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38. 깨어나는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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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행20:7-12
설교일시 2002/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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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는 청년
행20:7-12
(2002/9/22)


드로아에서 생긴 일

사도 바울은 세 번째 전도여행을 마무리하면서 빌립보를 떠나 소아시아 지방의 드로아라는 도시에 당도했습니다. 그곳에서 이레를 머물면서 복음을 말씀을 전했는데, 주일 저녁 무렵도로아의 성도들이 한 교우의 집에 모였습니다. 애찬도 나누고, 사도로부터 말씀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애찬을 나눈다는 것은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음을 나타내는 아주 소중한 의식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바울 사도의 마음이 요즘 말로 조금 'up' 되었던 모양입니다. 내일이면 드로아를 떠나야 하는데, 교우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씀은 너무 많았던 때문일까요? 자연히 그의 말은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만 사건이 벌어집니다.

삼층 창턱에 걸터 앉아있던 유두고라는 젊은이가 그만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졸다가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들이 모인 다락방에는 등불을 많이 밝혀두었는데, 그 때문에 아마 공기가 혼탁해졌기 때문일까요? 말씀은 중단되었고 사람들은 졸지에 일어난 그 황망한 사태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말씀을 듣다가 새파란 젊은이가 떨어져 죽었으니 이 얼마나 불길한 징조입니까? 소문이 밖으로 새나가면 드로아에서 복음을 전하기는 영 틀린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안심시킨 후 죽은 청년의 몸 위에 엎드려 청년을 살려냅니다. 성경은 그가 한 일에 대해 자세히 전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죽은 청년의 몸 위에 엎드리는 그의 자세에서 구약에 나오는 엘리야와 엘리사를 떠올리게 됩니다. 엘리야는 자기가 곤궁한 처지에 있을 때 잘 보살펴 주었던 사르밧 과부의 아이가 죽었을 때, 그를 다락방에 눕히고 그 위에 몸을 엎드린 채 하나님께 아이를 살려달라고 세 번이나 애절한 기도를 드려 아이를 살린 적이 있습니다(왕상17:19-24). 엘리사도 예언자의 무리를 극진히 대접하던 수넴 여인의 아이가 죽었을 때 여호와께 기도하고 그의 몸 위에 엎드려 아이를 살려냈습니다(왕하4:32-37). 바울의 행동은 바로 그런 예언자들의 행위를 연상시킵니다.

사도는 청년 유두고를 살려낸 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락방으로 올라가 애찬을 함께 나누며 날이 밝아올 때까지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조는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었겠지요? 이튿날 바울이 떠나자 사람들은 그 다시 살아난 그 청년을 보면서 마음에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지난밤에 그들이 체험했던 그런 생명의 기적은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격려와 보호의 표징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 놀라운 사건을 보면서, 말씀을 듣는 중에 꾸벅꾸벅 존 것이 하필이면 청년이었다는 사실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어쩌면 유두고는 낮 동안 아주 고된 일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난히 잠이 많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졸음은 영적인 게으름의 소산입니다. 조는 사람의 마음은 한 곳에 집중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만큼은 정신의 '차려 자세'를 유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군대에서 제식훈련을 할 때 제일 기본으로 삼는 것이 차려 자세입니다. 차려 자세를 하고 있는 동안은 눈동자를 돌려도 안 되고, 벌이 쏘아도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조교는 괜히 듣지도 못한 소리를 들었다면서 기합을 주곤 합니다. "눈동자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왜 이렇게 차려 자세를 강조하는 것일까요? 그게 군인 정신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끄덕끄덕 조는 자로 살지 않으려면 항상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방심상태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방심상태에 빠지면 우리는 즉각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여기에 유초등부 어린이들도 있으니 옛날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해님과 달님이 된 오누이

'해님과 달님이 된 오누이' 이야기입니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어린 남매를 키우며 사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살림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래도 그 어머니는 날품팔이를 하면서도 고단한 줄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자식들을 잘 키우려는 염원 때문이었을 겁니다. 어느 날 산너머 마을의 부잣집에 가서 하루 종일 일하고 해질녘 집으로 가려는데, 그 젊은 과부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주인이 아이들에게 주라면서 떡을 조금 싸줍니다. 어머니는 몸이 천근 만근으로 무거웠지만 어린 자식들에게 떡을 먹일 수 있다는 생각에 힘든 줄도 모르고 산길을 넘습니다. 그런데 어느 산모롱이를 지나는데 앞에서 커다란 등불 두 개가 턱 나타나는 겁니다. 호랑이였습니다. 어머니는 다리가 다 풀리는 느낌이었겠지요? 호랑이는 배가 고프니 보따리에 있는 떡을 주면 안 잡아먹겠다고 합니다.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어머니는 호랑이에게 떡을 주고 혼이 빠져서 집을 향해 가는 데, 산모롱이를 돌 때마다 호랑이가 나타나 결국은 팔도 뜯어 먹히고, 발도 뜯어 먹힌 끝에 죽고 맙니다.

호랑이는 그래도 양이 차질 않아, 어머니의 옷을 벗겨 입고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엄마가 왔으니 문을 열라고 합니다. 철없는 막내는 문 앞으로 달려가지만 의젓한 오빠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거친 데 놀라 동생을 붙잡습니다. 호랑이는 부엌에 들어가 팔에 온통 흰 밀가루를 칠하고 나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면서 엄마 팔을 만져보라고 합니다. 팔을 만져보니까 매끈매끈한 게 엄마 같아요. 그래서 동생은 바깥의 가짜 엄마에게 소리치지요. 배가 고프니까 빨리 밥 해달라고요. 그런데 오빠는 부엌으로 돌아서는 엄마의 치마 밑에 있는 호랑이 꼬리를 보았어요. 오빠는 동생을 데리고 바깥으로 빠져나와 우물가에 있는 미루나무에 올라갑니다. 뒤늦게 알아차린 호랑이도 나무에 올라가려고 하지만 미루나무 밑둥이 워낙 미끄러워서 주르륵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곤 합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동생은 참 안 됐다는 생각에 호랑이에게 말합니다.

"자귀를 가져다가 나무를 찍어서 발 디딜 발판을 만들고 올라오면 되잖아."

호랑이는 옳다구나 싶어서 그대로 합니다. 호랑이가 한 발짝 한 발짝 오누이에게 다가오자 오빠는 다급한 마음에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하나님, 제발 저희들을 끌어올려 살려 주십시오. 저 못된 호랑이가 지금 저희들을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 저희들이 가엾다고 생각되시면, 제발 단단한 동아줄을 내려 주시고, 저희들을 죽이시려거든 썩은 동아줄을 내려 주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스르르 굵고 단단한 동아줄 내려왔습니다. 오누이가 그 줄에 매달리자 동아줄은 하늘로 끌려 올라갔습니다. 호랑이도 하나님께 동아줄을 내려달라고 기도했지요.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 아니냐고 하면서요. 그러자 공평하게도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호랑이가 잡고 올라가던 동아줄은 썩은 것이어서 그만 하늘 높은 곳에서 뚝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호랑이는 수수밭에 떨어졌다고 하는데, 수숫대에 붉은 자국이 있는 것은 그때 흘린 호랑이의 피랍니다. 그리고 하늘에 올라간 오누이는 해와 달이 되었다지요.


우리 시대의 호랑이와 깨어나는 젊은이

물론 이 이야기는 호랑이보다 더 가혹하고 무서운 관리들에 대한 민중들의 야유이자 고발이겠습니다만, 이 이야기에 나오는 호랑이는 지금도 여기저기서 출몰하고 있습니다. 그 호랑이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면서 우리를 유혹합니다. 호랑이는 믿음, 소망, 사랑, 신의, 정의, 이웃간의 정, 조화로운 삶과 같이 우리 삶에 가장 소중한 것들을 하나하나 빼앗아갑니다. 나중에는 밀가루를 발라 자기 정체를 숨기고 목소리까지 교묘하게 변조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행복하려면 이 정도 브랜드의 옷과 핸드백은 필수이라고 말합니다. 돈이 없다고 말하면 신용카드가 있지 않느냐고 귀띔까지 해줍니다. 어떤 때는 이 호랑이는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은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거나, 어떤 나라는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힘을 행사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호랑이가 하려는 일은 결국은 제 배를 채우기 위해서임을 말입니다.

우리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가려듣는 조심스러움이 필요합니다. 모습이 아무리 어머니를 닮았어도 행동거지를 보면서 호랑이의 정체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유두고처럼 영혼의 잠을 자다가는 호환을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청년들이 깨어나야 합니다. 저는 성경에서 가장 희망적인 구절을 찾으라 한다면 시편 110편 3절을 들고 싶습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 그들은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줄 아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이들입니다.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었던 위대한 지도자 여호수아의 젊은 시절을 밝혀주는 구절이 성경에 나옵니다. 그는 모세를 곁에서 모시는 사람입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을 나누고 진으로 돌아가도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였다"(출33:11) 합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사사였던 사무엘도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전 안에 늘 머물러 있었습니다. 젊은 날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라야 큰 혼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청년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딤후2:22)


호랑이가 도처에서 출몰하는 세상입니다. 호랑이가 무섭다고 숨만 죽이고 살 수는 없습니다. 호랑이에 맞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럴 만한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 힘은 외적인 힘이 아니라, 내적인 힘입니다. 불의의 태풍이 우리에게 몰려와도, 시련의 풍랑이 우리를 덮여도 우리 속에 있는 신뢰의 등불이 꺼지지 않아야 합니다.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겪었던 오누이는 하늘에 올라가 온 누리를 비추는 해와 달이 되었습니다. 삶이 제 아무리 힘겨워도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것입니다.

어느 날 나인 성에 가까이 가신 예수님 일행은 장례행렬과 마주쳤습니다. 울고 있는 어머니를 보면서 마음이 아파진 예수님은 관에 손을 대고 외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7:14). 청년은 곧 일어났습니다. 저는 이 세대의 젊은이들이 주님의 이 음성을 듣고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무기력한 방심상태에서 깨어나십시오. 이 세대의 가치관을 맹목적으로 답습하던 삶에서 벗어나 하늘의 뜻을 따라 새로운 삶을 꿈꾸십시오. 지난 시절의 젊은이들은 세상을 좀 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에 자기를 바쳤습니다. 그들 덕분에 세상은 조금 더 밝아졌습니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우리 시대의 어둠과 맞서 싸우는 전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파시즘적인 자본주의가 조장하는 소비주의의 호랑이와 싸우십시오. 땅의 현실에 매여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염려에 붙들린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헌신하는 새벽 이슬 같은 이들이 되십시오. 물론 이것은 청년뿐만 아니라, 부름 받은 우리 모두의 일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해서 우리 교회의 젊은이들이, 그리고 교우들 모두가 새로운 소명에 따르기 위해 몸을 일으키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