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43. 걸림돌, 디딤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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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눅21:5-6, 엡2:19-22
설교일시 2002/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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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림돌, 디딤돌
눅21:5-6, 엡2:19-22
(2002/10/27, 종교개혁기념주일)


상품화된 종교를 넘어서서

종교개혁기념주일인 오늘 제게는 새삼스럽게 몇 달 전 신문에서 본 기사가 떠오릅니다. 가톨릭, 개신교, 불교 등의 평신도 연대 조직인 '개혁을 위한 종교 엔지오 네트워크'는 종교의 기본인 청빈과 자정의 정신을 일깨우는 차원에서 석 달에 한 번씩 '오늘의 종교 디딤돌과 걸림돌'을 선정해 발표하기로 했다는 기사였습니다. 종교NGO네트워크는 취지문에서 "오늘의 한국종교는 천민자본주의적 경향인 물신주의와 물량주의 영향하에 종교의 상품화와 산업화가 심각하며 이른바 '영혼주식회사'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면서 "종교의 기본정신이 수행과 사랑의 실천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상품화'는 성직자와 교인들이 상호 연대 속에 오로지 개인의 질병 치유와 육체적 건강, 취업과 승진, 진학과 사업번창을 위한 기복신앙에 머무르고 각종 재정의 사유화와 불투명, 성직자의 권위주의를 초래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오늘의 종교 디딤돌과 걸림돌 상'은 "이러한 종교 상황을 타파하고 성직자의 청빈과 자정의 정신을 일깨우고 평신도(재가)들에게는 섬김과 나눔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오늘의 종교 디딤돌 상'의 대상 기준은


▲경건하고 청빈한 삶을 추구하는 종교인
▲소외된 이웃을 위한 나눔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단체나 종교인
▲건전한 사회를 위해 기부활동에 적극 참여하거나 기부문화 활성화에 기여하는 종교인이나 단체
▲종교재정을 투명하게 운영하는 종교인이나 단체입니다.


반면에 '오늘의 종교 걸림돌 상'은

▲부정비리에 연루되거나 비도덕적 행위로 물의를 일으킨 종교인이나 단체
▲물량주의적 종교시설 건축과 과다소비성 행사를 벌이는 종교인이나 단체
▲종교재정을 사유화하는 종교인이나 단체가 받게 됩니다.


상(賞)이라는 게 본시 '아름답거나 좋은 것을 기리는 것'인데, '걸림돌 상'이라는 게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이 상의 수상자, 혹은 수상 단체로 선정되면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겁니다. 이 기준을 거울삼아 가만히 우리들 자신의 모습과 교회의 현실을 진단해보십시오. 스스로에게 '나는 디딤돌인가 아니면 걸림돌인가?'를 물어보십시오. 우리는 그 동안 너무 외형적인 성장에 집착해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잘 산다는 것과 못 산다는 것을 GNP(Gross National Product, 국민 총생산) 혹은 GDP(Gross Domestic Product, 국내 총생산)의 수치로 환원해서 판단했다는 말입니다. 사실 행복이나 성공이 그렇게 계량화될 수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거기에 집착해왔어요. 사과나무 아래에서 낮잠을 자다가 사과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하늘이 무너진 줄 알고 달리던 토끼, 또 토끼가 뛰니까 덩달아 따라 뛰던 다른 짐승들, 그게 다 웃고 넘어갈 이야기는 아닙니다.


예수 정신

교회의 성장도 마찬가지예요. 이제는 하도 말해서 입이 아플 지경이지만 교인수가 많아지고 교회 예산이 늘어나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이 성장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복음적인 성장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모임다운 내실이 있는가? 우리 인격과 영혼이 맑고 깊고 따뜻한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성장하는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외적으로는 성장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리스도의 인격과 정신의 고갱이가 빠져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복음의 정신을 왜곡하는 '걸림돌'이기 십상입니다. 저는 예수 정신은 소박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꾸밈이나 거짓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 말입니다. 예수 정신은 도회적인 세련됨과는 좀 거리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투박하고 조촐해 보이지만 내실을 갖춘 분, 예수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전의 아름다움과 사람들이 가져다가 장식해놓은 여러 가지 헌물들을 바라보며 감탄사를 늘어놓는 것을 보신 예수님은 그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좀 심하신 것 같지요?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보고 계십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철저히 무너져내려 폐허가 되어버린 성전을 말입니다. x-ray를 찍으면 우리 속에 있는 골격이 그대로 드러나듯이, 예수님의 시선은 성전의 외적인 번성함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부터 붕괴되고 있는 조짐을 더듬고 계신 것입니다.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의 차이가 이렇습니다. 내일 일을 모르는 게 사람입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길 가고 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주님 예수 팔 내미사 내 손잡아 주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날 붙드사 평탄한 길 주옵소서


많은 이들이 이 곡을 부를 때 애상에 잠깁니다. 이 곡은 자칫 잘못하면 충족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자포자기적인 심정을 신앙심으로 포장하는 것이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살이처럼 산다는 말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염려를 접고 하루를 영원에 잇대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애상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현실은 미래와 연결되어 있는 현실입니다. 외양만을 좇는 이는 성전의 위용에 감탄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는 예수님은 성전의 무너짐을 내다보며 가슴 아파하십니다.


무너진 중심

며칠 전에 엉덩이에서 허벅지에 이르는 부분에 기분 나쁜 통증이 느껴져서 그 부분에 파스를 붙여두었는데도 통증이 없어지기를 않더군요. 그런데 어느 분이 그 이야기를 듣더니 대장이 예민해져 있고,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젖산인지 요산인지가 몸에 축적되어서 그렇다고 하면서 제 등줄기를 따라 지압을 해주셨습니다. 그분의 손이 약손이었는지 통증이 정말 거짓말처럼 사라졌어요. 몸의 이치를 알지 못하면 허벅지에 파스나 붙이는 거고, 이치를 알면 척추의 어느 부분을 풀어주는 것이지요. 결과는 항상 원인이 있게 마련입니다. 새로 지은 집 벽이 갈라지면 집주인은 대개 그 부분을 가리기 위해 벽지를 덧바릅니다. 그래도 갈라짐을 막지 못하면 그 다음에는 실리콘이나 시멘트로 그 틈을 메우려 합니다. 하지만 이건 해결이 아니지요. 문제는 건물의 중심이 잘못 놓였다는 것입니다. 중심이 바로 잡히면 그 위에 많은 무게가 실려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중심이 흔들리면 작은 무게도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아름다운 성전에서 무너진 중심을 보셨던 것입니다. 인애와 공평은 사라지고, 종교의 외양만 남아 성전이 사람들의 올무가 되고 있음을 보면서 예수님은 탄식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교회는 과연 예수라고 하는 중심을 굳게 세우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종교개혁기념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만 '종교' 그 자체가 개혁의 대상인 것은 아닙니다. '宗敎'는 '으뜸되는 가르침'이란 뜻인데, 으뜸되는 가르침이 세월이 바뀌었다고 바뀔 수는 없습니다. 개혁되어야 할 것은 그 가르침에 덧붙여진 군더더기들입니다. 개혁이라 할 때의 '革'은 '가죽'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가죽 '皮'와는 다른 의미입니다. '皮'가 동물의 몸에서 벗겨내기 이전 혹은 막 벗겨낸 가죽을 뜻한다면, '革'은 벗겨낸 가죽을 무두질하여 새롭게 만든 가죽을 뜻합니다. 즉 '革'에는 무두질의 과정이 포함되는 겁니다. 무두질을 하지 않으면 가죽은 물크러진 살과 더불어 썩게 되지요. 하지만 기름기와 수분을 걷어내면 더 이상 썩지 않는 가죽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불멸을 얻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려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이 때문입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냐고 묻던 젊은 부자에게 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셨던 것은 결국 그 재물이 그의 얼을 썩게 할 것임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은 자꾸만 자기를 개혁해나갑니다. 무엇을 향해서요? 본질적인 생명을 향해서. 우리는 예수라는 생명을 향해 날마다 우리를 개혁해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무두질을 당하는 고통의 과정이라 해도, 그래야 우리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이들이 될 것입니다.


중심 바로 세우기

예수 정신이라는 본질을 잃어버린 교회가 오늘 추문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 공의와 사랑을 외면하면서 스스로의 화려함에 도취된 당시의 종교를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암5:21-24)


예언자들이 목이 터져라 외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몸을 다 바쳐 구현하려 했던 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바로 서고, 하나님의 사랑이 강처럼 흐르는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일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이런 새 하늘과 새 땅의 모퉁이 돌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그것이 예수 정신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전거 바퀴가 굴러갈 수 있는 것은 바퀴살들이 굴대의 중심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듯이, 예수 정신 아닌 것이 교회의 중심 노릇을 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 중심이신 예수와의 관련 속에서 각자의 일에 충성스러운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가게 됩니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 아버지 집을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주님의 불호령을 남의 집 이야기 듣듯 들어서는 안 됩니다. 칼릴 지브란은 예수님을 가리켜 '그는 모든 사람을 시인이게 하는 시인'이라 했습니다. 예수와 만난 사람은 세상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됩니다. 시몬은 베드로가 되고, 사울은 바울이 됩니다. 종교개혁이란 다른 것 아닙니다. 화려함과 풍요로움을 좇느라 잃어버렸던 예수 정신을 되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바고 잡으려는 뜻만 있다면 주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비본래적인 것들을 청산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무두질을 통해 썩지 않는 가죽을 얻는 것처럼, 날마다 우리의 교만과 위선과 태만의 기름기들을 갈고 닦고 말리는 과정을 거쳐 우리는 불멸의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종교의 걸림돌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향한 힘찬 도약대, 곧 디딤돌이 되기를 바랍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