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27. 산 돌로 지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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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벧전2:1-10
설교일시 200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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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돌로 지은 집
벧전2:1-10
(2002/7/7)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축구 대표팀이 월드컵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때,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히딩크 감독은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고 말했답니다. 그 말 한마디는 그의 결의와 목표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배가 고프다는 것은 결핍의 상태이고, 결핍은 채워짐을 지향합니다. 어머니는 제 친구들이 집에 오면, 찬이 없는 상이긴 하지만 언제나 밥상을 차려내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상머리에 앉으셔서 밥 먹는 우리들의 모습을 행복하게 바라보곤 하셨습니다. 밥공기가 거의 비어갈 즈음이면 밥을 더 덜어주시면서 '물 말아서 많이 먹으라'는 말과 함께 물을 부어주시곤 했습니다. 저는 그게 참 싫었습니다. 먹을 만큼 먹었으면 됐지 굳이 더 먹으라고 할 건 무엇이며, 또 왜 묻지도 않고 물을 붓는지 말이에요. 그러나 지금은 그게 배고픈 시절을 살아오신 어른들의 정 깊은 마음임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남의 밥그릇에 물을 붓는 무례는 범하지 않습니다. 세련되었습니다. 격식에 맞게 식사하는 법도 압니다. 우리는 지금 배가 불렀습니다. 이전에 비해 참 많은 것들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상한 헛헛증에 시달립니다.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물질을 위해 정신을 방치한 채 살아왔습니다. 앞만 보고 달리면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굳어진 마음, 모진 마음, 이기심뿐입니다. 우리 영혼의 집에는 잡풀만 무성합니다. 지붕은 무너지고, 문짝은 떨어져 덜컹거립니다. 그 쓸쓸한 영혼의 풍경으로부터 악한 마음, 속임수, 위선, 시기심, 남을 비방하는 말이 움터 나오고 있습니다. 퇴락한 고향집을 보며 눈물짓는 사람처럼, 우리는 우리 영혼의 풍경 앞에서 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기약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권합니다.


"갓난 아이들처럼 순수하고 신령한 젖을 그리워하십시오. 여러분은 그것을 먹고 자라서 구원에 이르러야 합니다."(2)


아기들을 옆으로 안으면 자동으로 고개가 가슴으로 돌아갑니다. 일단 고개를 좌우로 돌려서 젖이 제 자리에 있는지 확인한 후에는, 입맛을 다시면서 먹고 싶다는 의사 표현을 하더군요. 아기들이 욕심꾸러기여서가 아니라, 성장하려니까 젖이 필요한 겁니다. 엄마 젖을 먹는 아기들은 쑥쑥 자랍니다. 그런데 아기가 젖을 거부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성도들이 사모해야 할 젖,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면 우리 영혼이 커집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육신을 입지 못한 말씀은 우리 속에 쌓여 독이 됩니다.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시몬 베드로 일행은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눅5:5)


결과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다 망할 것 같지요? 더 높아지고 더 많이 소유하라고 악을 쓰는 세상에서 낮아지고 더 많이 나누며 살라하니 말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작정하고, 그 순간부터 하나님이 바빠지시는 거예요. 우리에 대해 책임을 지셔야 하니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순결하며, 그분은 그를 의지하는 사람의 방패가 되신다." 잠언 30장 5절의 말씀입니다.


살아 있는 돌로 지은 집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은 신령한 집을 짓는 일에 사용되는 살아 있는 돌이 됩니다.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려는 당신의 꿈에 우리가 동참하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는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신령한 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신령한 집'을 세우는 데 필요한 건축 자재는 '살아 있는 돌'이어야 합니다. 평화라는 집을 지으려는 데 불화의 벽돌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의 집을 지으려는 데 미움과 시기심의 돌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는 '신령한 집'을 짓는 데 필요한 '살아 있는 돌'인 예수님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으셨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살아 있는 귀한 돌입니다."(4)


참 소리는 귀에 쓰고, 거짓은 귀에 달게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참 소리이신 예수님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삶의 기반을 뿌리로부터 흔드는 지진과 같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기득권의 단맛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난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고난을 예고합니다. 예수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세상의 물결을 거스르는 일이기에 힘겹습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으셨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았다." 이것은 결정적인 말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시는 새로운 세상에 쓰임을 받는 사람들은 이처럼 진리를 위해 고난을 마다하지 않는 뚝심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살아 있는 돌'이라 합니다.

그들은 함께 이룬 '신령한 집'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입니다. 아니, 이제부터 '그들'이라는 복수 삼인칭 대신 '우리'라는 복수 일인칭을 사용하겠습니다. 신령한 집의 제사장은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롬12:1) 바울은 '몸'이라는 매개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 '지옥으로 가는 길은 좋은 의도로 포장되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잠언도 '게으른 사람은 손 하나 까딱 않고 포부만 키우다 죽는다'(21:25) 했습니다. 마음만 가지곤 안 됩니다. 몸이 따라야 합니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기 위해 지갑을 열어야 합니다. 억울한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그들 곁에 다가가야 합니다. 약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땀흘려야 합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드림과 채움

새 하늘과 새 땅의 전령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의 특징은 '드림'입니다. 우리의 손과 발, 눈과 귀, 그리고 물질과 시간을 주님께 드릴 때 우리는 세상의 인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의 과정을 '채움'으로 이해합니다. 우리가 기도 중에 사용하는 언어를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칭얼거리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뭔가를 끝없이 구합니다. 하나님도 참 피곤하실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사랑에 빠진 사람을 보세요. 그는 사랑하는 이에게 뭔가를 자꾸 주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자꾸 우리 자신을 그분께 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우리가 삶의 소중한 것들을 하나님께 자꾸 돌려드리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없나 살펴보시고 좋은 것을 채워주십니다. 신앙 안에서의 '채움'이란 '드림을 통한 채움'임을 알아야 해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전합니다. 자기 속에 기쁨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표정 관리를 하려고 해도 안되지 않아요? 웃음이 얼굴로 비어져 나오거든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 살아 있는 돌로 지은 신령한 집의 제사장이 된 사람들이 하는 일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9)


예수라는 살아 있는 돌과 만나, 살아 있는 돌이 된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그리고 넓은 의미의 교회는 성도들이 어깨를 겯고 이루어낸 신령한 집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집을 짓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아 인생의 집을 짓는 이들은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실패와 실수까지도 아름답게 사용하실 주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돌이신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에게 실패란 없습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