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34. 우리를 고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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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9:9-13
설교일시 2002/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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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고치소서
마9:9-13
(2002/8/25)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

로마시대의 문장가인 유베날리스(Decimus Junius Juvenalis)는 그의 시구 가운데서 지금도 사람들이 자주 언급하는 말을 했습니다.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그것입니다.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의 꿈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고, 좋은 음식을 먹고, 또 다이어트도 합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각광받는 복음은 '건강의 복음'이 아닐까요? 거기에는 광신도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곧잘 성지순례에 나서기도 합니다. 보신관광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유베날리스의 시구는 사실은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본래 그의 시구는 이렇습니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이기를 기원해야 할 일이다 Orandum est, ut sit mens sana in corpore sano." 이것은 신체에만 신경을 쓰면서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은 방치하는 그 시대의 균형상실을 비꼬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말은 우리 시대에 더욱 잘 들어맞는 말이 된 것 같습니다.

우리는 건강에 대해 지나치게 염려하면서 삽니다. 몸에 조금만 이상 징후가 생겨도 혹시 중병이 아닐까싶어 깜짝 놀랍니다. 건강의 복음이 사람들에게 크게 어필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가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의료체계도 잘 갖추어지고, 섭생도 그런대로 잘 하고 있는 우리가 왜 건강에 자신을 갖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래요. 생명의 가장 기본이 되는 물과 공기가 오염되었고, 우리가 먹는 음식들은 농약이나 방부제를 비롯해 몸에 해로운 것들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인가요? 현대인들은 어느 시대의 사람들보다 더 큰 긴장감 속에서 살아갑니다. 스트레스는 우리 몸의 저항력을 빼앗아서 쉽게 병에 걸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치스러운 생활도 한 몫을 거들고 있습니다. 여름에는 냉방기를 틀어 더위를 쫓고, 겨울에는 온풍기를 틀어 추위를 몰아냅니다. 그럴수록 몸은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잃어갑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주적인 리듬인 律呂를 잃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건강 강박증이라 할 만큼 건강에 대해 염려를 하지만 우리는 몸과 마음의 균형을 잃은 채 살아갑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몸의 '균형isonomia'을 깨고 병을 일으키는 상태를 '모나르키아monarkia'라고 했는데, 그것은 '한 쪽의 지배'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상황은 놀랍게도 과도한 육적인 관심 때문에 삶의 영적인 차원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많은 이들이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우리가 왜 사는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우 즉물적인 사고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할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사람이 누리고 사는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그가 해낼 수 있는 일의 효율성을 따집니다. 그의 정신적인 풍요로움이나 평화, 혹은 인격의 깊이, 남들에 대한 배려 등은 크게 고려하지 않습니다.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처럼 그의 생산성이 그의 존재가치를 결정합니다. 이렇게 해서 정신과 몸의 불균형은 제도화되었습니다. 건강할래야 건강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의사이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누가 건강하고, 누가 병자인가?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았습니다. 몸보다는 얼이 병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사람들을 평가할 때 효율성보다는 거룩과 속됨, 의인과 죄인이라는 척도로 사람들을 나누었습니다. 유대의 주류 사회가 범주화해놓은 틀 안에서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거룩한 사람,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지만, 그 틀 밖에서 살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부정한 사람으로, 죄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분노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런 차별이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를 보셨습니다. 아시는 바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 세리를 창녀와 똑같이 취급했습니다. 민족 반역자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리들은 피를 나눈 동족들로부터 뱀처럼 징그러운 존재로 취급받았습니다. 어쩌면 마태는 경제적으로는 윤택하게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 있나요? 그에게도 이웃 간의 따스한 교류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도 나눠먹고,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히히덕거리기도 하면서 사람들은 고단한 세월을 함께 건너는 것 아니겠어요? 마태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도 아픔을 지닌 사람이고, 동료들의 지원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을 겁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말씀을 건네십니다. "나를 좇으라." 이 말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부름이었지만, 마태는 그것을 자기를 사람으로 받아들인다는 선언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끝이 없을 것처럼 보였던 긴 인생의 겨울 한복판에 봄의 씨앗이 떨어지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즉시 일어나 예수님과 일행을 자기 집으로 모십니다. 그리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예수님은 흔쾌히 그의 손님이 되셔서 그와 더불어 먹고 마셨습니다. 한 낮에도 어둠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었던 세리와 죄인들이 찾아와 잔치에 동참했습니다. 위대한 스승을 모시고 음식을 나누는 감격에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마냥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그 깨어남의 시간을 경축했던 것은 아닙니다. 죄인과 의인, 거룩함과 속됨의 자尺를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을 일로 삼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행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모습은 추태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불러내서 나무라듯 말합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과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이 말이 예수님의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즉각 응수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이 말은 바리새인들은 건강하고 그 자리에 있던 세리나 그의 벗들은 병든 자라는 말이 아닐 겁니다. 우리는 이 말에 함축되어 있는 이죽거림을 들어야 합니다. '너희같이 스스로 깨끗하고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병은 너무나 깊구나. 정작 영혼의 의사가 필요한 것은 너희들인데, 너희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구나. 하지만 여기 자기의 생이 문제임을 알고, 그것 때문에 아파하고, 새로운 삶을 갈구하고 있는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을 맛보게 되는구나.' 이 말씀 끝에 주님이 하신 말씀은 바리새인들의 영적인 무지를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바리새인들은 주님이 인용하신 이 말씀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문제는 문자는 알았지만 그 속뜻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번다한 의식절차를 따라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는 긍휼의 제사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규정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존중받을 만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의 행간이 가리키고 있는 자비와 긍휼이라는 속뜻은 놓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마23:23)고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정죄와 심판과 비판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마하트마 간디의 일화는 이런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자서전에서 열 두세 살 무렵에 동전을 훔쳤던 일과 열 다섯 살 무렵에 형의 팔찌에서 금붙이 한 조각을 훔쳤던 일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도둑질을 한 후 그는 양심의 괴로움으로 번민했습니다. 그는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자기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자백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야 결심이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려웠습니다. 아버지의 매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기 때문에 당하게 될 아버지의 고통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깨끗한 자백 없이는 결백해질 수 없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서 자백서를 써서 아버지께 드리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는 자백서를 통해 자기의 잘못을 낱낱이 다 고백했을 뿐만 아니라, 적당한 벌도 내려달라고 썼고, 앞으로는 절대로 도둑질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또 자신의 죄 때문에 아버지 자신을 벌하지는 말아 달라는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는 병으로 누워 계신 아버지께 자백서를 바치고 맞은 편에 떨며 앉아 있었습니다. 이제 간디의 글을 그대로 읽겠습니다.


"그가 그것을 다 읽었을 때 구슬 같은 눈물이 두 뺨을 흘러 떨어져 종이를 적시었다. 그는 잠시 동안 눈을 감고 생각한 다음 종이를 찢어버렸다. 그리고 읽기 위해 일어나 앉았던 몸을 다시 침대 위에 눕혔다. 나도 울었다. 나는 아버지가 고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만일 화가라면 오늘이라도 그 광경을 그대로 그릴 수 있겠다. 내 마음 속에 아직껏 그렇듯 생생하다. 그 사랑의 구슬방울들이 내 양심을 정화시켰고, 내 죄를 씻어버렸다. 그러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간디 自敍傳』, 함석헌 번역, 80-81쪽)


아버지의 처벌이 아니라, 아버지의 눈물이 간디를 정화했고, 그를 위대한 혼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마음아파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를 냉엄하게 처벌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당신의 아들에게 그 죄를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눈을 뜬 사람은 다시는 죄 가운데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가슴 아파하시고, 눈물 흘리시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우리가 스스로의 삶을 방탕함 속에 내던질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균형을 잃고 있음을,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문제임을 인정하십시오. 그때 주님은 우리를 고치실 것입니다. '우리를 치료하는 의사'(출15:16)이신 주님의 처방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살 수 있음을 인정하십시오. 말씀을 굳게 붙들고 사십시오. 그리고 메마른 논에 물을 대는 농부처럼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공급하십시오. 물 찬 논에서 물을 빼는 농부처럼 욕심을 줄이십시오. 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시간이 다가옵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들을 깎아내리기를 그만두고 그의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일깨우십시오. 우리가 이웃의, 그리고 세상의 상처를 싸매주려고 최선을 다하다보면 우리 속의 병도 떠나갔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생명은 신비입니다. 그를 고쳐 나를 고치게 되니 말입니다. 주님의 큰 사랑이 우리의 병든 마음을 온전히 치유해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