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25.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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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19:23-25
설교일시 2002/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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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사19:23-25
(2002/6/23)


빙빙돌기

온 나라를 들끓게 했던 함성 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옵니다. 저는 멀리서 그 소리를 들으면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함성을 떠올렸습니다. 자유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은 압도적인 군사력이 아니라 백성들의 '소리'였습니다. 엿새 동안 침묵 중에 성을 빙빙 돌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레 째 되는 날 성을 일곱 바퀴 돌고는 제사장의 나팔 소리에 맞춰 일제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성은 마치 갑작스런 소리에 다리가 풀려버린 사람처럼 무너져내리고 말았습니다. 온 나라를 가득 채웠던 그 함성이 메아리조차 없이 공중으로 흩어져버리지 않고, 뭔가 창조적인 힘으로 바뀔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그것이 집단적 국가주의이든 집단 최면이든 우리는 하나될 수 있는 바탕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이 몇 주 동안 우리는 하나였습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쉬워하면서 서로를 얼싸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함께 무너뜨려야 할 벽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망국적인 지역감정, 분단을 고착화시키려는 세력들, 부패한 정치와 경제, 특권의식, 빈부격차 등 우리 사회의 통합을 깨뜨리는 온갖 것들을 가운데 몰아넣고, 빙빙 돌다가 함성 한번 질러 그것들을 무너지게 했으면 참 좋겠습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반쪽

이번 월드컵을 충분히 즐기면서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성대한 잔치에 북녘의 동포들이 동참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저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낙성식을 성대히 거행했던 느헤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생각해봅니다(느12장). 폐허가 되었던 예루살렘, 인적이 드물었던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주변의 온갖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든든한 성벽을 세워 봉헌하게 되었으니, 그 일에 동참했던 이들이 느꼈을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느헤미야는 제사장들로 성가대를 조직하고, 그들을 두 무리로 나눕니다. 그들은 각기 동으로 서로 갈라져서 성벽을 따라 가며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행진해갔지만 그들은 성전 뜰 앞에서 만나,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목소리를 합해 찬양합니다. 그것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던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회복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하나가 되었음을 고하는 것입니다. 언제쯤 되면 우리 민족에게도 이런 기회가 올는지요? 남과 북이 헤어져 걸어온 50여 년의 세월을 뒤로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됨의 기쁨을 노래하는 날 말입니다.

또한 축제의 열기 속에서 잊혀지고 있는 고통받는 이들의 현실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생존권을 보장받기 위해 단식투쟁을 벌이는 노동자들 눈물과 아픔, 저임금에 시달리는 제3세계의 여성들과 어린이들, 테러의 공포 속에서 떨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 그리고 전운이 감도는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반원을 그리며 이곳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반대편으로 출발한 사람들이 도착하지 않은 현실이 참 아픕니다.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 혹은 초대를 받고도 오지 못한 사람들의 아픔과 눈물을 헤아릴 줄 모른다면 축제의 뒤끝에 남는 것은 허전함일 것입니다. 함께 했던 이 소중한 체험들이 세상의 일치와 화해를 위한 동력으로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이사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막힌 담을 허는 사람들

이사야가 예언활동을 했던 주전 8세기는 에집트와 앗시리아가 그 지역의 패권을 다투던 험악한 시기였습니다. 그 두 슈퍼파워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했던 이스라엘은 아주 곤궁한 처지에 놓여있었습니다. 평화로운 공존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네가 사라져야 하는 긴장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언자는 그 속에서 평화의 가능성을 봅니다. 평화의 단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에집트에 있는 신자들 그리고 앗시리아에 있는 신자들, 그들이 곧 희망의 씨앗들입니다. 물론 그들에게는 사랑으로 받들어야 할 조국이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국가주의의 경계를 넘어 더 보편적인 일치의 터전이 됩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분쟁 속에서도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서있는 인간임을 잊지 않고, 우리 생명이 소중하듯이 다른 이들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평화를 기약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적대감정으로 꽉 막혀 더 이상 흐르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젖히라는 소명을 받고 있습니다.

부부싸움을 하면 입을 꾹 다문 채 몇날 며칠을 보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에게 정신적인 지옥을 만드는 일입니다. 싸우더라도 말을 하면서 싸우는 게 낫습니다.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침묵은 항복을 강요하는 것이기에, 피차 마음의 상처를 더 크게 만듭니다. 오고 감이 있어야 정분도 생깁니다. 이사야는 에집트와 앗시리아를 잇는 큰 길이 열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길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내왕을 하다보면 적대감정은 사라지고, 평화의 새 길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길은 애당초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걸어간 발자국들이 내는 것입니다. 너와 나 사이의 길이 열리고, 남과 북 사이의 길이 열리기 위해서는 잦은 교류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이산의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이 무려 17%나 된다고 합니다. 놀라운 수치입니다. 남과 북에 있는 이산가족들이 서로를 방문하는 교류가 활성화되면 통일의 길도 열릴 것입니다. 경제인들도 서로 교류하고, 문화도 교류하고, 스포츠도 교류하면서 길을 넓혀 가다보면 언젠가는 하나됨의 기쁨을 함께 노래할 날도 올 것입니다.


일치의 근거, 하나님

그런데 그런 하나됨의 근거는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그것은 이념이나 체제, 경제나 국방력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 치열한 각축의 시기에 이사야는 놀라운 소리를 듣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소리였습니다.

'나의 백성 에집트'
'나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
'나의 산업 이스라엘'

우리가 적대감정을 가지고 대하는 모든 이들이 다 하나님께는 소중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것 못지 않게 '그들'도 사랑하십니다. 이것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배타적으로 독점하기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평화롭게 공존하기를 원하십니다. 자연도 살아가기 위해 공생(symbiosis)의 지혜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꽃들은 꽃가루를 날라주는 대가로 위해 벌과 나비에게 꿀을 줍니다. 개미들은 진딧물을 날라다주고, 진딧물들은 개미에게 달콤한 넥타를 줍니다. 물론 자연에서의 이런 공생은 주고받는 이익이 없으면 깨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자연보다는 더 공생의 지혜를 발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크게 보면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일 수 있음을 인식할 수 있어야 철든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세계 중에 복이 되라

이사야는 에집트와 앗시리아와 이스라엘에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연대가 이루어내는 평화의 씨앗이 결국에는 세상에 복이 될 것임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고난과 시련이 많았던 우리나라가 발휘하는 공생의 지혜가 세계 평화를 위한 아름다운 모델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최근에 보여준 응원 열기를 보면서 비록 지역간, 정파간, 이념간, 세대간 갈등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근본적으로 한 뿌리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감정의 발산은 이만하면 됐습니다. 이제는 차분히 앉아 맺힌 것들을 풀어내는 슬기로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 사람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라고 초대받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가 머무는 곳마다 우리의 있음을 인해 일치와 화해와 평화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