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39. 아라우나의 헌신
설교자
본문 삼하24:18-23
설교일시 2002/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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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우나의 헌신
삼하24:18-23
(2002/9/29)


개구리 올챙잇적 생각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형편이 좀 나아졌다고 해서 지난 시절의 곤고했던 처지를 잊고 방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히브리의 시인은 이런 이들을 가리켜 '그들의 심장은 기름기로 굳어졌고 그들의 입은 오만불손'(시17:10)하다고 말합니다. 재산이 늘어나고, 지위가 높아지고, 명성을 얻게 되어도 과거의 소박함과 겸허함을 간직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첫 마음을 잃지 않고 언제나 한결같은 사람을 보면 '향기'가 나는 듯합니다. 내가 뭔가 대단한 일을 이루었구나 생각하는 순간 영혼의 추락이 시작됩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둔 백성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또 당신들의 소와 양이 번성하고, 은과 금이 많아져서 당신들의 재산이 늘어날지라도, 혹시라도 교만한 마음이 생겨서, 당신들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신8:14)


흔히 부유함과 편안함은 우리 영혼을 잠식하는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그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사람들은 자기의 뿌리를 잊어버립니다. 자기가 누구 덕분에 이 자리에 있는지를 잊는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누구도 그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스스로 그 위대함에 도취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생의 말년에 이르러 신산스러웠던 자기의 생을 돌아본 것 같습니다. 다윗의 생을 수식하는 데는 '파란만장'이란 말만으로는 부족할 지경입니다. 유대광야의 목동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이스라엘의 위대한 임금으로 우뚝 서기까지 그는 정말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치는 기억의 편린들을 아련하게 떠올리던 그는 문득 자기의 업적을 가시적으로 확인해보고픈 욕망에 사로잡혔나 봅니다. 그래서 다윗은 요압 장군을 불러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고 명합니다.

요압은 그것이 매우 위험한 발상임을 알아차립니다. 인구조사 자체가 위험한 일이어서가 아니라, 안개처럼 피어나 다윗의 마음을 온통 채워버린 위험한 욕망, 명예에 대한 욕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압은 조심스럽게 왕에게 진언(進言)을 합니다. 백성이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 속한 일이지 왕의 능력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욕망은 눈을 멀게 한다

하지만 이미 욕망에 눈이 어두워진 다윗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는 역
정을 내면서 거듭 신속한 인구조사를 명합니다. 다윗의 인구조사, 그것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려는 무의식적인 욕망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공적을 헤아리기 좋아합니다. 페르시아 전쟁이 벌어졌을 때 그리스에 속한 폴리스들은 동맹을 맺어 페르시아와 싸웁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어 전쟁이 끝나자, 그리스의 장군들은 누구 공이 제일 큰가를 놓고 투표를 했습니다. 그런데 투표에 참여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이름을 써넣고, 다음으로 공이 있는 사람으로는 한결같이 테미스토클레스의 이름을 적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최고의 영예인 올리브관을 주었다고 합니다. 힘이 있는 사람은 그 힘을 과시해보고 싶어합니다. 그 힘으로 다른 이들을 굴복시켜보려 합니다. 요즘 미국과 독일의 관계가 심상치 않습니다. 독일의 국방장관인 페터 슈트르크가 부시를 히틀러에 비유한 데서 비롯한 이 갈등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미국은 전 방위적으로 독일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외교적인 관례에 어긋나는 행동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항복하라는 것이지요. 저는 세상 돌아가는 일을 보면서 노자의 말을 새삼스럽게 되뇌이게 됩니다.


"공을 이루면 몸이 물러남은 하늘의 도이다"(功成身退天之道, 老子 제9장).

"만족할 줄 아는 자는 치욕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아는 자는 위태롭지 않으니 길이 살 수 있다"(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老子 제46장)


하지만 욕망에 사로잡힌 영혼은 멈출 줄을 모릅니다. 그러면 어찌 해야 하나요? 결국 갈 데까지 가야겠지요. 요압은 인구조사를 시작한지 9개월 20일 만에 다윗에게 돌아와 이스라엘에는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장정만 팔 십만이 있고, 유다에는 오 십만 명이 된다고 보고합니다. 대단한 수입니다. 다윗은 스스로 대견하여 흡족해하고 있을 때 자기가 한 일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용서를 청합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으리' 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갓을 보내셔서 당신의 진노하심을 전하게 합니다. 이제 징계는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세 가지를 놓고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칠년 기근의 벌을 받을 것인가, 석 달 동안 외적에게 쫓길 것인가, 아니면 사흘 동안 전염병이 퍼지게 할 것인가? 다윗은 주님의 자비하심을 바라면서 사흘 전염병을 택합니다. 마침내 전국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더니 며칠 사이에 칠 만 명이 죽었습니다. 다윗의 자부심의 근거였던 백성들이 그렇게도 속절없이 스러진 것입니다. 그는 자부심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느꼈을 겁니다. 다윗이 그 순간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 밖에 없습니다.


바로 내가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바로 내가 이런 악을 저지른 사람입니다. 백성은 양 떼일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나와 내 아버지의 집안을 쳐주십시오.(17)


저는 다윗의 위대함을 여기서 봅니다. 그는 때로 큰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자기의 잘못을 시인할 줄 알뿐만 아니라,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든 책임을 지려 합니다. 다윗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자연히 우리의 현실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는 정치인들과 지도자들이 성인처럼 살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정책결정에 있어서 완벽하기를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성심껏 나라를 위해 일하고, 그러다가 잘못한 일이 있을 때는 자기 잘못을 정직하게 시인하고 하나님 앞에서, 역사 앞에서, 그리고 국민들 앞에서 용서를 청하는 지도자들을 보고 싶습니다. 아니, 우리들 스스로가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은자 아라우나

하나님은 죽음의 천사가 손을 들어 예루살렘을 치려는 순간 '이제 그만 하면 되었으니 그 손을 거두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려올 때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와서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으로 가서, 거기서 주님께 제단을 쌓으라고 권합니다. 누구 말이라고 거역하겠습니까? 그는 즉시 일어나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으로 올라갑니다. 아라우나는 지극한 공경심으로 왕을 맞이합니다. 그는 "그대에게서 이 타작 마당을 사서, 주님께 제단을 쌓아서,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고 하오" 하는 왕의 말을 듣는 순간, 왕이 원하신다면 모든 것을 다 바치겠노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축원의 말도 덧붙입니다.


주 임금님의 하나님이 임금님의 제물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23)


참으로 어진 백성입니다. 다윗은 거저 얻은 것으로 하나님께 번제를 바칠 수는 없다면서 굳이 아라우나에게 값을 치르고 타작 마당과 소를 사서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바칩니다. 다윗은 '땅을 돌보아 달라'고 간절히 주님께 빕니다. 주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오만에 빠진 왕, 영적인 암매에 빠진 왕의 잘못된 선택이 백성 전체에게 큰 화를 초래했습니다. 선장이 항로를 잘못 잡으며 배에 탄 사람들 전체가 위험한 지경에 빠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성경에 이 대목에만 나오고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 위대한 혼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아라우나는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고 자기의 모든 것을 내놓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했던 마리아의 전조를 봅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십니다" 하는 말을 듣고는 곧 나귀를 제자들에게 넘겨주었던 벳바게의 어진 농부의 뒷모습을 봅니다. 아라우나가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만 나중에 그의 타작마당 위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졌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가죽나무를 닮은 사람

시인 도종환의「가죽나무」라는 시를 보면서 저는 아라우나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나는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
내딴에는 곧게 자란다 생각했지만
어떤 가지는 구부러졌고
어떤 줄기는 비비 꼬여 있는 걸 안다
그래서 대들보로 쓰일 수도 없고
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다만 보잘것없는 꽃이 피어도
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 있으면 나도 기쁘고
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 마리 있으면
편안한 자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가죽나무는 사람들의 요구를 다 채워주지 못한다고 비웃는 소리가 들려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자기가 볼품없는 존재임을 오래 전부터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내 몸의 가지 하나라도
필요로 하는 이 있으면 기꺼이 팔 한짝을
잘라 줄 마음 자세는 언제나 가지고 산다
부족한 내게 그것도 기쁨이겠기 때문이다


가죽나무는 '나를 줄 수 있어 기쁘다'고 말합니다. 아라우나는 이런 가죽나무를 닮은 사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는 온 백성에게 화를 초래한 다윗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원망이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라우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라도 하려고 합니다. 비록 이름없는 들풀처럼 피었다 지는 인생이라 해도, 자기를 즐거이 바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다윗의 참회 그리고 아라우나의 헌신이 만난 곳, 바로 그곳에 성전이 세워졌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의 삶의 자리, 바로 그곳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 되어야 합니다. 그곳이 바로 평화와 사랑의 샘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 시대의 아라우나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