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26. 중심을 잃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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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고전9:19-23
설교일시 200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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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을 잃지 말라
고전9:19-23
(2002/6/30)


스스로 종이 된 자유인

인류의 역사는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쟁취하려 하는 것도 자유를 얻기 위한 과정입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진술은 여러모로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먼저 우리는 자신은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았다는 진술에 주목합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어떤 가치도 자기 마음을 빼앗거나 뒤흔들어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유란 나에 대한 결정권이 오직 내게만 외부에 있지 않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본다면, 그는 철두철미하게 자기에게 속한 사람, 곧 자유인입니다. 돈도, 명예도, 권세도, 어떤 이념도, 어떤 사람도 그의 자유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자유인이 종이 됩니다. 남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택해서 말입니다. 참 자유란 자기의 삶을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니까 종이 될 자유도 자유는 자유입니다. 문제는 어떤 특정한 사람의 종이 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가 어린아이이든 어른이든, 파렴치한 사람이든 의인이든, 종교적인 사람이든 세속적인 사람이든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의 종으로 자처합니다.

왜일까요? 그는 한마디로 말합니다.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바울은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처럼 표를 얻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호려서 결국에는 자기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의 관심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만나 참된 자유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해 자기를 내놓는, 이런 큰마음을 경험한 적이 많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의 이 말을 매우 낯설게 받아들입니다.


버림에서 오는 큰 자유

스스로 종이 되기를 선택하는 이 큰 자유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참된 영적 자유는 먼저 '버림'에서 옵니다. 우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들, 아니 어쩌면 우리가 놓지 못하는 것들은 우리에게서 자유를 빼앗아갑니다. 성 어거스틴은 세상의 헛된 일로부터 벗어나오려고 할 때 옛날의 헛된 일들, 어리석은 일들이 육체의 옷자락을 붙들고 소근대는 소리를 듣습니다.

"우릴 버리고 갈 텐가?" "이제부터 그대와 있기는 영원히 그만이란 말인가?" "이제부턴 이것도 저것도 그대에겐 당치 않단 말인가?"

욕구하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정신은 헷갈리게 마련입니다. 정신의 힘은 자꾸 작별하는 데서 옵니다. 애욕과도 작별하고, 탐욕과도 작별하고, 집착과도 작별해야 우리 영혼이 강해지고 맑아집니다. 바울은 진리를 잡기 위해 다른 모든 것들과 작별했습니다. 두 손을 모으기 위해서는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아야 합니다. 찬송가 361장 2절 가사는 자유에 이르는 길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의 밝은 빛에 항상 활동하며 선한 사업을 힘쓰겠나
자유 얻으려면 주의 뜻을 좇아 너의 모든 것 희생하라
주의 제단에 산 제사 드린 후에 주 네 맘을 주장하여
주의 뜻을 따라 그와 동행하면 영생 복락을 누리겠네

참으로 명쾌합니다. '자유를 얻으려면 할 일은 하나 뿐이다. 너의 모든 것 희생하라'. 그러나 아무렇게나 자기를 내팽개치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의 뜻을 좇아' 그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원망이 생깁니다. 선한 일을 위해 돈도 내고, 시간도 내고, 수고의 땀도 흘리지만, 내면의 기쁨이 고갈되면서 곧 지치고 낙심한 끝에 그 일을 그만 두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선행도 '나의 뜻'에 따라서 하면 안됩니다. '주의 뜻'에 따라서 해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 오는 자유

개척 교회를 하는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는 목회적인 고민에 빠졌습니다. 교회 반주자가 정신 분열증 환자였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기회를 줌으로써 스스로 정신분열증의 터널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반주를 시킨 것인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조용히 묵상을 해야 하는 시간에 아주 신경질적으로 반주를 한다든지, 예배 중에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든지, 밀랍인형처럼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든지…. 오랫동안 교회에 나온 이들은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처음 나오는 이들에게는 매우 당혹스러운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교인들이 모여서 상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반주를 그만 두게 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계속 시켜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를 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교인들이 평안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도 기뻐하시겠지만, 정신적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그의 상처를 교우들 모두가 부둥켜안고 드리는 예배를 더 기뻐하시지 않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을 때 교우들은 그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주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일까요? 그 교인은 자기의 병을 인정하기에 이르렀고, 점차 평안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주의 뜻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길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그는 무수히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돌에 맞고, 모욕을 당하고,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쫓겨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도리깨질을 당함으로써 콩이 콩깍지 밖으로 튀어나오듯이, 고난은 그의 속에 숨겨져 있던 영적인 자유를 드러냈습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 소속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땅에 살고 있으나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어느 무엇도 그의 영혼을 뒤흔들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고난의 풀무 속에서 이미 죽은 사람인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그리고 미래에 대한 모든 불안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은 다른 이들과 그 자유의 열매를 함께 맛보고 싶어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가 사랑인 것은 이 때문입니다.


자유는 사랑

바울은 사람들이 복음이 주는 자유를 맛보게 해주려고, 그래서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해주려고 그들 곁으로 다가섭니다. 그냥 다가서지 않습니다.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는 자의 모습으로 다가섭니다. 율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 율법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율법에 대해 모르는 사람으로 처신합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약한 사람처럼 되어 다가갑니다. 마치 물이 담기는 그릇에 따라 모양을 바꾸듯 그는 여러 모양으로 자기를 변신시킵니다.

빈센트 반 고호는 젊은 시절 벨기에 남부의 보리나쥬라는 탄광촌에서 전도사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꿈을 안고 그곳으로 갔지만 사람들은 거듭되는 불행과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삶에 다가가려고 애를 썼지만 아무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젊은 빈센트는 크게 낙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연료로 사용할 석탄을 줍느라고 한 나절을 보내고 돌아온 저녁, 뜻밖에도 많은 광부와 그 가족들이 예배당으로 몰려왔습니다. 빈센트는 감동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힘차게 설교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겐, 모든 슬픔은 희망과 뒤섞여 있는 법입니다. 끊임없이 거듭 태어남, 끊임없이 암흑에서 광명을 향해 나아감, 그것밖에 없습니다." 예배를 마쳤을 때 한 부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그에게 말했습니다. "빈센트 전도사님, 저는 사는 게 하도 힘들어서 하나님을 잃어버렸었지요. 그런데 전도사님이 내게 하나님을 되돌려주셨으니 정말 감사합니다." 빈센트는 주민들의 이런 변화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몹시 놀랐습니다. 그들이 왜 자신을 하나님의 사도로 인정해주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올라가 거울을 보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닦는다고 닦았지만 그의 눈썹과 턱에는 석탄 가루가 묻어 시커맸던 것입니다. 그는 탄성을 지릅니다. "그렇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날 받아들인 거야. 마침내 나도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된 거야."

보리나쥬의 주민들이 빈센트의 설교를 귀담아 들은 것은 바로 입장의 동일함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입장의 동일함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을 자꾸 변신시켰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복음의 약화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그릇에 담기든 물은 물입니다. 바울은 술꾼들을 얻기 위해 술꾼처럼 된 것이지 술꾼이 된 것은 아닙니다. 죄인들을 얻기 위해 죄인처럼 된 것이지 죄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공자는 이것을 가리켜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 했습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잘 어울릴 줄 알지만, 그에게 동화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그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자기 중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 바로 그것이 그의 목표입니다. 같아짐이나 어울림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들을 자유의 길로 인도하려는 궁극적인 목표를 잃지 않았기에 그는 자기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된 자유를 맛보려면 내 것이라 생각하던 것을 그의 제단 앞에 내놓으십시오. 주님께 삶의 주도권을 넘겨드리십시오. 그리고 구원의 기쁨과 영적인 자유를 맛보거든, 그 기쁨과 자유를 나누어주기 위해 이웃들 곁으로 나가십시오. 한없이 자유롭지만, 너를 위해서 나를 버릴 수도 있는 자유인, 그것이 우리가 그리고 있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