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36.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설교자
본문 살전3:7-13
설교일시 200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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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살전 3:7-13
(2002/9/8)


목회자 바울의 심정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가장 중요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그곳은 또한 로마 총독의 주재지이기도 했습니다. 이 도시는 로마 제국의 동서를 잇는 가장 중요한 도로인 데그나티아 대로변에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교회를 세운 것은 바울과 실라였습니다. 그들은 유럽의 관문인 빌립보를 거쳐 이 도시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들의 열정적인 선교활동의 결실로 유대인 몇 명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리스인들 몇 명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작지만 의미있는 결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전통에 집착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매우 위험한 인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도 일행에게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라는 오명을 씌웠습니다. 또 그들은 사도 일행이 씨저 이외에 다른 임금이 있다고 주장한다면서, 제국 내에서 안전을 희구하던 사람들의 마음 속에 불안의 불꽃을 던졌습니다.

두려움은 흔히 강한 폭발력을 갖습니다.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 참이냐가 아닙니다. 무엇이 자기들의 안전에 도움이 되느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몇몇 지도자들의 선동에 따라 사도 일행을 쫓아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야반도주하듯 데살로니가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갑작스런 떠남이 종내 바울의 가슴속에 아픈 기억으로 남았던 모양입니다. 무엇보다도 데살로니가에 움트기 시작한 믿음의 새싹이 박해와 차별이라는 모진 광풍을 만나 꺾이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에 그는 몹시 걱정스러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테네에서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냅니다. 비록 몇 명 밖에 안 되는 교인이라 해도 그들이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는지 좀 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디모데는 아직도 박해의 구름이 걷히지 않은 데살로니가에 들어가 교우들을 만났습니다. 그런 후 그는 다시 바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디모데가 가져온 소식은 두 가지였습니다. 교우들이 믿음과 사랑의 터 위에 굳게 서있다는 것과, 사도 일행을 진심으로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쁜 소식에 바울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We can breathe again, as you are still holding firm in the Lord"(JB)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이 주님 안에 굳게 서있기 때문에 숨을 내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동안은 목이 졸린 듯 답답하고 괴로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이 말 한마디 속에 바울이라는 존재의 본질이 고스란히 표현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온갖 환난과 역경, 배고픔의 괴로움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다 상쇄하고도 남는 기쁨이 그에게 선물처럼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이런 애태움이 바울을 바울 되게 합니다.


절망을 극복하는 길

'절망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랍니다. 어쩌면 이 자리에는 삶이 힘겨워 한번쯤 자살을 생각한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는 않다 해도 자포자기적인 심정에 사로잡혔던 순간은 아마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미줄처럼 우리를 꽁꽁 동여매는 '절망감'이란 우리가 우리에게 사로잡혀 있을 때에만 찾아오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하는 일마다 잘 안 되고, 친구들은 하나 둘 멀어지고, 기력도 쇠해질 때 우리는 자기 비하의 심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나는 아무 짝에도 쓸 데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때 생각의 방향전환이 필요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에게는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사랑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자도 없구요/사랑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부유한 자도 없어요." 복음성가의 이 가사는 소박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부자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꼭 유형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있음 자체'로 다른 이에게 힘을 주는 이들도 있습니다. 많은 가난한 엄마들이 자식들 때문에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많은 병자들이 그들이 있음을 통해 사랑하는 이들에게 소중한 가르침을 베풀고 있습니다.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보살핌을 통해 구현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수없이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사람들에게 참 생명과 자유의 복음을 전하느라고 절망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바울의 기쁨이고 보람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요4:32)고 하셨습니다. 그 비밀스런 양식은 무엇입니까?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우리의 짧고 덧없는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고립된 자신을 벗어나 손을 뻗쳐 서로에게서, 그리고 서로를 위해서, 힘과 위안과 온기를 발견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고귀함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초는 제 몸을 태워 빛을 내지만, 사람은 형제자매를 향한 애태움을 통해 빛을 발한다." 이것이 생명의 실상이고 진실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로부터 받은 위로와 기쁨으로 마음이 환해진 바울은 두 가지 소원을 고백합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첫째, 속히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할 수 있으면 하는 것입니다. 교회 설립자로서 좋은 대접을 받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바울은 그런 것은 이미 떠난 사람입니다. 그는 자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a)

그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삽니다. 그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부족한 믿음을 온전케 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는 앞서 진리의 길을 걸은 사람으로서 성도들을 바르게 이끌고 싶어합니다. 그는 자기 속에 있는 그 충만한 기쁨과 자유를 혼자 간직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둘째,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사랑이 넓어지고 깊어지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성숙이란 사랑의 능력이 커지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사랑의 동심원을 그리는 자들입니다. 예수라는 중심에서부터 밖으로 퍼져가는 사랑의 동심원이 하나 둘 그려지면서 세상은 좀 더 따스한 곳이 됩니다. 저는 이 며칠 사이 마음에 큰 감동을 간직한 채 살고 있습니다. 수해를 만난 이웃들을 돕는 일에 전 교우들이 정성스런 뜻을 모았고, 또 몇몇 분들은 아주 은밀하게 저를 찾아와서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몸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죄스러움을 이야기하면서 봉투를 내밀고 가셨습니다. 잘 전해달라면서요. 그분들의 형편은 결코 넉넉하지 않습니다. 저는 가슴으로 몰려오는 사랑의 물결을 그저 온몸으로 맞이했습니다.


"야훼께서 베푸신 그 크신 은혜,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까!"(시116:12)

어쩌면 그런 분들의 마음 깊은 곳을 쟁쟁하게 울리는 음성이 아닐는지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 바로 그곳에 계십니다. 우리가 서있는 삶의 자리 바로 그곳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사랑의 통로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