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46. 기쁨, 관용, 감사,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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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빌4:4-7
설교일시 200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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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관용·감사·평안
빌립보서 4:4-7
(2002/11/17)


서로에게 맛다냐가 되라

저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서 느헤미야 11장에 나오는 맛다냐(Mattaniah)를 제일 부러워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감사의 찬송과 기도를 인도하는 지휘자였습니다. 이상한 역할처럼 생각되지만 그것은 아주 의미 있는 역할이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감사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일깨우는 역할은 영혼이 아주 예민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는 자기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모든 일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된 삶을 살지 않으면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은 모두 서로에게 맛다냐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저는 추수감사절을 맞으면서 내가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까닭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이 베푸신 은혜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하지만 굳이 두 가지로 압축해서 말하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인생의 푯대를 정하고 살게 되었다는 것이 그 첫째이고,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려는 당신의 일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셨다는 사실이 그 둘째입니다. 하나님의 초대를 받았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믿어주신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감사의 마음은 더욱 깊어져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더니, 하나님은 우리를 믿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믿음을 배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의 본문에서 성도들의 삶에 꼭 있어야 할 네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쁨의 사람

첫째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쁨의 사람들입니다. 청년 하나에게 "자네는 언제가 제일 기쁜가?" 하고 물었더니 '휴강되었을 때'라고 하더군요. 그러더니 좀 멋쩍었는지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았을 때라고 덧붙이더군요. 어느 교우는 아주 고요한 시간에 좋은 음악을 듣는 것과, 주일날 교우들을 만나는 것이 행복하다고 했어요. 아주 예쁜 교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휴강'은 아주 가끔만 있는 일이고, 예상치 못한 선물도 아주 드물게만 받는 것이고, 주일은 일주일에 하루뿐이라는 게 문제예요. 그럼 다른 날은 행복하지 않은 건가요? 바울 사도는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기쁨이 아니라, 항구적인 기쁨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는 비결은 '주님 안에'라는 말속에 담겨 있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은 죄와 탐욕을 버린 사람입니다. 욕망은 결핍의 감정입니다. 결핍은 채워지기를 갈구합니다. 그 채움을 위해 사람들은 무리수를 사용합니다. 그게 부정이고 부패입니다. 부정과 부패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됨에 거슬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얻기 전까지 영혼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것저것 쪼아대는 비둘기 떼처럼 분주하기만 합니다. '주님 안에' 있는 사람도 물론 어려움을 겪습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이 그를 좌절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시기도 하고, 느슨하게 풀어주시기도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 줄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알고 나면 용기가 납니다. 마음이 환해집니다. 그리고 내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관용의 사람

둘째는 관용입니다. 바울은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라"고 합니다. 관용이란 나와 다른 견해나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용납하는 것입니다. 아니, 더 적극적으로는 나와 다른 이들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관용의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소중한 것처럼 다른 이들도 역시 소중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르다'는 말과 '틀리다'라는 말을 혼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틀리다'는 두 비교대상 중 어느 한 쪽이 바른 것, 즉 참이고 다른 한 쪽이 그것과 다른 것, 즉 거짓일 때 거짓인 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르다'는 표현은 두 비교대상 중 어느 한 쪽이라도 참이냐 거짓이냐를 정할 수 없을 때 그 차이를 드러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서울에서 부산에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기차를 타고 갈 수도 있고,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고, 자전거를 타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용하여 사용하는 것은 무의식 중에라도 나와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배타성의 뿌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 하여 외면하거나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볼테르라는 프랑스 사상가는 "인간이라 불리는 티끌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 모든 사소한 차이들이 증오와 박해의 구실이 되지 않게 하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세상에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도 있고, 불쾌감을 자아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들도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관용의 마음으로 다른 이를 대할 때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이 됩니다.


감사의 사람

셋째는 감사입니다. 감사는 어지럽기 그지없는 우리 삶을 아름답게 정리해주는 것입니다. 삶이 힘겨워 비틀거릴 때라도 가만히 멈추어 서서 '감사합니다' 하고 말해보면 우리는 삶이 은혜임을 알게 됩니다. 감사의 렌즈로 지나 온 날을 돌아보면 조용히 우리 곁에 머무시면서 길을 만들고 계신 하나님이 보입니다. 감사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면 인생이 기적임을 알게 됩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우리의 영적인 건강을 체크해 볼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아침과 봄에 얼마나 감동하는가에 따라 당신의 건강을 체크하라
당신 속에 자연의 깨어남에 대해 아무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른 아침 산책의 기대로 마음이 설레어 잠에서 떨쳐 일어나지 않는다면,
첫 파랑새의 지저귐이 전율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 눈치채라
당신의 봄과 아침은 이미 지나가버렸음을."


하나님은 우리가 철 든 존재가 되라고 계절이라는 바퀴를 굴리고 계십니다. 봄·여름·가을·겨울, 각기 다른 언어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주님과 만나면 우리 생은 충만해집니다. 생이 선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만나든지 마음의 소원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아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평화로운 사람

넷째는 평화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렵고 복잡한 일을 만나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시리아의 왕 르신이 이스라엘 왕 베가와 함께 예루살렘을 치려고 몰려왔을 때 유다왕 아하스와 백성들의 마음은 '마치 거센 바람 앞에서 요동하는 수풀처럼 흔들렸다'(사7:2)고 합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전혀 흔들림 없이 왕 앞에 나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이사야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고, 왕과 백성들은 그 계획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약속은 거짓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 영혼의 닻이 된다(히6:19)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의 표징이 되어야 합니다. 존 웨슬리 목사가 탄 배가 큰 풍랑을 만났을 때 사람들은 저마다 비명을 지르면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웨슬리 본인도 몹시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배의 한 구석에서 조용한 찬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찬송를 부르는 이들은 독일의 경건주의자들인 모라비안 교도들이었습니다. 풍랑 앞에서도 고요한 그들의 모습이 웨슬리의 영혼에 각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미친 바람 거세게 부는 이 세상에서도 고요함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는 사나 죽으나 주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모든 교우들이 성도다운 삶의 내실을 갖추어 나가기를 기원하면서 사막의 성자인 샤를 드 푸코의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바치려 합니다.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 위에
이루어진다면
이 밖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도로 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하옵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제 영혼 바치옵니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시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