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44. 거대한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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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골2:1-7
설교일시 200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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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뿌리
골 2:1-7
(2002/11/3)


고요히 앉아본 뒤에야

11월이 되었는데도 아직 거리의 은행나무는 푸른빛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은 고요하고, 하늘은 드높습니다. 참 좋은 때입니다. 立冬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맘 때가 되면 옛 사람들은 김장 준비를 하고, 방고래에 쌓인 재를 걷어내고, 바람벽에 맥질도 하고, 문에 창호지도 새로 바르고, 쥐구멍도 막았습니다. 모름지기 초겨울은 살림살이를 잘 살펴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때입니다. 준비가 끝나면 조용히 들어앉아 자기를 살펴볼 일입니다. 옛사람의 글을 읽다가 공감되는 대목을 만났습니다.


고요히 앉아본 뒤에야 보통 때의 기운이 경박했음을 알았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조급했음을 알았다. 일을 되돌아본 뒤에야 전날에 시간을 허비했음을 알았다. 문을 닫아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예전의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다. 정을 쏟은 뒤에야 평일에 마음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다. ―『안득장자언』


이 계절은 모질고 각박했던 마음씀을 돌이켜보며 사람다움을 회복하라고 주신 주님의 선물이 아닐는지요? 흐르는 물에 우리 모습을 비추어볼 수 없는 것처럼, 쫓기듯 사노라면 자기를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고요히 앉아보아야 합니다.


공교한 말에 속지 말라

오늘의 본문은 우리 신앙생활의 면모를 비추는 거울이 되고 있습니다. 루코스 강 연안에 위치한 세 도시, 골로새·히에라폴리스·라오디게아에 교회를 설립한 것은 바울 사도의 동역자였던 에바브라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아름답게 성장해가던 이 지역의 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4절은 그들이 '공교한 말'(specious arguments)로 사람들을 속였다고 하는데, 이때 공교한 말이란 '남을 설득시키는 힘을 가진 언사'를 뜻합니다. 그들의 말은 참 그럴듯했던 것입니다.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를 보면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들을 홀려 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사이렌'이라는 괴물이 나옵니다. 사이렌의 노래에 홀린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배를 그곳으로 몰아가다가 바위에 부딪쳐 죽고 맙니다. 그 이야기는 인간 세상에서 '파멸'과 '죽음'이라는 것이 일쑤 '아름다움'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거짓교사들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거룩한 날들을 지켜야 하고, 먹어야 할 음식과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잘 구분해야 하고, 금욕적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럴듯한 말이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함을 얻는다는 이야기는 아직 그 세계를 직접 맛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싱거운 말처럼 들립니다. 뭔가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점이 있어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거짓교사들의 말솜씨에 넘어가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이단종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기존의 교회를 부정하면서, 자기들은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이렌의 노랫소리에 끌리듯 그곳으로 몰려갑니다. 하지만 그들은 영혼을 도적질하는 자들입니다. 진리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소박하고, 쉽습니다. 누구나 알 수 있고, 누구나 실천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알 수 없고, 실천할 수도 없다면 진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많이 배운 사람이라고 해서 잘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배워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문제입니다. 신학박사가 되어도, 목사가 되어도 진리를 체득하지 못한 이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배운 것이 없어도 예수의 핵심과 만난 사람은 진리를 아는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는 안타깝습니다. 바른 길을 벗어나 미혹의 산길을 헤매는 이들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바울이 골로새의 교인들에게 일깨우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는 것"(2)입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기"(3) 때문입니다. 우리는 잠시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말과 '감취어 있다'는 말 때문에 혼란스럽습니다. 진리는 쉽다고 했는데,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말대로라면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분명하게 드러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지금은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심을 드러냅니다. 사람은 누구나 누군가를 가리키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다'는 말은 그분이야말로 생명이고 진리이고 길이라는 말입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들은 그분을 한 사람의 목수로, 사회 불안을 야기하는 위험한 인물로 보았습니다. 다소 마음의 눈이 열렸던 이들은 예언자의 모습을 보았고, 그분의 핵심과 만났던 이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의 교우들도 그런 깨달음에 이르기를 소망합니다. 테이야르 드 샤르댕이라는 신학자는 예수님은 인류의 오메가 포인트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인류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목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안에 참 사람의 길이 있고, 참 생명의 길이 있고, 참 행복의 길이 있습니다.


생의 모델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충만한 생명을 살고 계십니까? 참 괴로운 질문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행복하지만 더 많은 순간 불만 속에 살아갑니다. 때로는 살아있음에 기뻐하다가도 다음 순간이면 공허함에 시달립니다. 왜 그럴까요? 아직도 핵심을 잡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알고 나니까 이전에 자기가 자랑거리로 여기던 것들이 오히려 진리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했습니다(빌3:8). 돈도 명예도 권세도 학식도 그의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다메섹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의 방황은 끝났습니다. 그가 찾아 헤매던 '한 얼굴'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골로새의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생의 모델로 삼아 살아갑니다. 누구를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내용이 결정됩니다. 아니, 생의 지향에 따라서 바라보는 것이 다르다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똑같은 거리를 걸어도 어떤 이들은 서점을 보고, 어떤 이들은 옷가게를 보고, 어떤 이는 미장원을 봅니다. 이런 것을 심리학의 용어로 '선택적 주의'라 하더군요. 예수를 주로 영접했다는 말은 예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예수의 마음으로 현실을 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의 고통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살 수 없습니다. 수해로 집을 잃고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겨울을 맞이하는 이들, 전쟁의 공포 속에 떨고 있는 이라크와 체첸 그리고 북한 동포들, 일자리에서 내쫓긴 노동자들, 일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사람들,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의 한숨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모든 인간 고통을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 사회 체제에 항의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일에 동참하고, 우리 눈앞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 이것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거대한 뿌리

바울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든든히 서기를 기원합니다. 뿌리는 눈에 보이는 부분이 아닙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돌 틈을 헤집고 들어가기도 하고, 다른 나무 뿌리와 뒤엉키기도 하고, 흙의 가슴을 꼭 움켜쥠으로써 나무를 지탱해줍니다. 뿌리는 바로 믿음의 세계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면서 우리 삶을 든든히 세워주는 것 말입니다. 뿌리가 병들면 나무는 시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작고한 김수영 시인의「거대한 뿌리」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전략)
第三人道橋의 물 속에 박은 鐵筋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怪奇映畵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想像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척박하기는 하지만 결코 조국을 버릴 수 없는 한 시인의 사랑이 이렇듯 뜨겁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 이런 단호한 결의가 있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구조물이라 해도 좀벌레의 솜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이런 확고한 결의 말입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믿음에 굳게 선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좀스럽지 않습니다. 사소한 이익과 손해에 따라 웃고 울지 않습니다. 그는 늘 큰 기쁨 속에 삽니다. 하나님의 일에 초대받은 기쁨, 그리고 그분의 일에 동참하는 기쁨, 그것은 어느 누구도, 어느 무엇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도 때로는 슬픔과 고통, 그리고 고독을 경험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근본적인 기쁨을 덮을 수는 없습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말(고전13:6)은 이것입니다.

쾌청한 초겨울 하늘을 보며 하나님 안에 있는 이, 그리스도의 마음에 뿌리 내린 이의 기쁨을 생각해봅니다. 때로 구름이 일어 하늘을 가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구름이 끼었다 해서 본래 깨끗한 하늘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구름 낀 날에도 우리 마음은 구름 너머에 있는 푸른 하늘을 향합니다. 이 아름다운 초겨울 날, 우리 모두 믿음에 굳게 서서 힘차고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