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30. 너희도 서로 받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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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롬15:1-2, 7
설교일시 200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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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서로 받으라
로마서15:1-2, 7
(2002/7/28)


본문에 나온 한 대목을 택해서 제목으로 정해놓고, 가만히 보고 앉아있자니 우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받으라'는 말이 갖는 다의성 때문이었는데요. 물론 여기서 '받으라'는 말은 서로 용납하라는 말이겠습니다만, 사사건건 남의 말을 물고늘어지고, 툭하면 뜸베질하는 소처럼 이마를 들이대면서 대거리하길 좋아하는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성도들 가운데서 오늘의 본문을 혹시 그런 자기 행위의 성서적 근거로 사용하려는 분은 없겠지요.


믿음이 강한 자, 약한 자

바울 사도는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의 약점을 잘 돌보아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강한 사람은 힘이 세다거나, 돈이 많다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다는 말이 아니라, 확고한 믿음의 바탕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믿음이 좋다, 혹은 강하다 하면 여러분 누가 떠오르세요? 흐르는 물처럼 막힘 없이 기도하는 분인가요? 아니면 쇳소리를 강하게 넣어가면서 기도하는 분인가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인가요? 아닙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하루하루가 소중한 날임을 알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는 항상 자기의 삶이 누군가를 위한 선물이 되기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변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 결과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그 일을 이루실 분은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어떤 일이 자기 뜻대로 성취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나'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아직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자기의 욕망을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직 믿고 의지할 구석이 많아서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시골 할머니 이야기 아시지요?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뜨거운 신작로를 걸어가시는 데, 마음 착한 택시 기사가 차를 세우고 가시는 데까지 모셔다 드릴 테니까 타시라고 했대요. 할머니는 참 고맙다며 차를 타셨는데, 기사가 백 미러를 통해 보니, 할머니가 짐을 그저 이고 계시더래요. 의아하게 여긴 기사가 물었겠지요. "아니, 할머니 왜 짐을 머리에 이고 계세요?" "이 늙은이를 태워주는 것만도 고마운 데 어떻게 짐까지 맡겨?" 마음 착한 할머니의 대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받아주시겠다고 하시는 데, 우리는 여전히 우리 짐을 짊어지고 힘겨워합니다. 마치 '근심·걱정이 없는 삶은 상상하기조차 싫다'는 식으로 우리는 그 속에 한사코 머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하나님을 믿어 자유를 맛본 사람들이 볼 때, '염려하는 것'을 자기의 소명인양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믿음이 강한 이들에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비웃거나, 외면하거나, 멸시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의 약한 부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칼 야스퍼스는 "인간 존재는 인간 되어감"(Mensch-sein ist Mensch-werden)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고정된 존재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분명히 다른 존재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정죄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성장해야 할 사람입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웃들의 따뜻한 배려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변화는 '내가 누군가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경험할 때 가능한 것임을 압니다. 그래서 바울은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을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이해이고, 믿음인 것입니다.


선함을 일깨우는 사람

바울은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랍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독일의 순교자 디이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은 기독교인을 가리켜 '타자를 위한 존재'(Being for Others)라고 못박듯 말했습니다. 이 말씀이 별로 마음에 안 드시나요? '어떻게 사람이 먼저 남을 기쁘게 하면서 살아, 제 코가 석잔데?' 정말 그래요. 하지만 이 말씀을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으로 받아들일 건 없어요. 조금씩이나마 우리 마음을 남을 기쁘게 하는 방향으로 조율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우리가 이기심에 사로잡혔다 해도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다시 한번 마음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어요. '아, 이번에도 내가 이기적으로 행동했네. 다음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자기 마음을 자꾸 살펴야 해요. 중요한 것은 마음의 깨어남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하는 것은 그들 속에 있는 선함과 아름다움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은 천사와 악마의 싸움터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마음을 쓸 때마다 우리 속에 있는 천사가 힘을 얻고, 또 사랑과 보살핌을 받는 그들 속에 있는 천사도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선한 일을 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내가 착한 일을 하고 있지' 하는 자부심입니다. 그것은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선행을 이용해서도 우리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했다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선을 행하고도 마음에 기쁨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나'가 죽지 않았을 때입니다. 도움을 받은 사람의 반응이 신통치 않으면 우리는 괜한 짓을 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때 사탄은 미소를 짓습니다. 칭찬을 기대하며 하는 선행은 결코 '덕'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행하는 사랑의 행위만이 우리 품성을 아름답게 만들고,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런데 늘 남을 배려하며 사는 삶은 좀 손해보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바울의 대답은 싱거울 정도로 단순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다." 그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말이 더 필요합니까?


보살핌의 윤리

이제 '서로를 받으라'는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맘에 드는 사람도 있고, 맘에 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好·不好에 따라 사람들을 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타인의 존재에 대해 부정하는 태도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이의 존재를 문제삼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 사람, 어쩐지 재수 없어', '주는 것 없이 미워', '생각만 해도 짜증나'……저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소름이 돋습니다. 사실 그런 말들은 우리 속에 있는 폭력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이 육체를 입은 것이 나찌의 유대인 학살이고, 인종차별주의이고, 성차별주의입니다. 우리는 그런 말들을 통해 자기 성장의 기회를 스스로 박탈합니다.

사람이 가장 사람다울 때는 언제입니까? 저는 그것을 '보살핌' 속에서 찾고 싶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누구나 자연발생적인 보살핌의 충동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돌보고, 개나 고양이·토끼 등 애완동물을 보살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다움은 그런 자연발생적 보살핌의 충동에서가 아니라, 힘들지만 누군가를 보살피려는 의지적인 노력에서 빛을 발합니다. 노인이나 장애인들을 돌보는 사람들도 대개 처음에는 그들을 회피하고 싶은 자기의 감정과 싸웁니다. 하지만 자기 감정을 달래면서 그들을 위해 마음을 쓰기 시작하면서 자기 속에 고여오는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 그의 영혼은 한 단계 고양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사시던 세계에서 다른 사람들이 께름칙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각별히 보살피셨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다가가셨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고, 행실이 나쁘다고 소문난 여성들의 아픔을 어루만지셨습니다. 이방인들과의 접촉도 꺼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예수님을 보고 점잖지 못하다고 했을 때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드러내보이고 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9:12)


'Be the Supporters'

우리가 내 감정의 좋고 싫음을 떠나서 서로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베드로를 끝없는 용서와 사랑과 인내로 갈고 다듬으셔서 교회의 반석이 되게 하셨습니다. 지나친 열심 때문에 자기와 다른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을 받아들일 수 없어 박해자가 되었던 바울을 변화시켜 사랑의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우리들을 변화시켜 성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한 생명 한 생명에 대한 깊디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려고 할 때 우리는 고통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고통은 우리 속에 진리를 낳아줍니다. 그 진리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줍니다. 그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한 달 전 'Be the Reds'의 물결이 이 땅을 붉게 물들였던 것처럼, 서로를 지지해주고, 보살펴주자는 'Be the Supporters'의 물결이 이 땅을 뒤덮게 되기를, 그리고 우리도 그 물결의 일부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