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40. 몸이 된 말씀
설교자
본문 눅24:28-35
설교일시 200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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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된 말씀
눅24:28-35
(2002/10/6, 세계성찬주일예배)


얼이 뜬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최근에 겪은 참담한 경험을 되새기며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 길은 몇 해 전 그들이 희망에 들떠 걷던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길은 절망의 길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온갖 음모와 파괴, 그리고 살인행위를 목격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괴롭힌 것은 억압과 불의로부터 백성을 구할 것이라 믿었던 이에 대한 희망의 상실이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30리 밖에 안 되는 길이었지만 그 길은 그들에게 아득하게 느껴졌습니다. 꿈과 희망을 상실한 이들에게 남은 것이라곤 권태와 무기력 뿐이었을 테니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들 곁에 슬며시 낯선 사람 하나가 다가와 말을 건넵니다. 몇 마디 말이 오갔지만 그 나그네는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그 슬프고도 참혹한 이야기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두 제자는 등에 짊어진 무거운 짐을 부리듯이 자기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그 울울한 심사를 나그네에게 털어놓습니다. 자기들이 예수라는 나사렛 사람에게 걸었던 기대, 그와 함께 지내면서 맛보았던 감격과 희망, 그의 비극적인 최후, 그로 말미암아 자기들에게 찾아온 절망의 어둠, 그리고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이 전해준 빈 무덤 이야기……


외면된 현실

말없이 이야기를 듣던 그 낯선 나그네는 그들이 한숨 속에 이야기를 마치자, 그들의 둔한 마음을 꾸짖습니다. 그는 토라와 예언서를 두루 인용해가면서 메시야는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고, 그 고난을 겪은 후에야 하나님의 영광에 들게 되신다 하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구원사의 어두운 부분을 외면하고 영광과 승리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제자들이 외면하고 있었던 그 부분을 또렷하게 상기시킵니다. 두 제자가 비로소 예수의 고난이 메시야가 겪을 수밖에 없는 고난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러자 최근에 자기가 겪었던 일에 돌연 하늘이 빛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희망의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의 시작일 수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그들은 엠마오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그 나그네는 길을 더 가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아쉬웠습니다. 그분으로부터 뭔가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에 제자들은 그 나그네를 자기들의 집에 청합니다. 나그네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청을 받아들입니다. 제자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식탁을 차립니다. 그리고 등불을 켜 집안을 밝혔습니다. 렘브란트는 그의 에칭화인 [엠마오에서의 식사]에서 중심에 앉으신 나그네가 발산하는 빛을 등불 빛보다 더 밝게 그렸습니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 나그네는 떡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는, 그것을 쪼개 나누어주었습니다. 그것은 유월절 만찬을 상기시키는 것이었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누었던 최후의 만찬을 상기시키는 행위였습니다. 그들은 왠지 모를 외경심에 차서 그가 나누어주는 떡을 받아먹었습니다. 그 순간 제자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들은 나그네가 예수님이심을 알아차렸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신비로운 빛만을 남기고 사라진 예수, 그는 제자들의 전 존재 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그들이 먹은 그 빵이야말로 찢기운 예수님의 살이었던 것입니다.


경험 나누기

그들은 경이로움 속에서 자기들의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모든 것이 확연해졌습니다.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또 그 신비로운 식사를 통하여 그들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들은 이제 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슬픔과 낙담으로 미처 보지 못했던 위대한 현실을 말입니다. 그들의 영혼을 뒤덮고 있던 너울은 벗겨졌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자기들의 경험을 다른 동료들에게 나누어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절망감에 터덜터덜 걷던 그 길을 그들은 나는 듯이 달려갑니다. 예루살렘의 그 비밀 회합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다른 제자들로부터 주님이 확실히 살아나셨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들은 감격에 차서 자기들이 방금 겪은 모든 일을 증언합니다. 그 밤, 제자들의 가슴에 활활 타올랐을 불꽃을 생각만 해보아도 감격스럽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주님이 그들 가운데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인사를 건네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놀랍지 않습니까? 최후의 말은 '죽음'이 아니라 '평화'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셨던 분, 제자들에게조차 배신당하셨던 분이 결국 세상에 가져오려는 것은 바로 '평화'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평화에로 초대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누는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곧 육신이 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룩한 삶으로, 거룩한 공동체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거룩한 친교로 부름 받고 있습니다. 도처에서 분쟁의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만, 주님은 지금도 우리 속에 '평화'로 임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떡을 먹는 순간 엠마오의 두 제자의 눈이 열렸던 것처럼 우리의 눈도 열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오신 말씀으로 뜨거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절망과 좌절의 길을 거슬러 올라 마침내 평화의 도구로 귀하게 쓰임 받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