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24. 목에 칼을 대고라도
설교자
본문 잠23:1-8
설교일시 200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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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 칼을 대고라도
잠언23:1-8
(2002/6/16)


독버섯을 조심하라

선거가 있던 날 저는 미국 펜실바니아주에서 목회를 하시는 최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시집에 제가 해설을 붙인 인연으로 만났는데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주 깨끗하고 소탈한 느낌을 주는 분이었습니다.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마치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사람들을 만난 것처럼 대하셨습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서로의 글을 읽을 기회가 많이 있었는데 글의 인연이 그렇게 깊을 수 있을 줄을 저는 미처 몰랐습니다. "제가 눈물이 많아서요, 좋은 글을 만나면 그냥 하염없이 울어요." 참 예쁜 노인이셨습니다. 건강해 보이신다고 했더니, 시간만 나면 산에 가서 사신대요. 산 이야기 끝에 목사님은 17년 전부터 버섯의 생태에 대한 연구를 해오셨다면서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주셨습니다.

영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에 속하는 사람들은 버섯을 무서워하고, 프랑스나 다른 동유럽 국가 출신의 사람들은 버섯을 좋아하는 문화를 형성하고 있대요. 버섯 공부를 오랫동안 해서 이제는 버섯 중독자들에게 상담을 해 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대요. 독버섯을 먹고 탈이 난 사람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해오면 침착하게 묻는대요. "버섯을 드신지 얼마나 되셨어요?" "예, 한 시간 쯤 됐습니다." "아, 그러면 죽지는 않겠네요." 뭐 이런 식이지요. 인체에 치명적인 독버섯은 7-8시간이 지나야 중독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래요. 미국에서는 개들이 버섯 중독 증세를 보이는 경우도 많다네요. 그 까닭은 야생의 개들은 그러지 않지만 사람 곁에서 사는 개들은 무엇이든 눈에 보이는 것은 입에 넣고 보는 습성 때문에 그렇대요.


악인의 식탁에 앉지 말라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속으로 싱긋 웃었어요. 오늘 설교 본문으로 택한 구절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본문은 우리에게 높은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거든 그 기름진 음식에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합니다. 목으로 군침이 넘어가도 목에 칼을 대고라도 식욕을 억제하래요. 왜? 그런 음식은 대개 나쁜 동기에서 마련된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많이 봅니다. 나쁜 동기에서 마련된 식탁, 그것은 독버섯으로 마련한 성찬이 아닌가 싶어요. 먹으면 당장은 별 탈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나중에는 치명적인 해를 입히는 것이지요. 그러니 개처럼 아무 거나 입에 넣지 말아야 해요. 결국에는 다 토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으면 악인과 함께 머물지 않는 게 좋습니다.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 격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첫 대목이 무엇인지 기억하시지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1)


성도들은 하나님이 차려주시는 상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시편 23편 시인의 고백은 참 자유롭고 넉넉한 삶의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르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5)


나쁜 동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차려주는 상에 부득이 가게 되면 '목에 칼을 대고라도' 그 성찬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거기에 집착하는 한 하나님의 성찬에 대한 기대는 접어야 합니다.

우리 영혼이 가뿐하지 않고 무거운 것은, 우리 영혼이 화창하지 않고 다소 흐려있는 것은 탐심 때문입니다. 골로새서의 저자는 "탐심은 우상숭배"(3:5)라고 단언합니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12장 15절에서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 하셨습니다. 참 명쾌한 말씀입니다.


욕심의 포자를 제거하라

사람이 단지 탐욕스레 사사로운 욕심 채우기만을 생각한다면 굳셈은 사라져 나약하게 되고, 지혜는 막히어 어둡게 되며, 은혜가 변하여 원수가 되고, 깨끗함은 물들어 더럽게 되어, 일생 동안 쌓아 놓은 인품을 무너뜨리게 되리라. 그런 까닭에 옛사람은 욕심부리지 않음을 가지고 보배로 삼아 한세상을 초연히 지냈던 것이다.
人只一念貪私, 便銷剛爲柔, 塞智爲昏, 變恩爲慘, 染潔爲汚,
壞了一生人品, 故古人以不貪爲寶, 所以度越一世


『채근담』에 나오는 말입니다. 욕심은 독버섯과 같습니다. 한번 포자를 터뜨리면 왕성한 생명력으로 번져 나갑니다. 이전에 소중하게 여겼던 가치들은 던져버리고, 욕망의 굴레 속에서 허덕이게 만듭니다. 결국 욕망은 자기의 숙주를 망가뜨리는 것으로 끝장을 봅니다. 우리가 굳센 기상을 잃고, 마음이 어두운 것은 혹시 지나친 욕심 때문이 아닌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히브리의 지혜자도 말합니다.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찌어다. 한순간에 없어질 재물을 주목하지 말아라. 재물은 날개를 달고, 독수리처럼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4)


한 때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유행되었습니다. 부자 되는 것 싫어하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그 말을 하거나 들을 때 사람들의 표정은 밝습니다.『부자 아빠와 가난한 아빠』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멋지게 차려입은 꽃미남이 광고에 나와 "나는 부자 아빠를 꿈꾼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 대목에 대해서 시비를 걸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어떻게 부자 될 것이냐에 대해서는 우리가 반성적으로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획득한 '부'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는커녕 족쇄가 됩니다. 돈 문제는 참 풀기 어려운 인생의 문제입니다. 어떤 방정식이나 함수로도 잘 풀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단순화시켜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6:24) "네 재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마6:21) 하셨습니다. 지혜자는 우리에게 부자가 되려는 집착을 끊어버릴 슬기를 가지라고 권합니다.


자기 속도로 걸으라

그런데 이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못할 일도 아닙니다. 자기 속도에 맞춰 살기로 작정하면 됩니다. 성큼성큼 앞서가는 사람들 뒤통수만 보고 죽어라 달려가다 보면, 숨만 찰 뿐 살아있음의 기쁨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바쁜 이들이 있거든 먼저 가시라고 하고, 내게 맞는 보행법으로 걷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재물은 우리가 집착하면 할수록 날개 달린 독수리처럼 날아가버립니다. 어느 마을에 아주 욕심사나운 사람이 하나 살았어요. 그런데 그에게는 다른 사람을 꿰뚫어보는 눈이 있었대요. 그는 여행길에 어느 집에 가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그 집이 복 있는 집임을 단박에 알아차렸어요. 그래서 복을 훔치기로 작정하고 가만히 보니까 복이 수탉의 벼슬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말합니다. "어르신, 저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입니다. 그런데 집에서 기르는 수탉이 아무 때나 울어서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닙니다. 저 닭은 제 때에 잘 우는 닭 같으니 저에게 주실 수 없을까요?" 그러자 주인은 선뜻 허락합니다. 웬 떡이냐 싶어서 닭을 턱 품에 안았는데, 글쎄 이게 웬일입니까. 복이 닭의 벼슬에서 슬쩍 빠져 나오더니 시렁 위에 포개놓은 이불 밑으로 쑥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욕심쟁이는 어떻게든 그 복을 훔쳐가려고 이런 수단 저런 수단을 다 써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마침내 욕심쟁이는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고백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어르신의 복을 훔치려 했으나 복은 훔칠 수 없는 것을 오늘 알았습니다."

자기 분수를 알고 사는 게 복입니다. 자기 분수를 벗어나면 반드시 무리를 하도록 되어 있고, 무리함은 우리 속에 쌓여서 독이 됩니다. 그 독이 우리를 무너뜨리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너무 소극적인 인생을 권장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것은 분명히 죄입니다.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 달란트를 활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기 몸과 영혼을 해치고, 남들에게도 해를 끼치는 과도한 욕심은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오용하는 것입니다. 八分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배를 8할 정도만 채우라는 말입니다. 가득 찬 것보다는 항상 여백이 있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이 정도면 됐다' 하고 살아야 합니다. 과도한 기대와 욕망이 사람들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듭니다. 며칠 전 대학교수인 아버지와 할머니를 살해한 범인이 하는 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과도한 기대와,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멸시의 시선을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는 결국 그 사슬을 끊기 위해 존속살해를 저질렀고, 결국은 자기 자신까지도 파괴했던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약1:15)는 야고보의 말씀은 예나 제나 진실입니다.


목에 칼을 대고라도

살기 원한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준엄해야 합니다. 악인의 식탁에는 앉지 마십시오. 부득이 그곳에 갈 수밖에 없다면 목에 칼을 대고라도 탐욕을 다스리십시오. 죄의 유혹을 단칼에 베어버릴 용기를 내십시오.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귀를 기울이면 안 됩니다. 흥정이 시작되면 우리는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기 쉽기 때문입니다. 단호히 'no'라고 말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사탄이 차려놓은 잔치에 손님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둠의 행실을 끊어버릴 힘은 우리에게서 오지 않습니다. 해가 떠야 어둠이 물러나듯 우리 속에 하나님의 은총의 햇살이 환히 빛날 때 우리는 음습한 욕망의 사슬에서 풀려날 수 있습니다. 창가에 내놓은 화초들이 일제히 태양을 향해 손을 내뻗듯 우리가 전심전력하여 하나님을 바라볼 때 주님은 우리의 보호자가 되십니다. 탐욕을 끊음으로써 우리 영혼이 더욱 굳세지고, 마음은 더욱 맑아지고, 보행은 더욱 가벼워지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