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5. 비워둔 가운데
설교자 김재흥
본문 요 4:3~9
설교일시 2024-06-23
오디오파일 s20240623-2.mp3 [23962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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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셨다. 그렇게 하려면, 사마리아를 거쳐서 가실 수밖에 없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마을에 이르셨다. 이 마을은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곳이며, 야곱의 우물이 거기에 있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피로하셔서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오정쯤이었다.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왔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가서, 그 자리에 없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유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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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소망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1. 미움과 증오의 풍선
지난 6월 19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평양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정상회담을 통해 두 나라는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한층 더 두터운 관계가 되었습니다.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란, 상대국이 침략당할 경우 상호지원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또한 푸틴은 북한과의 무역을 발전시키겠다는 말도 했습니다. 이로써 북한은 핵 개발을 이유로 유엔이 오랫동안 지속했던 대북 제재조치의 영향을 덜 받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와 북한의 관계 강화는 결코 좋은 싸인이 아닙니다. 러시아는 북한의 도움을 받아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더 확대 지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북한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경제적 문제를 타개하게 되었습니다. 북러 관계가 강화될수록 북러에 대한 한미의 압박은 강해질 것이고 그로인해 한반도에서 또 한 번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커질 것입니다.

최근 북한은 남한으로 풍선에 각종 오물을 매달아 보냈습니다. 서울, 경기, 강원, 충청, 전라, 경상, 제주 남한 전역으로 풍선은 날아왔습니다. 풍선 끝에 매달린 봉지 속에는 오물과 생활 쓰레기가 가득했습니다. 이는 남한 쪽에서 북한 쪽으로 보낸 풍선에 대북 전단을 매달아 보낸 것에 대한 일종의 답장이었습니다. 그 대북 전단은 탈북민들이 북한 주민들에게 북한과 남한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보낸 전단이었는데 김정은 위원장에 대한 욕설과 비방도 담겨 있었습니다. 북한이 우리 정부에게 대북 전단 배포 중지를 요청했지만, 우리 정부는 표현의 자유라며 전단 유포를 방치했습니다. 북한이 오물 풍선을 계속 보내자 우리나라 정부는 6년만에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했습니다. 그러자 북한은 잠시 멈추었던 오물 풍선을 다시 남한 쪽으로 보냈습니다. 지난 5월 말에 북한은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초대형 방사포를 발사했습니다. 수십 발의 초대형 방사포가 하늘을 향해 날아갔습니다. 북한은 ‘이는 대한민국을 정조준한 발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정조준이란 실제 정조준했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정조준했다는 말입니다. 미군은 이에 맞서 특수전 폭격기인 ‘죽음의 천사’를 태백 상공에 띄워 타격 훈련을 행했습니다.

휴전선을 남북으로 오간 풍선의 봉투 속에 담겨 있던 것은 전단과 오물과 쓰레기가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 담겨 있던 것은 서로를 향한 미움과 증오와 상대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풍선은 미사일과 총탄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 안에 담긴 상대를 향한 마음이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남과 북 양쪽 모두 그런 풍선은 날리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전단 풍선과 오물 풍선이 휴전선을 넘어 남북을 오가고는 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남과 북 사이에 무언가 저렇게 오고 갈 수 있기는 있구나. 풍선에 쓰레기와 비방 전단이 아니라 다른 걸 달아 보냈으면 어땠을까? 북한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초코파이, 라면, 믹스커피와 비타민 영양제 같은 것, 그들이 좋아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풍선에 달아 북으로 날려 보냈으면 어땠을까? 그런다고 남북 관계가 좋아지겠습니까만 적어도 오물 풍선이 날아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전쟁 후 70년이 지났습니다. 어느 한 사람을 향하여 한동안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살아도 마음이 무겁고 불편하고 내가 나답게 자유롭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같은 민족끼리 무려 70년 동안 그 무거운 미움과 증오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언어도 같고 역사도 같은 한 민족끼리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70년째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왜 계속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미사일 발사 훈련을 하고, 언제든 전쟁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불안 속에서 살아야 하는 건가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2. 존중의 공간 만들기 – 선 넘기 혹은 뒤로 물리기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관계도 우리 남북한만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정략결혼을 통해 혈연관계도 맺고 협력한 적도 있지만 서로 자주 싸웠습니다. 주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하였습니다. 앗수르의 식민 혼혈정책 때문에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앗수르 사람들과 피를 섞어야만 했습니다. 그 이후로 남유다 사람들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동족으로 여기지 않고 이방인 취급했습니다. 구약 속에는 형제들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 같이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가인과 아벨, 에서와 야곱, 요셉과 그 형제들. 죽이고, 빼앗고, 노예로 팔아버리고, 미워하고 질투했습니다. 성서 속에 등장하는 형제들의 모습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관계를 투영하고 있는 동시에 타자를 향한 인간의 본능적 폭력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을 보면 사마리아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북쪽에 있는 갈릴리에 계시다가 이스라엘의 남쪽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중간에 있는 사마리아를 들러 가려고 하셨습니다. 그게 최단거리였습니다. 그래서 심부름꾼들을 앞서 사마리아로 보내셨습니다. 마을에 들어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자초지정을 이야기하니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 일행이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보자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상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상한 것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앞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부정한 사람들이고 그들이 사는 땅은 부정한 땅이라 여겨 그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보통 유다 사람들이 남북을 오갈 때는 사마리아 땅을 피해서 다녔습니다. 그러니 사마리아 사람들 입장에는 예수님을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을 향한 미움과 증오,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고픈 마음이 넘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셨습니다. 사마리아인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은 유대인의 생각과 달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사마리아 사람은 부정한 사람, 그래서 제거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의 집에 들어가 신세를 질 수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수가성에 들어가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로 들어가고 예수님 혼자 우물가에 앉아계셨습니다. 정오, 볕이 뜨거운 시간 아무도 나오지 않는 우물가에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청하셨습니다. 여자는 깜짝 놀라 말합니다.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성경은 사마리아 여자가 놀란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대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이 서로 상종하지 않은 세월이 오래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스에 멸망하여 앗수르 사람들과 피를 섞은 때부터 계산하면 700년이 넘는 세월입니다. 유대와 사마리아 사이에 700년이 넘도록 존재하던 미움과 증오의 선을 예수님께서 넘으신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대접 주는데, 그가 사마리아인이건 예루살렘 사람이건 왜 문제가 되어야 합니까? 물 한 대접이 뭐라고.

그런데 그 여인은 아픈 사연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결혼을 여섯 번이나 했고, 그 때문인지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사람들이 나다니지 않는 시간인 정오에 혼자 물을 길러 우물가에 나왔던 것입니다. 사실 목말랐던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그 여인이었습니다.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갈증,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고 싶다는 갈증, 메시야를 만나고 싶다는 갈증, 사람들을 피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고 싶다는 갈증. 예수님은 그 여인을 만나 그 여인이 가지고 있던 모든 갈증을 해갈해 주셨습니다. 그 모든 문제의 해결은 예수님께서 선을 넘으셨기에 시작된 것입니다. 오래되어서 역사와 문화와 관습이 되어 버린 미움과 증오의 선을 넘으셨기에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동은 선을 넘은 것이라 표현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뒤로 물리신 것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와 사마리아 간에 700년 동안이나 있었던 악감정을 뒤로 물리셨습니다. 여느 유대인처럼 그 사마리아 여인을 부정한 존재로 여겨 거리를 두거나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목마른 사람을 만나 물 한 대접 달라 하셨습니다. 같은 사람으로 만나셨습니다. 그저 그 여인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위한 존중의 공간을 만드신 겁니다. 여인은 그 공간에서 안전함과 평안함을 느꼈기에 자신의 아픔과 슬픔과 소망을 꺼내놓았던 것입니다.

3. 비워둔 가운데
누가복음 10장에서도 사마리아인이 비유 속에서 등장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진 걸 모두 빼앗기고 맞아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옆을 지나가게 된 제사장과 레위인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을 지나가게 된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가까이 가서 상처를 치료해 주고 나귀에 태워 여관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 이 두 부류의 차이는 무엇이었습니까? ‘자비의 유무’였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자기의 시간, 죽은 사람을 가까이하면 안 된다는 율법, 혹 그를 돕다가 자기도 강도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뒤로 물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 모든 것을 뒤로 물렸습니다. 자기의 시간, 율법, 두려움을 뒤로 물렸고 그뿐 아니라 자신의 물질까지 뒤로 물렸으며 더 나아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700년간 지속되어 온 미움과 증오의 감정까지 뒤로 물렸습니다. / 예수님의 이 비유는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서 시작된 비유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류가 재난을 만난 자를 앞에 두고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자기의 시간과 기준과 두려움을 넘어서지 못하면 인류는 자멸하거나 공멸할 것이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재난을 만난 자를 위해 자기의 시간과 물질과 그에 대한 오랜 악감정까지 뒤로 물릴 수 있다면 영원히 생존할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2018년 여름 청파청년부 수련회 때의 일입니다. 그때 청년부 수련회는 향심기도를 배우고 익히는 수련회였습니다. 향심기도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 미움과 증오 같은 감정, 염려와 걱정 같은 생각, 소망과 바람 같은 열망을 다 비우고 마음속에 하나만 남겨두는 겁니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지향 하나만 남겨두는 겁니다. 자꾸만 이리저리로 갈라지는 마음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을 향한 지향 하나만 내 안에 남겨두는 기도가 향심기도입니다. 며칠간의 수련회를 마치고 폐회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였습니다. 가운데를 비우고 둥글게 앉았습니다. 한 가운데 작은 나무 십자가 하나만 세워놓았습니다. 지금은 일본에 가 있는 연준호 전도사에게 마무리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때 연준호 전도사의 기도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의 마음에 울림을 주었습니다. 한 청년이 그 기도문을 기반으로 <비워둔 가운데>라는 찬양을 만들었습니다. 가사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함께 모여서 한 가운데를 둥글게 비워
비워진 여기 오신 예수의 십자가 바라보며 우리를 돌아보네
예수를 못 박아 죽인 이 세상에서 오늘도 다친 생명들 있음을 예수를 따라 우리들도 잊지 않고 그 이웃들과 함께할 수 있도록
이제 우리가 비워둔 가운데를 계속 비워둘 수 있기를
비워진 이곳이 다친 이들이 올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되기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그 일입니다. 예수님은 다친 생명들을 위해 당신을 비우셨습니다. 하나님 아들이라는 높은 신분도 내려놓으셨고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기던 율법도 내려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당신의 생명까지 십자가 위에 내려놓으셨습니다.

남과 북 관계에 있어 우리가 꼭 지켜야 하는 것은 “전쟁은 안 된다.” 이것 하나입니다. ‘전쟁 불사’라는 말은 어떤 경우에도 꺼내서는 안 됩니다. 군사 훈련마저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한 훈련이어야 합니다. 전쟁하지 않기 위해서는 남과 북 모두의 안전이 보장된 공간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안전한 공간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남과 북이 서로 자신을 뒤로 물려야 합니다. 남과 북 모두 서로를 위해 시간을 쓰고 재정을 사용하고 오랫동안 내려온 역사적 악감정까지 뒤로 물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남과 북 사이에 안전한 공간이 마련되고, 그 공간 속에서 남과 북 모두가 평안히 살아갈 길이 열릴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그날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계속 미움과 증오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겪었던 전쟁의 아픔 때문에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는 미움과 증오 속에 살아가는 이도 있습니다. 저의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가 그러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미움과 증오를 이용해 사람들을 선동하고 자기의 권력과 이권을 유지하려는 자도 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이끌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이끌려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너를 위해 자신을 뒤로 물리며 사셨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물질과 역사적 악감정까지 뒤로 물렸던 사마리아인처럼 사셨습니다. 우리가 모여서 한가운데를 둥글게 비웁시다. 비워둔 그 가운데에 오직 주님만을 모십시다. 그리고 그 안전한 공간에 다친 이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그래서 미움과 증오가 넘쳐나는 이 세상을 생명과 평화가 넘쳐나는 새로운 세상으로 바꾸어 나갑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 일을 맡기셨습니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4년 06월 23일 12시 41분 3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