인이 생각하는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제멋대로 이 구절을 해석해봅니다. 시를 읽는 즐거움 가운데는 誤讀의 즐거움도 있거든요. 우리 대신 상을 차리시고, 우리를 부르시는 분,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시는 분,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일상의 덫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마련하고 사람들을 청했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그 유력자의 초대에 기꺼이 응했습니다. 마침내 잔칫날이 되었습니다. 주인은 정성스럽게 상을 차리고, 손님들과의 즐거운 만남을 기대하며 약간 들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초대에 응했던 손님들에게 종들을 보내 마침내 그 날이 왔음을 알리라고 합니다. "오십시오.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초대받았던 사람들이 저마다 잔치에 갈 수 없는 사정이 생겼다면서 주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달라는 겁니다. 핑계야 그럴싸하지요. '밭을 샀으니 나가보아야 하겠다, 소를 샀는데 밭을 제대로 가는지 가보아야 하겠다, 나는 아내 곁에 있고 싶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변하자 마음도 변했던 것이지요. '할 일이 태산같은 데, 거기를 꼭 가야 되나?' 그들은 일에 치여서 함께 하는 축제에 동참하지 못합니다. 참 불행한 인생이지요.

우리는 일상 속에서 많은 초대를 받으며 삽니다. 그런 일 없다구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축제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손님으로 초대하셨습니다. 봄이면 피어나는 연초록 잎과 꽃들, 초록으로 무성한 숲, 밤하늘의 달빛, 하늘을 무심히 떠가는 구름, 넘실대며 바다로 향해 흘러가는 강물들이 우리를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미안합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 일이 끝나면 가지요" 하고 말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초대에 늘 마음을 연 채 살아가는 이들의 몫입니다. "불러만 주세요. 저는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천국은 과거에 매여 사는 사람이나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보하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신의 초대장으로 오는 사람들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신음하는 사람을 도운 사마리아 사람은 그 순간 하나님의 초대에 응한 것입니다. 장막 문 앞에 앉아 있다가 낯선 세 나그네를 보고 자기 집에 초대했던 아브라함을 기억하시지요?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이 그들을 초대한 것이 사실이듯이,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초대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앞에 지금 당도한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초대장을 가지고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차림새가 비록 남루하고, 그들의 말씨가 점잖치 못하다 해도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면 더더군다나 그는 하나님의 전령으로 온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필요에 응답함으로써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게 되는 거지요.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는 역사의 흐름도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는 일에 동참하라는 주님의 초대에 응할 때 우리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비롯한 유대의 지도층들은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전하는 잔치에 갈 마음이 없었던 것이지요. 어떠면 그것은 자기들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바꾸기 싫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들은 자기가 구축한 세계의 평온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나봅니다. 자기들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새롭게 시작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이게 그들의 불행입니다. 잘못된 길로 접어든 것이 분명하면, 원점으로 돌아가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걸음이 아깝다고 해서 그 길로 계속해서 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어요? 유대의 지도자들이 주인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을 때, 그 사회의 변방에 머물고 있던 이들이 초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거칠고, 무지하고, 교양이 없다고, 죄인이라고 따돌림 받던 사람들이 잔치의 손님이 되는 겁니다. 게다가 초대의 대상은 울타리 밖의 사람들, 곧 유대인들이 이방인이라 멸시했던 이들에게까지 확장됩니다.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

이것은 비유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 세상의 실상을 꿰뚫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잔치에 부름을 받았을 때 '네'라고 대답하며 달려가는 사람들은 대개 사회의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진 것이 없기에 그들은 자유롭게 주님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그래도 가진 것이 제법 있습니다. 또 해야 할 일도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부르실 때 하던 일을 버려두고 그 부름에 응답할 때 우리 삶은 축제가 됩니다. 강도 만난 이웃을 스쳐 지나갔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가던 길을 멈추지 못했기에 구원받을 기회조차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일상의 흐름을 끊을 수 있는 용기를 내야 우리 영혼의 힘이 자랍니다. 홍해가 딱 갈라지듯 우리 일상을 가르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초대에 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잔치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입니다. 기꺼이, 기대를 품고 그 자리로 나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흥겨운 생명의 잔칫자리에서 기쁘게 만나기를 바랍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