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45. 섬김에 넉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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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고후9:6-12
설교일시 2002/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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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에 넉넉하라
고후9:6-12
(2002/11/10)


참된 교회의 네 가지 본질

신학자들은 참된 교회의 본질을 네 가지 단어로 표현합니다. 하나(one)의 교회, 거룩한(holy) 교회, 사도적(apostolic) 교회, 보편적(catholic) 교회가 그것입니다.

세상에 교회는 많지만 본질적인 차원에서 교회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활동하시는 하나님이 한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4-6)


거룩한 교회라는 표현은 다소 당황스럽습니다. 현실의 교회는 죄많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 과오도 많이 저질렀고,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어느 원로 목사님(조찬선)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기독교 죄악사』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를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근거에서일까요? 그것은 교회가 자신의 죄 많음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거룩을 지향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는 죄인된 우리를 불러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귀의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세상을 섬김으로써 거룩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적 교회란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셨던 일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본질로 삼는 교회를 뜻합니다. 교회는 병든 이들을 치유하고, 귀신 들린 자들을 온전하게 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유의 복음을 선포할 때 본래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편적 교회란 예수님이 세상의 모든 분리의 장벽들을 무너뜨렸듯이, 사람들을 갈라놓는 일체의 편견이나 배타성을 극복하는 것을 소명으로 삼는 교회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4-16a)


마게도냐 교회의 모범

저는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 교회를 이 기준에 비추어 일일이 설명하는 일은 그만두겠습니다. 다만 개교회주의와 교회 성장주의가 교회의 본래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는 말씀만 드리고 싶습니다. 초대교회는 그런대로 참 교회의 본질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죄로부터의 철저한 돌이킴이 있었고, 사도들의 가르침에 대한 사모함이 있었고, 성도들이 좋은 것을 함께 나누는 등 공동운명체로서의 일치감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자기들과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라 해도 성도들이 겪고 있는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저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기근으로 삶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을 때, 소아시아와 유럽에 설림된 교회들이 자발적으로 의연금을 모아 전달한 사건을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로 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을 통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었다는 감격을 맛보았고, 또 그것을 통해 그들의 믿음이 한 단계 성숙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게도냐 교회의 헌신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박해 속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해는 믿음의 사람들을 좌절시킬 수 없었습니다. 막대기로 두드릴수록 들불이 더 넓게 번져가듯이, 시련은 오히려 그들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었고, 든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경외심에 가득 차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8:1-2)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극한 가난 속에서도 오히려 성도들을 돕는 일에 동참할 수 있다는 기쁨을 맛보았다는 말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저는 고린도후서 8장 1절부터 5절로부터 그들의 섬김이 얼마나 순수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세 구절에 주목합니다.

1) '우리에게 간절히 구했다'(begging)
2) '힘에 지나도록 하였다'(beyond their ability)
3)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다'(gave themselves first to the Lord)

그들은 마지못해 의연금을 모은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에 참여할 수 있기를 마음을 다해 원했던 것입니다. 체면치레가 될 만큼만 모은 것도 아닙니다. 자기들의 형편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자신을 주님께 바친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넉넉한 섬김을 위하여

바울 사도는 고린도의 교인들에게 마게도냐의 예를 들려주면서 연보를 할 때 피해야 할 두 가지 태도를 지목합니다. 하나는 인색함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억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외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보내주셨습니다.

물론 나와 가족들을 위한 일이 아닌데 돈을 내놓는다는 게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가만히 꼽아보면 할 일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돈이라는 게 움켜쥔다고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누어야 할 때 기쁨으로 나누는 것이 진짜 부자가 되는 길입니다. 히브리의 지혜자는 말합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11:24-25)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주시리라.(잠19:17)


남을 복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하늘의 법칙입니다. 바울도 말합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고후9:10)


이 말씀이 안 믿어지십니까?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는대로 사십시오. 복있는 삶이 그곳에 있습니다.


우리교회의 꿈

지난 주간에 저는 윤장로님과 오집사님과 우리가 선교비를 지원하고 있는 몇 개의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어느 곳에 가든 가슴이 참 아팠습니다. 태백에 있는 금천교회는 교회 건물은 번듯했습니다. 광산이 문을 닫기 전에는 70여명의 교우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노인들 10명이 전부입니다. '검은 내'를 뜻하는 금천이라는 지명처럼 석탄처럼 검게 타버린 그곳 사람들의 마음이 보이는 듯해서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그곳 교인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희망의 불빛이 꺼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곳에서 정동진을 향해 가다가 올 여름에 가장 큰 수해를 입은 삼척시 미노면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수해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현장을 바라보면서, 수해민들의 가슴에 든 멍 때문에 우리 하나님이 가슴앓이를 하고 계시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천에 있는 부촌교회도 형편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컨테이너로 세운 가건물에서 15명쯤 되는 교인들과 예배를 드리고, 마을 주민들을 섬기는 일에 전도사님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노인들에 비해서 한없이 거칠어진 젊은 세대들의 마음을 어떻게 어루만져야 할지 몰라 난감해 하는 전도사님의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남양주에 있는 도농 예광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새로 조성되는 소도시에 교회를 세운지 약 2년이 지나면서 이제 약 15분의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재정 자립은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인지라 목사님은 도서관으로 공공근로를 다니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주마간산격으로 다녀왔으니 그 교회들이 처해있는 구체적인 형편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만, 저는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너무 화려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그러면서 24년 전 여수에서 만난 선배 목사님이 하셨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라는데, 그게 왠지 허구 같아요. 발가락은 영양을 공급받지 못해 죽어가는데, 몸통은 영양과잉으로 병이 들었으니 말이에요. 한 군데만 아파도 몸 전체가 다 괴로운 법인데 도시 교회는 아프지 않나 봐요."

여러분, 우리 교회가 힘이 닿는 데까지 어려운 교회들을 돕고, 상처입은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도울 마음만 있다면 방법과 길은 하나님이 열어주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 교우들 모두가 나눔을 통해 더욱 풍요로워지는 삶의 이치를 발견하고, 나눔의 기쁨으로 삶이 충일해졌으면 좋겠어요. 주님은 우리를 청파교회라는 신앙공동체 속에 불러주셨지만, 우리는 '하나'의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도들을 돕고, 어려운 이들을 섬기라는 소명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섬기려는 것은 우리가 칭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우리를 통해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섬김의 일에 푼푼한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