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28. 거룩, 공생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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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레19:9-18
설교일시 200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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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 공생의 실천
레19:9-18
(2002/7/14)


마음을 다해 살기

초복이 지나면서 날이 조금씩 무더워지고 있습니다. 음료수와 빙과류의 소비가 늘고 있다지요? 그런데 저는 음료수보다는 담담(淡淡)한 물을 더 좋아합니다. 뭔가 찡한 맛 속에는 이미 또 다른 갈증이 배태되어 있는 것 아닌가 싶어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같습니다. 일상의 삶과 동떨어진 뭔가 특별한 종교적 체험에 탐닉하다보면 일상의 삶에 충실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이 지향해야 할 생의 목표를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2)


거룩하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의 삶과는 좀 달라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쉰 듯한 목소리가 거룩한 목소리인가요? 쇳소리가 많이 들어가는 아무개 목사님을 닮은 어조라야 거룩한가요? 그런 것은 거룩과 아무 관계도 없어요. 거룩에 대한 잘못된 편견 때문에, 흔히들 '거룩한 분' 하면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으로 생각해요. '거룩'이란 추상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에요. 그것은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만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거룩은 거룩한 삶을 통해서만 표현되는 겁니다. 단적으로 말하지요. 일상의 현실을 떠난 거룩은 없어요. 성경이 말하는 거룩한 삶이란 매우 상식적이고 담담해요.

·'부모를 경외해라'. 그분들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우리를 이 땅에 있게 했으니까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이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의 삶 속에 시간의 성소를 만들며 살라는 말이에요.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보여드리고, 우리 삶을 하나님의 뜻에 비끄러매기 위한 시간을 마련하고 사는 것이 참된 삶이기 때문일 거예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라.' 타락이란 경외심을 잃어버리고 사는 삶일 겁니다. 삶에서 경외심을 잃어버리는 순간, 세상은 지루한 곳으로 변하고, 다른 사람들은 지옥이 되어 버립니다.
·'밥을 제대로 먹어라.' 밥을 먹는 행위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중인물인 조르바는 우리가 먹는 것이 무엇으로 변하는지를 말해주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겠다고 말합니다. 밥을 먹고 맨 개가 좋아하는 것만 만들면 곤란합니다. 그것으로 활동력을 만들고, 성숙한 인격을 만들고, 깊은 영혼을 만들 때 우리는 밥을 제대로 먹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간 정리를 해보지요. 결국 거룩한 삶이란 우리가 일상적으로 늘 하고 있는 것을 제대로 해내는 겁니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거룩한 삶은 우리가 습관적으로, 의무적으로 행하고 있는 일상의 일들을 '마음을 담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홀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니까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실천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도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웃에 대한 배려

성경은 그 첫째로 가난한 이웃들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희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희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19:9-10)


한마디로 말해 싹쓸이하지 말라는 거예요. 싹쓸이란 말의 울림은 참 음습합니다.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사탄의 논리에 현혹되지 말아야 해요. 굶주린 배를 부여안고 잠을 못 이루는 사람이 있는데, 혼자 부른 배를 두드리며 자리에 눕는 것은 죄예요. 왜 그런지 아세요?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아무리 내 이름으로 땅과 건물을 등기해놓아도 백 년도 안 되어 우리는 이 땅을 떠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이 땅에서 배고픈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라세요. 하지만 고르지 못한 인간 세상을 잘 아셨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를 해놓으신 거지요. 아무리 내 이름으로 등기되어 있어도 땅의 한 모퉁이는 가난한 사람들의 것임을 인정하고 살아야 해요. 우리 수입의 일부는 그런 이들의 몫임을 알고, 그들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 그게 하나님의 법이에요. 우리 조상들은 레위기를 읽지 않았으면서도 하나님의 법을 잘 알고 있었어요.

옛날에는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냈대요. 그런데 대보름 전날이면 마을 사람들은 아주 은밀한 행위를 했어요. '옷 걸이'와 '옷 따기' 행사가 그것인데요, 마을에서 형편이 좀 나은 집에서는 새 옷을 짓거나, 아직 한번도 입지 않은 새 옷을 마련해서 아무도 몰래 당집에 가져가서 걸어놓았어요. 그들은 남의 것을 훔치러 갈 때보다 더 조심스럽게 그 일을 했는데, 옷을 갖다 건 것을 자기 식구조차 모르게 해야 했대요. 그렇게 걸어놓은 옷은 또 가난한 이웃이 아무도 모르게 가져가서 입었어요. 이것을 "당집에서 옷 따다 입는다"고 하는 데요, 여기서 아주 감동적인 것은 옷 걸기를 한 사람이나 옷 따기를 한 사람이 다 그 해를 복되게 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은 참 소박하지만 흐뭇한 것이었어요. 그 일에 동참한 집은 가정이 화목하고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는 복을 받았대요.

이렇게 은밀하게 이웃을 돌보는 것, 하나님은 그것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이웃의 아픔을 함께 보듬어 안고, 그들을 격려하면서, 함께 살려고 할 때 우리는 공동체 속에서 거룩을 실현하는 겁니다.


신뢰의 공간 만들기

또 성경은 우리에게 도둑질, 속임수, 거짓말, 거짓 맹세를 그만 두라고 명합니다(레19:11). 이건 전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신뢰의 터전을 허무는 행위들입니다. 작년에 이탈리아에 갈 때 저는 그 나라에는 도둑이 많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밀라노 역에 내릴 때부터 제 눈에는 사람들이 다 도둑으로 보이더라구요. 우리가 만나는 사람 모두를 의심하고, 경계하면서 살아야한다면 저는 별로 살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 거짓말, 거짓 맹세, 속임수…이런 것들은 우리가 서있는 삶의 토대를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버려야 해요. 속이지 않는 것, 내 이익을 위해 거짓 맹세하지 않는 것, 이것이 거룩한 삶이에요.

힘이 좀 있다고 약한 사람을 억누르고, 높은 자리에 있다고 사람들의 것을 함부로 빼앗고, 사람들이 땀흘린 대가를 가로채는 것도 거룩한 삶에 역행하는 것입니다(레19:12-13). 교회에서는 경건한 신자처럼 보이는데, 직장에서는 폭군이고 착취자인 경우도 종종 있어요. 남이 누려야 할 몫까지 빼앗아 누려서는 안 됩니다. 지금 미국을 보세요. 그들은 아무도 그들에게 우리를 지켜달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세계 평화의 파수꾼을 자처합니다. 그들은 힘도 세고, 돈도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식으로 세상을 바꾸어 놓으려고 해요. 그게 소위 신자유주의라는 겁니다. 대체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요?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풍요의 축제를 즐기면서 복 받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어떤 목사님들은 미국은 하나님을 잘 믿어서 복을 받아서 잘산다면서 우리도 하나님 잘 믿어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과연 그게 福일까요? 오히려 禍가 아닐까요? 흑인을 구타하는 백인 경찰들 보셨지요? 이 땅의 어린 소녀들을 장갑차로 깔아뭉개고도 사과에 인색한 그들 보셨지요? 에른스트 블로호라는 철학자는 희망의 철학은 언제나 '나'라는 주어를 '우리'라는 주어로 바꾸는 것이라고 했어요. '나'의 욕망을 거스르면서 자꾸 '너'를 향해 나아가고, '너'를 위해 '나'를 바치는 삶, 곧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복 받은 삶입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멸시하거나 골탕먹이지 않고, 그들의 손발이 되어주려고 애를 쓰는 것이야말로 거룩한 삶의 또 다른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레19:14). 우리들 속에는 천사의 씨앗과 악마의 씨앗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을 골라 물을 줄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문제입니다. 장애우들은 우리의 이해와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줄 소중한 선물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과 깊이, 그리고 친밀하게 접촉하다보면 우리는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어울림의 삶

이렇게 보면 거룩한 삶이란 결국 다른 이들을 긍정해주고, 그들과 잘 어울려 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래서 거룩한 삶의 강령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19:18)


나와 생각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그를 나의 삶에서 배제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그가 정말 잘못된 길에 서있다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바로 잡아주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선택해야 할 아름다운 몫입니다. 여러분, 나 살기도 바쁜데 왜 남의 일에 마음쓰며 살아, 하고 반문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알아두십시오. 남을 위해 마음을 써주는 것이야말로 나의 문제로부터 벗어나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동사서독>>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구양봉이라는 인물은 자기의 고통 속에 갇혀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합니다.


"옛날에는 산을 보면 그 너머엔 뭐가 있을까 궁금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꿈을 잃어버린 사람의 적막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현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현실보다 조금만 더 멀리 바라보십시오. 그곳에 생명이 있고, 사랑이 있고, 이웃이 있고, 하나님이 계십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