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31. 자유인의 초상
설교자
본문 에3:1-6
설교일시 200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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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의 초상
에스더3:1-6
(2002/8/4)


합당한 예배

가끔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할 때가 있는데, 맞은 편 테이블에 홀로 앉은 어떤 분이 정성스럽게 식사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복잡한 식당 안에서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은 밀레의 <만종>을 보는 것 못지 않게 감동적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난 삶의 자리에서 자기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을 꺼립니다. 행동의 제한을 받고 싶지 않아서 그럴 겁니다. 작은 위반을 해도 크게 드러나고, 조그만 벗어나도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문제는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들입니다. 어려웠던 시기에 우리 사회의 계몽의 주체로 우뚝 섰던 기독교가 이제는 계몽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매스컴에서 보도되는 일부 사이비 종말론자들의 행태는 기독교 전체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상식과 이성적인 사고를 가로막습니다. 신앙 한 근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상식 아홉 근을 섞어야 한다는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신앙은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이나 상식을 무한히 뛰어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성이나 상식이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가 일단은 상식적인 신앙인, 이성적인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2장에서 우리가 드려야 할 이성적인 예배는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은 명백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예배는 구별된 장소에서 구별된 사람끼리 드리는 이런 예배가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밥을 먹고, 친구를 만나고, 사랑을 나누고, 일하는 그 모든 과정을 하나님께 바치는 심정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라는 것이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예배야말로 일상의 예배를 위한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좋은 신자처럼 보이는 데, 구체적인 생의 현장에서는 비신자처럼 살아간다면 곤란한 일입니다. 자기의 못된 행실을 아파하지도 않고, 고치려 몸부림치지도 않고 드리는 예배는 이사야의 말대로 '성전의 뜰만 밟는' 것(사1:12)입니다.


위험한 자유

모르드개는 자기의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관리였습니다. 딸처럼 키운 사촌 누이동생 에스더가 왕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위세를 이용해 더 높은 자리로 옮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궐 문 앞이 그의 근무지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빅단과 데레스라는 내시가 왕을 시해하려는 계획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르드개는 즉시 왕후에게 그 사실을 알립니다. 두 내시는 즉각 처형되었고, 그 사건은 궁중실록에 기록되었지만 모르드개는 아무런 물질적, 정치적 보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원망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서도 보상을 기대하는 마음이 너무 많은 것 아닌지 모르겠어요.

모르드개의 담백한 삶에 위기가 닥쳐옵니다. 하만이라는 왕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하만이 행차할 때마다 그 앞에 엎드려 절을 함으로써 경의를 표하곤 했습니다. 그 위세에 다 주눅이 들었던 거지요. 하지만 모르드개는 그 사람에게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섬기지도 말라'는 제2계명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는 비록 남의 나라, 남의 땅에서 살고 있지만 자기의 마음조차 노예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일이 없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까?" 하고 항변합니다. 나라는 빼앗겼어도, 몸은 구속되어도, 정신만은 굴복하지 않았다는 자부심, 이게 유대정신입니다. 동료들이 하만의 분노를 감지하고 모르드개에게 몸을 굽히라고 하지만 모르드개는 늠름하게 말합니다. "나는 유다인이오." 이 말은 천금처럼 무겁습니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신은 필연적으로 세상의 질서와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르드개의 처신이 하만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상처입은 자존심을 보상받고 싶어합니다. 휴브리스(驕慢)의 아들은 코로스(飽滿)라지 않습니까? 교만한 마음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하만은 왕을 설득해서 유대인들을 학살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의 논리는 간단합니다. 왕의 통치하에 살고 있는 여러 민족 가운데, 왕이 세운 법과는 다른 법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사회통합의 걸림돌일 뿐만 아니라, 왕의 존엄을 해치는 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만은 이런 사적인 감정에 기대어 엄청난 학살극을 준비하면서 왕에게 엄청난 뇌물을 바칩니다. 왕은 하만의 충성심에 감복하여 그가 원하는대로 전권을 위임해줍니다. 바야흐로 유대인들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아달월 십삼일이 되면 페르시아 지경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다 학살하라는 왕의 조서가 각지에 내려졌습니다.


모험하는 신앙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모르드개는 왕후인 에스더를 찾습니다. 모르드개는 왕후에게 하만이 꾸민 음모의 자초지종을 다 알립니다. 그러면서 에스더가 그 일을 막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그의 말은 그의 마음이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왕후께서는 궁궐에 계시다고 하여, 모든 유다 사람이 겪는 재난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때에 왕후께서 입을 다물고 계시면, 유다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라도 도움을 얻어서, 마침내는 구원을 받고 살아날 것이지만, 왕후와 왕후의 집안은 멸망할 것입니다. 왕후께서 이처럼 왕후의 자리에 오르신 것이 바로 이런 일 때문인지를 누가 압니까?"(4:13-14)


모르드개는 하나님이 자기들을 구원해 주실 것임을 확신합니다. 그 구원이 어디에서 올지, 어떤 방법으로 올지 모르나, 하나님은 분명히 자기들을 구원하실 거라는 철저한 낙관주의(radical optimism), 이것이 모르드개의 삶을 지탱해주는 원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모르드개는 왕후 에스더에게서 문제 해결의 작은 실마리를 찾습니다. '왕후께서 이처럼 왕후의 자리에 오르신 것이 바로 이 일을 해결하라는 섭리가 아니겠습니까?' 에스더도 모르드개의 말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마찬가지로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각오로 왕 앞에 나아가 하만의 악한 계획을 폭로하고 동족들을 구해냅니다. 믿음이란 어쩌면 이런 자기 포기를 통해 자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大死一番 死後蘇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번 크게 자기를 버려야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린다는 말이겠습니다. 위기를 통해 에스더는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영원한 자유인 모르드개가 그의 곁에 있었기 때문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

왕후 에스더는 풍성한 잔치를 벌여놓고 왕과 하만을 초대하여 정성을 다해 대접합니다. 잔치가 끝난 후 하만은 자기가 누리는 특권에 만족하여 흡족한 마음으로 집을 향합니다. 그런데 그 기분은 대궐 문에서 모르드개를 보는 순간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악한 친구들의 충고대로 모르드개를 매달 쉰 자 높이의 장대를 높이 세워놓고 잠을 청합니다. 이제 내일이면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를 않습니다. 하필이면 그날 밤 왕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하에게 자기의 통치를 기록한 궁중실록을 가져와서 읽으라고 합니다. 실록 가운데서 왕은 자기에 대한 암살 음모 사건에 이르렀을 때, 모르드개라는 사람에게 적절한 보상이 주어졌는지를 묻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자 왕은 마침 모르드개를 처형하게 해달라고 청원하기 위해 궁궐에 들어서는 하만을 불러서 묻습니다.


"내가 특별히 대우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해 보시오."(6:6)


착각은 자유라지요? 하만은 '그 사람'이 자기라고 확신하고는 희색이 만면하여 대답합니다. 그에게 왕의 옷을 입히고, 왕이 타는 말에 멋진 장식을 한 후에, 가장 높은 신하가 그를 말에 태우고, 성 안 거리로 지나다니면서 '임금님께서는, 높이고 싶어하시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대우하신다'고 외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왕은 그대로 하라면서, 대궐 문에서 근무하는 유다 사람 모르드개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왕의 명령이 지엄한지라 하만은 모르드개를 말에 태우고, 마치 구종드는 종처럼 말고삐를 잡고 성안을 돕니다. 애초에 그는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다고 해서 노여워했는데, 자기가 모르드개에게 무릎을 꿇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또 이 이야기는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해 세웠던 장대에 자신이 매달려 죽게된 사정을 계속해서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계획을 세우든 사태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법입니다.

예부터 사람들은 호사다마라 하여 매사가 순조롭게 이루어지면 신들의 질투를 사기 쉽다 했습니다. 이 말은 신의 속 좁음을 지적하는 말이 아닐 겁니다. 오히려 인간의 자기 도취, 교만을 경계하는 말일 겁니다.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되고, 창고에는 보화가 가득하고, 왕후의 잔치에 초대받는 영광의 절정에서 하만은 악몽을 꾸는 것처럼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만의 비극은 그가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없는 게 없어 자유로운 것 같았지만, 자기 스스로 쳐놓은 교만의 덫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잠16:18)이라는 말이 빈 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르드개에게서, 그리고 에스더에게서 참 자유인의 초상을 봅니다. 세상 사람이 뭐라 하든 자기의 원칙을 지키며 살려는 결의, 동족들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각오로 나아가는 모험적인 용기, 이것이 믿음이고 자유입니다. 우리는 신앙적 입장과 원칙을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그것이 누군가를 살리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쫓기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성직자들에게 누구도 돌을 들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살기 위해, 자기의 욕망을 위해 원칙을 포기하는 것은 얼을 파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우리에게 다가와 '내게 한 번만 절하면 세상의 부귀영화를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그럴싸하지요? 하지만 사탄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가 준다는 것은 신기루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살기 위해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지키십니다. 한번이라도 믿음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맞서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사소한 이익은 잃을지 모르지만, 더 큰 내적 자유를 선물로 받게 된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의 삶이 진리를 통해 얻는 참된 자유로 말미암아 환해지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